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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발견을 위한 넓고 얕은 팟캐스트

스몰 스텝 다이어리 #04.

다니던 회사를 대책 없이 그만 두고 3개월을 쉰 적이 있었다. 쉬는 것은 일하는 것 못지 않게 힘든 일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의 남자가 벌건 대낮에 집 앞을 서성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그게 자격지심이었든 뭐였든 동네 사람 모두가 나의 존재와 위치를 불안한 눈길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선택한 곳이 동네 도서관이었다. 그제서야 알았다. 나같이 조용한 곳,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 도서관이라는 것을. 책은 무려 공짜인데다 점심식사까지 저렴했다. 식단 메뉴는 평가하기 민망할 정도로 조악한 것이긴 했어도 백수에겐 그조차 사치였다. 아무튼 그곳에서 3개월을 같은 자리에 출석했고 나는 다시 일하던 회사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나는 80년대 이후 한국의 문학상 수상집을 모조리 섭렵했다. 김애란, 김연수, 김영하 같은 알려진 작가의 작품도 읽었고 하승란, 편혜영, 한강 같은 작가도 만났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 말로 쓰여진 작품도 제대로 모르면서 번역된 외국 소설에 탐닉하는게 왠지 꺼림칙했다. 물론 그런 호사를 누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지만.


그래서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만났을 때 그렇게 기뻤는지도 모른다. 그 많은 작가들 중에서도 소재와 스타일에서 단연 돋보였던 작가 하나가, 자신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소설과 논픽션, 때로는 시집(중의 몇 편을)을 통째로 읽어준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열광했다. 팟캐스트의 존재만 알고 있었던 때였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이어폰을 꽂고 화면을 터치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출근길의 빽빽한 지하철 객차 안이 소설의 무대가 되었다. 논픽션의 현장이 되었다. '수면제'로 유명한 김영하의 목소리도 나를 잠재우진 못했다. 사람의 육성으로 '듣는' 소설은 '읽는' 것과는 또다른 감동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다. 그렇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를,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초'를,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주제 사마라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을,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를 읽었다. 아니 들었다. 그렇게 나의 팟캐스트를 향한 탐닉이 시작되었다.


김애란의 소설을 좋아한다. 나라면 내 얘기를 그렇게 썼을 것 같아서다.


그즈음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뒤늦게 듣기 시작했다. 통째로 소설을 읽어주는 친절은 없었으나 평소 좋아하던 이동진 평론가와 소설가 김중혁의 콜라보는 한 주의 고단함을 한 번에 날려줄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나와 비슷한 취향의 나와 비슷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떠드는 수다는 흥겹고 즐겁고 유쾌한 일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들의 수다에 동참했다. 김애란 작가가 나왔고 김영하 작가도 나왔다. 새롭게 떠오르는 신진 작가들과 이름만 알고 있었던 오래된 작가들이 그들과 함께 문학과 인생과 때로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모두가 이 팟캐스트에 열광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이 자칫하면 ‘황금 모자를 쓴 개츠비’가 될 수 있었다는 잡담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다. 문학과 시사, 과학, 역사, 상식 등 서점과 도서관이 결코 알려줄 수 없는 책에 대한 안목과 식견을 덤으로 얻게 되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누군가는 오버워치라는 게임의 승리를 통해 쾌감을 얻고, 누군가는 한정판 빨간 구두를 손에 넣고 세상을 얻는 듯한 기쁨을 누리듯이 나같은 사람은 글로 쓰여진 이야기와 기록이 담아내는 지혜를 통해서도 그와 비슷한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 그건 옳고 그름도, 나음과 못함의 문제가 아니다. 오롯이 취향의 문제이자 개성의 문제다.


팟캐스트를 향한 나의 욕심은 다양한 방면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통해 상식의 지평을 넓혔다. '대화반점(지금은 대화만점으로 바뀌었다)'을 통해 대화법을 배웠다. '황상민의 심리 연구소'를 통해 이 시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갈급해하는지를 공감할 수 있었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청춘라디오'를 통해 균형있는 시사적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휴식을 위한 지식'은 평소 잠자고 있던 전쟁사와 문명사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었다. '나는 1인기업가다'를 통해서는 혼자 일하는 자의 생존법을, 'B CAST'를 통해서는 '브랜드'라는 익숙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이슈에 대한 감을 유지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를 끌어당기는 힘의 원천을, 내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의 근원을, 나름 움직이는 힘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적 호기심'이었다.


무명?의 네 젊은이가 사람들의 숨어 있던 욕구를 건드렸다. 폭발음은 상당했고 여진은 진행 중이다.


