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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

자기다운 인터뷰 #05.

2007년 독일, 하인스베르크 국제 기타 콩쿠르가 열리고 있는 현장에선 긴장어린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결선에 오른 다섯 명 중 관객들이 최고의 연주자를 직접 뽑는 청중상 심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표 작업은 천여 명의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그 순간, 연주를 끝낸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래의 꿈이 뭐냐고 묻는 말에 아이는 다음과 같이 답했었다. “아홉 살이 되고 싶어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컥하며 올라오던 무언가가 다시 떠올랐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꿈이 되어버린 그 아이에 비하면 지난 1년간의 유학생활이 가져다준 어려움이 사치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의 스승과 선배와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던 압박감에 쫓기던 나날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연주가 무엇인지 고민했다. 콩쿠르 참가곡도 선생님의 가이드 없이 자신이 직접 골랐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연주가 주는 감동을 경연의 현장으로 고스란히 옮겨갔다. 그때 심사위원이 ‘기립’을 외쳤다. 심사위원들이 선택한 1등상에 이어 청중들 역시 그녀를 선택한 최고의 하루였다.

“나는 체구도 작고 손도 작아 다른 남자 연주자들보다 음량도 작고 실수도 많은 편이다. 두세 배는 더 세게, 정확히 힘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너의 연주 자체가 아름다웠다’며 1등상을 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칭찬이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은 연주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음악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을 나만의 연주로 보여주는 것 말이다.”

1등 없는 2등을 넘는 법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는 세 살 때 처음으로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가난한 부모님의 일본 유학 시절, TV 한 대 없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엄마의 기타 강습소를 (어쩔 수 없이) 따라간 것이 계기가 됐다. 하지만 엄마와 달리 딸은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기타를 놓지 않았다. 너무 어리다고 학원에서 받아주지 않는 6개월간 다섯 살 짜리 아이는 두세 시간씩 혼자 연습을 계속했다. 엄마는 별수 없이 거절했던 그 학원을 다시 찾았고, 그녀는 그곳에서 인생의 첫 번째 스승을 만났다. 그녀의 프로필에서 항상 첫 번째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는 리여석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원래 중학교 국어 교사셨다. 그런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기타 연주를 듣고 그 날로 교직을 그만두고 기타를 시작하셨다고 한다. 한 번은 내가 기타 악보를 가위로 아무렇게나 자르는 모습을 보고 엄청나게 혼을 내셨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누구에게든 배워야 한다’였다. 보통 클래식 음악계에선 자신의 제자가 다른 스승에게 배우는 걸 허락하지 않지만 선생님은 그렇지 않았다. 마침 부모님의 이민을 반대하던 내가 결국 일본으로 가게 된 것도 선생님이 강권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중학교를 마친 그녀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후쿠다 신이치에게서 사사를 한다. 당시 일본인 최초로 파리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던 그는 이미 많은 제자를 키워내고 있었다. 당시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무섭게 떠오르던 신성 무라지 카오리 역시 그의 제자였다. 이후 그녀는 일본의 각종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하며 도쿄 음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작은 그늘도 있었다. 무려 4번이나 1등 없는 2등을 했기 때문이다. ‘뭔가 모자라다’라는 심사평이 이어졌으나 정작 그 ‘뭔가’가 무언지를 말해주는 심사위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유럽의 채점 방식은 한국이나 일본과는 다르다. 한국과 일본은 25점 만점에서 1점씩 감점하는 방법으로 채점하지만, 유럽은 0점에서 시작해 1점씩 더하는 방식으로 심사한다. 일본에서 1등 없는 2등상을 자주 받은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실수로 평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선 연주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는 실수들은 감점되는 경우가 덜하다. 혹 실수해도 ‘그건 실력이 아니라 사고였다. 인간이니까 낼 수 있는 사고다’라며 나쁜 점이 아닌 좋은 점에 집중해주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녀의 유럽 콩쿠르 제패는 이후 급물살을 탄다. 하인스베르크에서의 1등상과 청중상을 시작으로, 피아노 콩쿠르의 대명사인 차이콥스키와 쇼팽에 비견되는 벨기에 프렝탕 기타콩쿠르에서 아시아인 및 여성 최초로 1위를 한다. 이후 알함브라 국제기타콩쿠르 1위, 리히텐슈타인 국제기타콩쿠르 1위, 이탈리아 바리오스 국제기타콩쿠르 1위, 스페인 루이스밀란 국제기타콩쿠르 1위 등의 수상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의 배경에는 어렵사리 들어간 도쿄음대를 중퇴하고 아무런 연고 없는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던 ‘무모한 도전’이 있었다. 문득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도쿄음대를 뛰쳐나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파워가 부족하고 지루하다? 섬세하고 아름답다!

