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다운 인터뷰 #06.
그는 디자이너다. 마운틴뷰에 있는 구글 본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리더로 일한다. 국내 유수의 웹 에이전시와 야후 코리아, 구글 코리아의 첫 번째 디자이너를 거쳐 2010년부터 구글 본사로 스카웃되어 일하고 있다. 한 사람의 프로필로 부족함이 없어 보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아티스트로 다양한 아트웤 활동을 하고 있고, 국내 스타트업 회사의 디자인 자문도 맡고 있다.
무엇보다 그는 축구를 좋아한다. 단지 축구가 좋아 영국과 독일의 모든 경기장을 여행하고 왔을 정도로. 그리고 그 경험과 기록을 가지고 벌써 두 권의 책을 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만큼이나 '디자이너'인 그가 축구 여행을 떠난 이유가 유독 궁금해졌다. 그리고 역삼동 스타타워에 자리 잡은 구글코리아 본사에서 막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만났다. 글로벌한 쿨함과 한국적인 수줍음이 딱 절반씩 섞인 모습이 그에 대한 솔직한 첫인상이었다.
Q. 디자이너와 축구라니, 낯선 조합이다. 언제부터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나?
원래 축구 마니아는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2002 월드컵 때부터 빠져들게 된 것 같다. 야후 코리아에서 미디어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자연스럽게 축구를 접하게 됐다. 마침 박지성 선수가 맨체스터 유니타이티드에 입단하면서 공식 홈페이지 디자인을 맡기도 했다. 정보가 쌓이고 관계들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커진 것 같다.
Q. 이번 여행이 첫 여행이 아니라고 들었다.
2009년 12월, 3주 정도 휴가를 내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20개 구단을 돌아보고 왔다. 내가 좋아하는 축구와 여행, 디자인을 믹스한 책을 갖고 싶어서였다. 그때만 해도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청용(볼튼), 설기현(풀럼), 조원희(위건) 같은 선수들이 그곳에서 뛰고 있었다. 모두 네 경기를 직접 관람하고 왔는데 그 기록을 담은 책이 <곡괭이 싸커홀릭>이라는 책이다.
Q. 그때의 경험이 강렬했던 모양이다. 다른 리그도 많은데 두 번째 행선지가 하필 독일의 분데스리가였나?
구글 취리히 오피스에 몇 주간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지구 특공대'라고 당시 구자철, 지동원 선수의 인기가 엄청났었다.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기차로 6시간 정도의 거리에 두 선수의 소속팀인 아우크스부르크가 있었다.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무작정 새벽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
Q. 거기서 무엇을 보았나?
경기장에서 구자철, 지동원 두 선수의 플레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왔다. 전광판에 이 두 선수가 소개될 때마다 모든 관중이 "구~구~" "지~지~"를 외쳐댔다.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감동이다.
Q. 그 경험이 독일의 전 경기장을 둘러볼 결심을 하게 한 건가?
그 출장 이후 두세 달 후에 독일 여행을 결심했다. 말이 여행이지 15일 동안 17개 지역을 돌아다니는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게다가 급하게 잡은 일정이라 자동차 예약도 늦게 하는 바람에 렌트한 차가 현대차였다. 독일에서 i20를, 그것도 오토가 아닌 스틱을 몰고 아우토반을 달렸다.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아우토반이 시작되는 바람에 천천히 간다고 뒤에서 난리가 났다. 여행치고는 참 요란한 시작이었다.
Q. 첫 번째로 찾아간 구장은 어디였나?
프랑크푸르트였다. 그날 뮤지엄이 오픈하자마자 첫 번째로 들어갔는데 문득 낯익은 얼굴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바로 차범근 선수였다. 차범근 선수가 독일에서 선수 생활을 한 건 알았지만 그렇게 많은 사진과 동영상이 아직도 전시되어 있을 줄은 몰랐다. 거기서 그의 모든 역사를 만났다. 감개가 무량했다. '이 여행 정말 잘 풀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Q. 인터뷰 하는 동안 '이 여행 잘 풀린다'는 말을 벌써 네 번째 들었다. 원래 매사에 긍정적인 편인가?
그 해 열린 챔피언스리그 4강에 독일 클럽 두 팀이 올라갔다. 도르트문트와 뮌헨인데 결국 이 두 팀이 결승에서 만났다. 당시의 손흥민은 이미 함부르크 최고의 선수였다. 독일 축구 여행으로 이보다 좋은 타이밍은 다시 없을 거라 생각했다.
