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버's 다이제스트 #31.
1.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아 와인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직 방송국 PD분께서 그날 저녁 총 6종류의 화이트 와인을 소개해주셨지요.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프랑스는 지역명 자체가 와인 브랜드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도 이천 쌀이 있고 충주 사과가 있지만 글로벌한 브랜드로는 아직 갈 길이 머니까요. 게다가 샴페인과 꼬냑, 보르도 산 포도주에 얽힌 스토리들은 끝이 없습니다. 그 스토리가 모두 무형의 자산이라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2.
김도영 작가가 쓴 '브랜드로부터 배웁니다'에는 바로 그 샴페인 브랜드의 스토리가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샴페인 병을 거꾸로 세워 일일이 제거하는 과정을 말하는 '르뮈아주', 이렇게 모인 침전물을 급속 냉동시켜 탄산의 압력으로 한 번에 내보내는 '데고르즈망' 같은 과정 역시 이 브랜드를 만든 창업자의 손을 거쳤더군요. 그날의 와인 수업이 생생하게 다시 떠올라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그 브랜드가 바로 이 책을 통해 소개된 '뵈브 클리코(미망인 클리코)'입니다.
3.
이 브랜드는 1775년 프랑스 상파뉴 지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 CEO가 되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앞서 소개한 혁신적인 방법들을 개발해내죠. 지금이야 동양인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말만 해도 온 세계 축구계가 들썩이는 형국이지만 그때의 여성은 지금보다 더한 차별을 온몸으로 받았던게 사실입니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니 과거의 프랑스가 어떠했는지 상상이 갑니다. 아무튼 이렇게 시작한 뵈브 클리코는 250년이 넘도록 수많은 라인업을 출시하며 사랑받고 있습니다.
4.
하지만 이 브랜드가 사랑받는 건 단지 오랜 역사 때문만은 아님을 금방 알게 됩니다. 이 책은 그 중 하나로 이 브랜드의 '정체성identity'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술로 각인된 샴페인을 '위대한 여성의 담대한 도전'이라는 화두로 풀어내 차별화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일본의 어느 두부 브랜드가 사내 '남'자를 크게 적어 남자다움을 강조한 '오토코마에' 두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뵈브 클리코는 이후 이 브랜드의 상징이 되는 노란색 라벨에 커다란 닻 표식을 그려넣은 로고를 완성하죠. 이 색은 이후 '뵈브 클리코 옐로'라고 불리며 세상에서 하나뿐인 컬러로 인정받게 됩니다.
5.
이뿐 아닙니다. 뵈브 클리코는 매년 혁신적인 비즈니스를 이끈 여성 사업가를 정해 '볼드 우먼 어워드Bold Women Award'라는 이름의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당당하고 진보적인 창업자 마담 클리코를 기리기 위해서죠. 이쯤 되면 이 브랜드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선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어쩌면 250년이라는 이들의 역사는 농구선수의 왼손처럼 거들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겠네요.
6.
하지만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저자는 샌프란시스코 나파밸리에서 만난 어느 나이 지긋한 소믈리에 할아버지의 말을 다음과 같이 담담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와인은 그냥 저장해둔다고 알아서 숙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해 수확한 포도 품종은 물론이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기후나 환경,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다양한 외부 요인들에 맞춰 계속 관리를 해야 하는 포인트들이 있죠."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언이 이어집니다. "가만히 두기만 하는 건 숙성이 아니에요. 숙성은 우리가 원하는 맛을 얻기 위해 계속 초점을 맞춰가는Focusing 과정이라 할 수 있죠."
7.
저는 오래도록 사랑받는 브랜드의 속성을 진정성과 지속가능성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의 러브마크와 같은 브랜드를 만들어가죠. 그런데 이 지속가능성이 그저 오래 견디는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와인의 숙성 과정과도 같아서 원하는 품질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시간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그저 한 두해 정도만 사랑을 받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듯한 요즘의 '핫한' 브랜드들을 조금은 거리를 두고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런 브랜드를 가진 나라들을 부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부러움은 사대주의와는 분명이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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