“여름방학 때 우연히 유럽의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좋은 음악을 매일 쉽게 접하고 즐기는 환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침 운 좋게 클래식 기타의 대가인 알바로 피에리 선생님의 마스터클래스 레슨을 받을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그분이 내 연주를 들어 보고 이렇게 묻는 거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라고.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충격이 컸다. 아무 생각 없이 연주하는 나를 정확히 꿰뚫어본 거다. 바로 그때 이분에게 배워야겠다는 확신이 들어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자퇴서를 냈다.”

그렇게 시작된 빈 국립음대 생활은 이후 7년간 이어진다. 다행히 스승인 알바로 피에리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스쳐 간 많은 이들과 달리 ‘조금만 도와주면 스스로를 끌어갈 수 있는데 그런 도움을 못 받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이후 그녀는 틈틈이 일본에서의 활동을 이어가며 콩쿠르의 도전을 이어갔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지연에 이어 두 번째로 전통의 레이블인 데논의 전속 레코딩 아티스트가 되어 앨범도 냈다. 일본에선 ‘파워가 부족하고 지루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그녀가 ‘섬세하고 아름답다’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무렵부터다. 하지만 유학생활이 그에게 가져다준 변화가 비단 이것뿐일까? 단지 훌륭한 스승과 좋은 교육 환경 때문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그렇듯 이곳 역시 저녁 6시만 되면 사람들이 거리에서 사라진다. 두 동생과 항상 왁자지껄하며 지내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연습과 생각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한 번도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한국에서 예원학교를 다니는 동안 무려 2년 넘게 소위 ‘왕따’라는걸 경험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착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선 ‘너는 그런 의견이니? 나는 이런 의견이야’하고 끝나버리는 게 아닌가. 그때부터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에 자유롭게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입니다

사실 그녀가 클래식 기타에 남들보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악기가 가진 고유한 개성도 큰 역할을 했다. 그녀는 지금도 기타를 안고 있을 때가 가장 편안하다고 말한다. 쇠줄로 된 어쿠스틱 기타나 전자 기타와 달리 클래식 기타는 나일론 줄로 연주한다. 코드 위주로 연주하는 통기타 보다 정교한 ‘연주’가 가능한 클래식 기타지만 바이올린이나 피아노에 비해 자기주장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키 150cm의 아담한 체구와 작은 손은 화려한 연주에서는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유수의 콩쿠르에서 우승해온 그의 가장 큰 경쟁력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기타리스트들의 경우 대가들은 다 특징이 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연주를 하고 어떤 사람은 정교한 기교를 보여주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파워풀한 연주로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자기만의 개성을 가지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것이다. 나는 무조건 자연스러운 게 좋다.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기교를 부리는 연주나 표현은 하지 않는다. 취미가 사진인데 풍경도 좋아하지만 그곳이 어딘지 모르게 찍는 걸 더 좋아한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은 스쳐보내는 것들에 눈길을 줄 수 있는 그런 자연스럽고 섬세한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닌가 싶다.”

2014년 여름의 초입, 홍대의 어느 카페 지하 공연장에서 그녀의 연주를 직접 들을 기회가 있었다. ‘꽃보다 할배’에서 나영석 PD가 할배들을 위해 감미롭게 연주했던,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에서 ‘예스터데이’ 까지는 문외한인 나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에 이어지는 탱고를 포함한 다른 곡들은 클래식 기타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들이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이었다. 클래식 기타의 원형이 되는 스페인 특유의 강렬함과 자유분방함이 어쩌면 그녀 스스로 규정지은 ‘자기다움’의 또 다른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천여 명의 열광하는 관객도 없고, 인터뷰할 때마다 클래식 기타와 통기타의 차이를 거듭 설명해야만 하는 외로운 고국 땅을 굳이 찾아오는 이유가 마지막으로 궁금해졌다.

“친한 선배 오빠가 한국에서 빌라에 살았는데 맨 아래층에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종종 그곳에서 연주도 하고 클래식 기타가 통기타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연주하는지를 이야기하며 바의 주인이랑 친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 오빠가 이사를 가던 날 마지막으로 하는 그가 던진 인사말이 ‘어, 그래. 노래 열심히 해!’였다. 그렇게 클래식 기타에 관해 이야기를 해줘도 여전히 바 주인에겐 통기타 가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연주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고 특별한 의미보다는, 진짜 이렇게 좋은 악기가 있는데 몰라주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아쉬움 없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연주 말이다.”

<클래식 기타 연주하는 '박규희'가 더 궁금하다면...>

- 박규희 페이스북 : http://goo.gl/OiwN40
- 숲 속의 꿈 (A. 바리오스 망고레), 박규희 연주 :http://goo.gl/3iOKoo


(* 이 글은 유니타스브랜드 페이스북을 통해 소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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