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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소년의 시간'을 보고...

어머니가 부산 집으로 돌아가셨다. 일주일을 꼬오꼭 눌러 담아 나름 행복하게 놀다가신 듯 하다. 이런저런 투정을 잘 받아주는 며느리와 함께 롯데 월드 전망대도 다녀오시고 올림픽 공원 꽃놀이도 아들 손 잡고 다녀오셨다. 집 근처 황톳길 갔다가 도토리 주워 묵도 쒀서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 돌아가시는 날엔 온가족이 배웅하고 얼마 안되지만 용돈도 슬쩍 넣어드렸다. 그렇게 그냥 저냥 해피엔딩으로 추석을 끝내는가 싶었는데... 부산집으로 내려가신 어머니가 전화를 해서 울먹이며 얘기하신다. "아들아, 제발 좀 깨끗하게 하고 살아라"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어머니는 극단적으로 깨끗하게 사시는 분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청소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우리 집은 둘 다 일하는데다 고양이가 세 마리나 함께 산다. 이게 무슨 말인지 키워보신 분은 알 것이다. 털 날리는 것은 기본이고 화장실을 두어도 꼭 소파 뒤에 용변을 보는 놈이 있다. 헤어볼 개워내는 장소는 따로 없다. 모든 가구는 스크래치감이 되고 옷에는 스치기만 해도 털이 쌓인다. 검은 옷 입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니 어머니는 얘기하신다. 고양이를 치우라고. 하지만 어디 그럴 수 있나. 8년을 함께 산 식구인데. 각각의 고양이가 사연이 있다. 집이 더럽다는 이유로는 내칠 수 없는 존재들이다.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이런 우리 가족 마음을 이해 못하시리라.


추석 끝물에 '소년의 시간'이라는 영국 드라마를 보았다. 4편짜리 드라마를 4시간 동안 몰아서 보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특히 3편이 압권이다. 인생 첫 연기라는데 1시간 동안 마치 연극을 하듯 논스톱으로 연기를 한다. 필름을 이어붙이지 않고 실제로 한 시간 동안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촬영 방식과 압도적인 연기도 놀랍지만 그 내용은 더욱 소름 끼친다. 주인공은 내 기준으로 아주 잘생긴 친구다. 그러나 13살 짜리 이 친구는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말한다. 여자를 바라보는 아주 왜곡된 시선을 가졌다. 극 중에 나오는 '인셀'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연애를 하고 싶지만 결코 할 수 없는, 이른바 루저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이 꼬마 남자애가 결국 그 말을 한 여자 친구를 살해하고 만다. 그것이 이 드라마의 거의 모든 이야기다.


이 남자애는 왜곡된 인터넷 문화의 영향을 그릇된 남성성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도와주러 온 여자 심리 전문가를 성적인 대상으로 이해하고, 무시하거나, 유혹하거나, 그릇된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마치 고장난 기차가 폭주하는 듯 섬뜩한 말을 상대방에게 쏟아낸다. 뭔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관객들의 마음을 아주 야멸차게 짓밟아놓는다. 가장 슬픈 점은 이런 주인공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가족이 있다는 거다. 그러나 이 아이를 둘러싼 학교 환경, 온라인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 아이는 결국 진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잘못된 환경,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살인'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 만다.


우리 어머니에게도 나름의 세계가 있다. 그 중 하나가 깨끗함에 대한 기준이다. 그 기준에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은 없어져야 할 존재들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 고양이는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더할 수 없이 큰 위로를 주는 존재들이다. 평소엔 모른 척 하다가도 잠들 무렵이면 골골송을 부르며 품 안에 안기는 그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어머니는 모르신다. 그러나 이 정도면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이해 못해도 공존할 수 있다. 애써 설득하지 않아도 모른 척 하면 그만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예의로 극복 가능한 수준이다. 하지만 '소년의 시간'에 나온 주인공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 아이가 사는 세상은 그 기준을 허물 정도로 위험한 환경임에 틀림 없다.


'다름'이 혐오가 되는 세상이다. 요즘엔 '영포티'를 비하하는 문화가 온라인에 팽배하다고 한다. 40대가 20대처럼 되고 싶어 오렌지색 아이폰을 쓴다고 한다. 애초에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를 몰랐던 나는 그 영포티의 첫 번째 특징이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본다는 것을 보고 금새 이해했다. 보수화된 20대가 민주화 시절을 거치면서 나름의 정치 성향을 가진 4,50대를 비난하기 위한 인터넷 문화인 셈이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그들끼리 무슨 생각을 주고받으며 나름의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 '혐오'의 문화는 아닐까.


'다름'은 소중한 것이다. 우리 모두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태어났으니까. 그것이 '나다움'의 기초가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혐오'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소년의 시간' 속에선 20%의 남자들이 80% 여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다고 한다. 그렇게 80%의 남자들이 버림받는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왜곡돈 여성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것이 영국의 어린 남자들의 얘기이기만 할까. 내가 보기엔 우리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지금의 1,20대가 우경화되는 것은 경제적으로 성적으로 소외된 대한민국 '소년'들의 존재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어머니를 이해한다. 그렇다고 고양이를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의 우리나라 소년들의 상황을 이해한다. '소년의 시간' 속에 나오는 학교 환경을 보면서 놀랍기도 했고 무섭기도 했다. 저 속에서 어떻게 올바르고 균형잡힌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여성과 세상을 왜곡되게 바라보는 성인으로 자라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역할의 핵심에 다름아닌 '가족'이 있다고 믿는다. 생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이 절대로 '혐오'로 이어져선 안된다. 지금의 상황도 비교할 수도 없는 잘못된 환경을 우리는 이겨내고 바꿔왔다. 그 결과물이 바로 '민주화'다. 지금의 소년들이 그 역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존중해주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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