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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왜 (내세울만한) 브랜드가 없는 것일까?

1.


지인의 초대로 와인 모임을 다녀왔다. 그리고 샴페인, 꼬냑, 보르도처럼 프랑스의 지도 자체가 와인의 역사이자 보고임을 알게 되었다. 프랑스 하면 파리나 PSG 정도나 알고 있었던 나에겐 충격이었다. 지명 하나하나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브랜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모임에 함께 참여한 어떤 대표님과 가벼운 '논쟁'이 붙었다. 그건 바로 그분이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2.


"우리나라는 (좋은) 브랜드를 만들 수가 없어요."


나는 이 말의 숨은 뜻을 이렇게 이해했다. 우리나라 사람은 좋은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성향기나 기질을 갖고 있지 못해요, 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반박했다. 당장 일제 강점기나 6.25 같은 전란이 없었다면 달랐을 거에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주식회사인 '곤고구미'도 백제 유민들이 만든 회사인거 아세요. 하지만 이런 논리로는 주장을 이어가기엔 빈약했다. 그 정도의 전란이 없었던 나라가 어디 있었겠는가. 당장 프랑스만 해도 영국과 100년 전쟁을 했고, 두 번의 세계대전의 중심에 있지 않았던가.


3.


그러나 나는 '우리는 원래 안돼'라는 패배주의나 '그들이니까 가능했지'라는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싫어한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란 책이 나오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그들의 인종적인 우월성 때문에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에게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나왔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러나 밀과 같은 1년 살이 잡초가 잘 자라는 땅에 거주했기 때문에 문화가 번성했다는 환경결정주의 이론은 이제 대세가 되었다. 굳이 총,균,쇠를 끌어올 필요도 없는 것이 조선은 당파 싸움 때문에 망했다고 배우고 믿어온게 오래된 일도 아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패배주의가 일제 식민지 시절은 잔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4.


우리의 역사를 보면 신라만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도 500년이다. 학문적인 깊이가 없어서 논증할 수는 없으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지금의 여,야 처럼 임금이 중심이 아닌 신하가 중심인 나라가 바로 조선이었고, 그 때문에 한 두 왕의 실패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없었던 것이 올바른 팩트 아닐까. 그런데도 우린 왜 프랑스처럼, 일본처럼 몇 백 년에 걸친 '브랜드'를 찾아보기 힘든걸까. 어쩌면 우리 곁에 있음에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5.


그러려면 브랜드가 뭔지에 대한 정의부터 우선되어야 한다. 나는 브랜드를 제품이나 서비스를 통해 '가치'를 전달하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마케팅보다,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이나 비즈니스보다 그 범위를 넓게 보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브랜드를 트렌드나 유행을 넘어 문화나 문명, 생활양식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포도주는 단순한 하나의 제품이 아니다. 프랑스인들의 삶의 양식이자 라이프 스타일이다. 영국은 음식을 포기하는 대신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셰익스피어 같은 압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것이 프랑스인과 영국인이 가진 일종의 욕망의 결정체라고 생각한다.


6.


가까운 일본은 어떤가. 일본이 유럽에 수출하는 포장지의 그림이 서양 최고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그토록 흠모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최근까지 서양 사람들은 동양 문화 하면 가장 먼저 일본을 떠올렸다. 사무라이 문화, 아름다운 일본의 성, 다도, 음식, 에니메이션까지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은 브랜드를 조금만 공부해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일본의 옛수도인 교토만 가도 몇 백년 된 브랜드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우산 하나, 젓가락 하나, 부채 하나가 다 예술작품이나 브랜드이다. 프랑스의 지도를 보고 좌절하듯이 일본의 역사와 문화 앞에서 절망하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



7.


앞서 얘기한 '패배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대표님의 논리적 근거는 팩트에 가깝다. 우리는 가치있는 것을 브랜드로 만들 수 있는 소양이 부족한 나라다. 우리는 돈이 된다 하면 불같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다가 그 산업 자체를 붕괴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가발 산업이고 신발 산업이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들어내기는 커녕 생산 공장으로 커가다가 지나친 경쟁으로 그 산업 자체를 소멸시켰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가 프랑스처럼 와인 산지였다면 어땠을까? 하나의 탁월한 품종을 가지고 싸우다가 공멸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길고 큰 그림을 보고 브랜드를 만들기보다 집안 싸움, 자존심 싸움으로 끝장을 내버렸을 확률이 높다. 이것은 이민 문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일본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국에 가서도 서로 협력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모래알처럼 개인의 성공만 추구하다가 그 시장 자체를 뺏기거나 없애버린다.


8.


옥스포드 사전에 등록은 '재벌'이라는 단어가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재벌은 한 마디로 '혈족주의'다. 한 집안이 잘 되기 위해 온갖 특혜와 부패를 바탕으로 성장한 기형적인 회사이자 문화다. 가까운 대만만 해도 조그만 중소기업들이 산업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는 극소수의 이씨 가정이, 최씨 가정이, 정씨 가정이 한 나라의 산업을 좌우한다. 그것이 가진 경쟁력도 있지만 폐해가 엄청난 것도 사실이다. 브랜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삼성이나 현대, LG를 하나의 브랜드로 보기 힘들거나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 기업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9.