Q. 18개 도시 중 가장 인상 깊은 구장은 어디였나?
단연 도르트문트다. 이 팀의 컬러는 노랑과 검정 두 색이다. 색깔부터 센스 있는 매치 아닌가. 경기장부터 디스플레이, 스토어, 뮤지엄까지 모두 이 두 가지 컬러로 매칭되어 있다. 등번호까지 일반적인 서체가 아니라 그래픽 서체를 썼다. 경기장 투어 때 본 동영상도 잊을 수가 없다. 현직 가이드들도 도르트문트가 브랜딩을 가장 잘한다고 인정할 정도다.
Q. 축구장을 가도 디자이너는 디자이너인 모양이다. 어떤 점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규모로만 보자면 뮌헨의 알리안츠 스타디움이 최고다. 하지만 도르트문트는 도시와 축구, 경기장과 사람들이 하나처럼 어우러져 보인다는 게 달랐다. 도시 자체로도 예쁘다. 도르트문트의 상징 동물인 코뿔소가 도시 곳곳에 숨어 있다. 이를테면 코뿔소가 악기를 코에 꽂아놓고 있는 곳은 오케스트라 연주가 열리는 곳이고, 쇼핑백을 코에 달고 있으면 쇼핑센터인 식이다. 게다가 독일 축구의 역사를 담은 축구 박물관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
Q. 이 여행이 단순히 '축구'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처음부터 뚜렷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떠난 여행은 아니었다. 축구가 좋아서 시작한 여행이지만 중간중간 디자인을 보면서 자극을 받는 과정이기도 했다. 에센이란 도시는 레드닷 디자인뮤지엄으로 유명한 곳인데 놀랍게도 공장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부를 뮤지엄으로 리폼한 사례다. 안으로 들어가면 자동차가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보인다. 공장이니까 가능한 디스플레이였다. 그런데 그 안은 더 놀라운 디자인 상품들로 가득했다. 나 혼자 보는 게 아까울 정도로. 내 작품이 이런 곳에 전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Q. 한국의 일반적인 디자이너들에겐 부러우면서도 멀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주변의 친구나 지인들을 보면 일에 파묻히면서 초심을 잃어버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브랜딩하는데 좀 더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다. 기업들이 BI나 CI 작업을 통해 자신만의 관점과 철학을 보여주듯이 스스로를 하나의 기업으로 생각하고 브랜딩해보는 거다. 예를 들어 이번 여행을 기록한 책의 표지에 보면 한글 자음 세 개가 겹쳐져 있다. 나는 단지 싸커, 독일, 여행의 세 글자의 첫 자음을 조합했을 뿐인데 재밌게도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해석하는 걸 본다. 욕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만의 개성을 시각적인 장치로 표현해보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구글에서 UX 비주얼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서 무얼 보고 깨달았나?
최근 구글은 다양한 디자인들이 추가되면서 이전의 미국 스타일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다. 내가 직접 디자인 가이드라인 작업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미국 현지에서 일하다 보니 이들의 관심이 아시아 쪽으로 옮겨지고 있음을 확실하게 느낀다. 미국이나 유럽이 보편적인 디자인에 강하다면 아시아 지역은 매우 감성적이다. 이렇게 다른 성향을 녹여내면서 시너지 효과가 나고 있다.
디자인에 강한 한국의 작은 스타트업을 직접 자문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지만 이를 브랜딩으로 연결하지 못하는 걸 자주 본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소셜 네트워킹을 활용해 기업이나 단체들에 판매하고 싶은 계획도 가지고 있다.
Q. 지금의 여행과 기록이 앞으로의 계획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
영화 '건축학개론'을 보면 여자 주인공이 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을 남자 친구와 함께 개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과거에 대한 흔적들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집을 리폼한다. 이렇듯 디자인에 감성이 가미되면 더 큰 경험을 끌어낼 수 있다. UX 디자인을 하는 많은 사람이 인테리어나 건축 쪽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걸 자주 본다.
나도 직접 의자를 만들어보려고 공부도 많이 했고 조명에도 관심이 많다. 디자인이 우리의 주변과 삶 곳곳에 존재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축구를 테마로 여행을 하다 보니 디자인이 어떻게 사람들의 한 사람의 삶과 도시, 문화 속으로 스며들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닌 사람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편의를 경험으로 전달하는 디자인을 만들어가고 싶다.
Q. 축구 여행은 이번이 마지막인가?
그럴 리가. 다음은 스페인이 되지 않을까 싶다. 4년쯤 후면 이승우, 백승호 같은 선수가 프리메라리가에서 뛰고 있지 않을까? 상상만 해도 벌써 흥분이 된다.
구글 디자이너 '김선관'이 더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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