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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1초, '카르페디엠'의 기록

스몰스텝 다이어리 #06.

1990년 8월, 일본의 한 여행회사 직원이던 시노다 씨는 후쿠오카로 전근을 가게 된다. 그는 자립 후 식생활이 흐트러질 것을 염려한 나머지 작은 결심을 하나 한다. 바로 현지에서 먹은 세 끼의 음식을 대학 노트에 옮겨 그리는 것. 지금 같으면야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숙소로 돌아와 오직 눈으로 보고, 혀로 맛본 기억만으로 그날 먹었던 음식을 그림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작업은 무려 23년 간(2013년 기준) 이어져 43권의 대학 노트를 남겼다. 그의 작업은 이후 책과 TV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씨저 커리야마라는 미국의 한 프로그래머가 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일상 중 가장 기억하고 싶은 1초를 동영상으로 기록했다. TED 강연장에서 즉석으로 보여주는 그의 영상엔 기쁘고 축하할 일들만 기록된 건 아니었다. 자신의 형수가 병원에 입원한 후 퇴원할 때까지의 매일의 기록이 숨가쁘게 화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가족들이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고 걱정하는 모습이, 그리고 이윽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매일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기능은 '1 Second Everyday'란 앱으로 고스란히 구현되어 내 스마트폰에 설치되어 있다. 이제 나도 그와 같이 매일의 가장 행복한 순간, 기록할 만한 장면을 1초의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지극히 사적인 기록들을 그림, 혹은 영상으로 남기게 한 것일까? 하루 한 장, 자신이 먹은 음식을 그리는 것과 하루에 1초, 자신의 소중한 순간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것은 과연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들의 개인사에 그토록 관심을 보이고 열광하고 심지어 따라하려는 것일까? 


23년간 매일 그린 하루 세끼의 기록, <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 중에서...


우리의 삶이 가치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바로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숱한 기쁨과 슬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우리의 하루 하루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 된다. 다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오롯이 자신만의 매일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유한하다. 1년 전의 기억은 고사하고 한 주 전의 일도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한 주, 혹은 한달이 바람처럼 지나간다. 하지만 그 순간들은 그렇게 '잊혀질만한' 것이었을까?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그다지 상관없는 수많은 날들 중 하나인 '일상'일 뿐이었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매일같이 재미와 의미로 충만한 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 하루 중에도 기억하고 기록할 만한 1초의 순간은 있지 않았을까? 맛있는 음식, 가슴 뿌듯한 작은 성취의 순간, 누군가와 함께 했던 기쁘고도 행복한 순간, 심지어는 교훈으로 담아둘만한 아픈 경험까지... 그 하루 중 1초를 모아 1년이면 6분 짜리 동영상 하나가 만들어진다. 10년이면 1시간, 30년이면 3시간에 정도의 동영상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을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행복한 기록을 나를 사랑한 사람들에게 남길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무엇을, 당신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원더풀 라이프'는 바로 이런 질문에서 만들어진 영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탄천 산책길의 타워팰리스 풍경, 마치 바다 위에서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는 것 같다.


최근에 리메이크되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주제는 명확하다. 과연 무엇이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가에 대한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극 중 인물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유일한 구분점이 다름아닌 '기억'과 '추억'에 있음을. 사이보그는 만들어진 '기록'만을 저장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기억과 추억으로 보존하고 회상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자의적이고 부정확하고 불완전한 것이라 해도. 한 인간의 인간다움은 그렇게 기억으로 완성되는 법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사랑한 모든 것이 기억으로 축적되어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통해 충만해진다. 우리는 그 기억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후손에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유한함'이라는 한계를 넘어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기록은 본능이다. 그것을 표출하는 방법이 그림일 수도 있고, 영상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자신의 기억만으로 남겨질 수도 있겠지만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후회없이 충만하게 살아가려 애쓰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그런 소중한 기억들을 가장 많이 만들어내고, 또한 가장 많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매일의 하루하루가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 순간을 살라는 '카르페디엠'이라는 말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까? 그렇게 살아간 하루하루가 쌓여 가장 우리다운 인생을 완성해가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론은 한 가지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보물처럼 소중하게 대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 하루 안에서 기억하고 기록할만한 순간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물처럼 소중한 내일을 맞이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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