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스텝 다이어리 #05.
10년 이상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글 쓰는 일은 어렵다. 막상 자리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 일도 쉽지 않지만, 어렵사리 모니터 위에 한 문장을 쓰는 것은 조금 더 어렵지만, 생각과는 달리 글이 막힐 때의 막막함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 자전거도 몇 번 넘어지면서 몸으로 배울 수 있는 법인데, 어쩐 일인지 글쓰기는 매 순간 순간 새로운 일이다. 익숙해지지 않는다. 가끔씩 문장의 대가들도 글쓰기를 어려워했다는 글을 읽곤 하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좋은 글을 써냈고 심지어 유명해지지 않았는가. 그래서 나름대로 찾은 방법이 바로 '필사'였다.
필사가 이번은 처음은 아니었다. 몇몇 책에서 필사의 유익을 읽은 후로 흉내를 내긴 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매일 짧은 칼럼을 모니터 위에 옮기는 일이었다. 마침 중앙일보에 칼럼을 쓰던 권석천 논설위원을 알게 되었다. 사회부 기자 출신의 현장 감각과 진보, 보수 언론을 모두 거친 균형 감각, 무엇보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글들이 '필사'를 유혹했다. 그 이후 1년 동안 모두 187편의 다양한 칼럼을 옮겨 썼다. 권석천 논설이 JTBC로 옮겨간 이후 더 이상 칼럼을 쓰지 않게 되면서, 손석희 사장의 '앵커 브리핑'과 문유석 판사의 글을 주로 필사 했다. 그리고 가끔씩 이동진, 김혜리, 신형철, 허지웅의 영화에 관련된 칼럼과 필력으로 유명한 김훈, 금정연, 서민 등의 글을 옮겨 썼다.
필사는 이를테면 '마중물'과 비슷하다. 이른 아침 그들의 글을 옮겨 쓰다 보면 굳어 있던 손과 생각의 근육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좋은 글은 쉽게 읽힐 뿐 아니라 빠른 몰입으로 독자를 이끈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결코 느끼지 못했던 문제 의식들을 공유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함께 분노한다. 85번 째 필사를 했던 글은 희귀질환을 앓는 '은서'와 보편적 복지에 관한 이야기였다. 2012년 권석천 논설이 쓴 이 글은 간경변에 걸린 딸을 위해 간을 떼어주려 했지만 4000만원의 수술비 때문에 그러지 못한 수많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권석천 기자는 유독 소수자, 약자에 대한 관심이 컸다. 인천공항의 청소부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가습기 살인 기사를 놓친 자신을 질책하기도 한다. 세월호에 관한 그의 기사를 읽고 눈시울이 뜨거워진적도 여러 번. 그제서야 결국 좋은 글은 '손끝'이 아니라 '발끝'에서 나옴을 깨닫게 되었다.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는 글이 가진 진정성의 힘, 돌이켜보면 나 역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글을 썼을 때 가장 반응이 컸었다. 쓰는 이 뿐 아니라 읽는 이 역시 그 차이를 귀신같이 알아낸다. 직접 체험한 이의 손끝에서 뿜어져나오는 그 에너지를.
권석천 기자는 매번 다르게 쓴다. 취재 대상의 시선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 1인칭 시점으로 몰입을 유도하기도 하고 대화체로 지루한 칼럼에 생동감을 더하기도 한다. 때로는 웅변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직한 독백으로 이어가기도 한다. 소재는 항상 사회적 이슈지만 전혀 다른 책이나 전문가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엄청난 독서량, 혹은 축적된 지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좋은 음식이 좋은 재료와 쉐프의 경험과 기술로 완성되듯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좋은 글을 반복해 읽고 쓰다 보면 나름이 안목이 생기게 된다. 그 안목이 고스란히 글쓰기의 기술로 옮겨지는 것은 아니지만, 뭐 어떤가. 우리 모두가 쉐프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좋은 음식을 구분할 수 있는 안목만 가지고도 직업이 만들어지는 세상 아닌가.
노트북 화면에 칼럼과 에버노트를 동시에 띄운뒤 그대로 타이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에서 10분 사이면 충분하다. 가능하면 글을 옮겨적기보다 글쓴이의 마음을 따라가보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필사를 하다 보면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 이상의 각성효과를 얻는다. 내 일상의 문제에 함몰된 좁은 시야를 넓히고 같은 소재로 이렇게 다르게 쓸 수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공분으로 파르르 떨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같은 마중물의 힘을 입어 실제로 글을 쓰게 된다. 브런치에 정기적으로 쓰게 된 200여 편의 글도 이 과정을 통해 씌어졌다. 짧게 쓴 한 편의 글은 다른 생각과 글쓰기로 이어졌다. 생각의 깊이와 넓이도 자연스럽게 함께 확장되었다. 10년 전 칼럼을 다시 한 번 써보면 알게 된다. 지금의 세상이 10년 전과 어떻게 다른지, 무엇이 달라지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그러면 고민하게 된다. 10년 후의 나와 세상이 달라지기 위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필사는 내게 작은 '점' 찍기다. 이 점들이 몇 달의 시간을 거쳐 숙성의 과정을 거치면 그렇게 희미한 점을 이어 또렷한 선을 하나 만든다. 이 땅에 얼마나 소외된 이들이 많은지에 대한 자각은 또다른 세상의 사각지대에 눈을 뜨게 만들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주 작은 소시민의 양심으로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무언지를 고민하게 된다.
그래서 보육원의 한 아이와 결연을 통해 8년 가까이 교류하고 있고, 아내의 길고양이 입양 제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렇게 아주 사소하고 작은 점들이 이어져 결국 가장 '나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간다. 내가 좋아하고 내가 뿌듯하며 매너리즘에 빠진 나를 일으켜세우는 힘의 원천을 찾아가는 일. 이것이 바로 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의 진짜 의미는 아니었을까?
오늘 나는 그렇게 187번 째의 점을 찍었다.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을 옮겨 쓰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고, 37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숨겨진 고백을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이 작은 점들은 앞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진실로 이어지게 될까? 이 필사가 계속된다면 10년 후엔 전혀 다른 점들로 이어진 더 나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들처럼 '용기'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