며칠간 좋아하는 것을 취미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돈이 된다고 해서 무엇에 열광한다는 그건 더이상 취미가 아니게 된다.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보이기 위해서 하는 취미는 천박해지기 쉽다. 그저 그것이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을 우리는 취미이자 취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이 취향이라는 불꽃은 삶의 무게와 반복되는 일상에서 잃어버리기 쉽다.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다급할 때는 가장 먼저 놓아버리는 무엇이다. 하지만 기어이 그것을 되찾아낼 때 우리는 이 힘든 일상과 하루를 이겨낼 힘을 얻는다. 취미와 취향과 습관의 유용함은 이렇든 일상적이고 실제적이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하지 못해도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아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만의 취향과 취미와 개성을 가지고 살아갈 줄 안다. 그것이 그 사람의 '자기다움'이자 '자존감'이다.


그 누구와 비교해도 주눅들지 않을 수 있는 자존감은 이렇듯 매일 반복하는, 힘이 되는, 취향과 취미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닐지.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내게 힘을 주는 것이 명확해지자 남이 이룬 그 무엇이 조금은 '덜'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이끄는 힘을 따라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성공적일 때는 자신감이 되어 돌아왔고, 혹 실패할 때에라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이 음악이 맞지 않으면 다른 음악을 찾아나서면 되는 것처럼, 이 소설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작가의 작품을 선택하면 되는 것처럼. 그리고 팟캐스트는 그렇게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고 개성을 만들어가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단 한 푼의 돈도 들이지 않고서 말이다.


불면증이 심한데 김영하와 소설을 좋아한다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은 결코 얕지 않고 생각보다 넓다. 이 똑똑한 네 젊은이?의 세 시간에 이르는 수다를 듣다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어떤 분야에 흥미를 가지고 지식을 쌓아가는 학습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자각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학습하게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사람, 도를 닦는 사람과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 시장 경제의 힘을 믿는 사람과 체제의 전복을 꿈꾸는 사람이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것은 아니었나 보다. 매회 수백 만의 사람들이 이 '수다'를 듣기 위해 팟캐스트에서 해당 에피소드를 다운받는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공유하고 열광한다. 그리고 카페에서 만나고, 자발적인 소모임을 만들고, 책을 발간하고, 수백 명이 모이는 공개방송을 진행한다. 각자의 '다름'이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공존'의 모습은 이렇게 우리들 가까이에 어느 새 다가와 있다.


나는 '스몰스텝'을 주제로 한 서너 개의 모임을 다양하게 진행해왔다. 만나기가 어려우면 매일 책을 읽고 메시지를 나누는 방법으로 공감의 유익함을 오랫동안 누려왔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평을 넓히기 위해 다시 두 개의 전혀 다른 독서 모임에 가입을 했고 무려 19만원이라는 비용을 치뤄가며 '트레바리'라는 독서모임을 신청했다. 같은 주제의 책과 다큐를 읽고 4개월 동안 만나는 모임이다. 이 모임은 심지어 책값은 물론 해당 다큐멘터리 역시 자기 돈으로 직접 사보아야 한다. 리뷰를 사전에 올리지 않으면 자동으로 탈락된다. 그런데 이런 모임이 벌써 수 년째 이어질 뿐더러 해마다 규모를 키우고 있다. 왜 이들은 이런 모임에 열광할까? 책이나 다큐멘터리의 주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으로부터 공감받고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그 과정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이 '자각' 때문은 아닐지. 그리고 팟캐스트는 이런 변화의 움직임에 기름을 부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기름을 뒤집어쓴 평범한 사람 중 하나다.


무엇을 읽느냐만큼, 왜 모이는가가 궁금한 유료 독서모임 '트레바리'


내가 누구인지를 안다는 것은 골방의 심리검사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타인의 생각에 공감하며 그 깨달음을 일상과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나는 나 혼자로 완성될 수 없고 언제나 타인들과의 교감을 통해 조금씩 나아질 수 있다. 만일 세상이 오늘보다 내일 더 좋아진다면 그런 개인이 조금씩 늘어가는 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무언가를 해낼 때 세상은 조금 더 좋아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시작은 언제나 그렇듯 아주 작고 사소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흑인의 인권 운동이 버스 좌석 하나에 대한 다른 선택으로 시작되었듯이. 그 생각에 동조하는 수많은 흑인들이 무려 1년 이상 걸어서 출퇴근을 하는 과정을 통해서 성공에 다다랐듯이. 나를 발견하고 세상과 조우하는 일은 어느 날 무심코 귀에 꽂은 '이어폰' 하나로부터도 시작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팟캐스트를 듣는다. 최근 작가와 PD가 만나 새롭게 시작한 '더 드라마'라는 팟캐스트를 즐겨찾기에 추가했다. 형태는 '드라마'지만 주제는 인생과 소통과 가치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이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나와 닮았다. 나는 그래서 조금 더 행복해진다. 이런게 바로 '나답게' 사는 것이다.



* '김애란' 사진 출처: http://bit.ly/2fUw0r6

* '지대넓얕' 사진 출처: http://bit.ly/2fVVnJ3

* '트레바리' 사진 출처: http://bit.ly/2vQRp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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