그렇다면 우리는 역시나 브랜드를 만들 수 없는 민족적 성향이나 기질을 타고난 것일까? 앞서 얘기한 수많은 팩트들이 이 가설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쉽사리 이 전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 브랜드가 단순히 애플이나 테슬라 같은 상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유산이다. 프랑스의 상파뉴 지역은 샴페인의 산지라는 이유로 그 지역 전체가 부자라는 말을 들었다. 꼬냑과 보르도 지방은 어떤가. 샴페인을 만들 수 있는 지역과 나라는 많다. 그러나 샴페인이라는 이름, 즉 브랜드를 쓸 수 있는 지역은 프랑스의 상파뉴 지역 뿐이다.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게 원산지의 오리지널리티가 지켜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브랜드는 먹고 사는 문제, 아니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의 핵심이 된다. 그런데 우리에겐 왜 이런 브랜드가 없는가. 왜 반만 년의 역사를 가졌음에도 내세울 문화가 치킨이나 아이돌 그룹 밖에 없는가.


10.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화가 날 것이다. 사실 치킨이나 아이돌 그룹처럼 소중한 문화도 없다. 하나의 문화가 브랜드로 자리잡으려면 전제 조건이 있다. 저변이 넓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이치로나 오타니 같은 야구 천재들이 나오는 이유는 4천 개에 달하는 고교 야구 팀 때문이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80개의 고교 야구 팀이 있다. 영국에서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동네마다 이야기를 만들고 나누는 소그룹 모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한동안 회사만 나오면 치킨집을 낸다고 푸념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그 결과 다른 나라는 흉내도 낼 수 없는 나름의 치킨 문화를 만들었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아이돌은 어떤가. 데뷔 한 번 하기 위해 10년을 수련생으로 있어도 군말을 하지 않는다. 눈물 나게 치열한 경쟁을 거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변이 넓어진다.



11.


나는 아직도 우리 사이에 남아 있는 패배주의와 열등의식이 두렵다. 우리는 안돼, 라는 생각은 철저히 식민 사관이다. 일본인들이 강점 기간 동안 철저히 교육시킨 결과다. 그리고 그 생각은 먹고 살만해진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차이를 가장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요즘의 MZ 세대이다. 이들은 놀랍게도 유럽이나 일본에 대한 열등 의식이 없다. 그러면서 아주 개인화되고 세분화된 핵개인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아주 이상적인 토양이다.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나이 4,50 정도의 사람들은 패배주의의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의 브랜드를 희망적으로 바라본다. 벌써 많은 영역에서 일본 대신 동양을 대표하는 나라가 우리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국뽕의 생각은 아니지 않은가.


12.


프랑스 와인은 그 역사와 이름만으로도 강력한 경쟁력을 가졌다. 일본도 비슷한 이유로 강력한 브랜드 대국이다. 그런 면에서 문화적 자산을 많은 부분 소실한 우리는 불행한 나라다. 나는 한글을 사랑하지만 하다못해 한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조선 시대 선비들이 남긴 문화를 향유하지 못한다. 나는 우리의 한시를 번역한 어떤 책을 보고 그 생각과 표현의 깊이에 엄청나게 놀랐던 경험이 있다. 한글 사랑과는 별개로 우리는 허리가 잘린 것처럼 우리 옛것의 위대함을 놓치고 있다. 중국의 문화혁명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찬란한 문화 유산을 브랜드로 전환하는데 실패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고 믿는다.


13.


나는 지금 '스타워즈; 에콜라이트'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참고로 이 작품은 정통 스타워즈의 외전 격인 작품이다. 이런 작품들 중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달로리안'과 '아소카' 등이 있다. 전체적인 세계관은 스타워즈를 따르되 수백 수천년을 오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그 실체를 알고 보면 스타워즈는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와 중국의 무술 문화, 동양의 정서를 자기 식대로 해석한 일종의 짬뽕 문화다. 왜냐하면 미국은 고작 200년의 역사를 가진, 그래서 자신만의 문화적 자신과 자긍심이 절대로 부족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타워즈는 자기 것이 아닌 남의 것으로 얼마든지 문화적 자산, 즉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물며 5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가 해내지 못할 이유가 않은가.


14.


하지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다. 브랜드란 쉽게 말해 먹고 사는 문제에서 시작해야 한다. 프랑스 상파뉴 지역은 어느 수도원의 신부님이 만들어낸 '샴페인'이라는 브랜드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이 수백 년간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고 있다. 쉽게 말해 경기도 이천와 여주의 쌀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추앙받고 사랑받는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러나 이런 브랜가 융성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저변의 확대이다. 그래서 나는 이 땅의 미래가 스몰 브랜드, 즉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식당, 가게, 학원, 병원 같은 자영업자들이 더 많아지고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해지는 방법을 절실히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4천 개의 고교 야구, 고시엔(전일본고교야구대회)에 대한 열망이 수많은 전설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물론 오타니 같은 야구 영웅과 산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자. 600만에 가까운 자영업자들을 불필요한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저변으로 바라보고, 자랑스러워하고, 도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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