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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몰스텝'에 관한 못다한 이야기

‘중판출래(重版出來)’


요즘 배우는 일본어 발음으로는 쥬항츄타이, 우리말로는 ‘2쇄를 찍자’는 말이다. 일본 드라마로도 유명하지만 동명의 원작 만화도 있다. 며칠 전 내게 출간을 제안한 편집자로부터 이 일드를 소개받았다. 일산의 교보문고에서 내 책이 진열된 모습을 보고 감격했다는 편집자가 카톡 말미에 소개한 일드였다. 착한? 저자인 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이 일드를 보았다. 아니 정주행했다. 10편의 드라마를 사흘 만에 모두 보았다. 최근에 푹 빠졌던 넷플릭스의 ‘빌리언즈’도 한 달에 걸쳐 보았던 나다. 게다가 내 취향은 전혀 아니었던 일드라니...


하지만 마지막 세 편은 주말 새벽 5시에 일어나 마저 보았다. 혼자 무슨 리액션을 했는지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책 한 권 내고 동병상련 운운할 염치도 없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은 어디나 똑같구나 싶었다. 촘촘히 짜인 스토리와 개성 넘치는 캐릭터는 압권이었다. 책을 직접 만들고 팔아본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디테일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대체 이런 스토리의 힘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만화 주간지를 만드는 출판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나도 책을 한 권 냈다. ‘스몰 스텝’이란 책이다. 약 한 달 정도 되었고, 적지도 많지도 않게 팔리고 있는 중이다. 지인들의 도움으로 아주 작게 입소문이 났다. 읽은 분들의 평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만족할 만한 책이었다. 교조적이지 않게, 과장 없이 썼다는 이유로 떳떳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파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한달 쯤 지나니 주마다 상승세를 보이던 온라인 서점 판매도 숨을 고르는 모양새다.


‘베스트 셀러’의 위대함을 몸소 실감한다. ‘자기계발’ 분야의 열손가락에 안에 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절감했다. 서점의 매대에 진열되는 일조차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한 한 달이었다. 그러면서도 온라인 서점의 자기계발 분야 Top 50위 인근에 3주 이상 이름을 올리는 스스로가 대견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선전한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일드를 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직 못다한 이야기가 있음을.


나는 살아남기 위해 ‘스몰 스텝’을 썼다. 15년 이상의 직장 생활 내내 우울했다. 졸업 후 입사 2년 차의 어느 날이었던가. 달리던 지하철을 뛰쳐나오던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원인 불명의 어지럼증으로 회사 주변을 전전하던 날도 많았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의 극도의 공포감이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증상이라 더욱 괴로웠다. 인터넷 검색으로 그것이 ‘공황장애’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졌다. 그러나 그나마 빨리 발견한 이유로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스몰 스텝'의 편집자는 숨어 있던 내 글을 '발견'해 책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먹고 사는 일은 여전히 버겁다. 직장을 다닐 때도 그랬고, 혼자 일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숨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대단한 성공이나 업적 없이도 스스로를 응원할 수 있는 삶, 매일의 작은 실천을 통해 살아갈 힘을 얻는 법,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일상, 그 3년 간의 경험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스몰 스텝은 그런 내게 '구명정' 혹은 ‘심폐소생술’과도 같았다.


지난 20여 년을 돌이켜 본다. ‘남들처럼’ 살아가기 위해선 참 많은 것이 필요했다. 나이에 어울리는 직장과 연봉, 건강과 평판, 인정과 지위... 그것은 이루기도 어렵지만 지키기는 더 어렵다. 인생의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 항상 위태로운 벼랑 끝을 걷는 기분으로 오랫동안 살아왔다. 그 살 떨리는 삶을 매일 매일 긴장하며 살아왔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 쉴 새 없이 일했다.


물론 공황의 이유가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기질 탓도 있을 테고 나약하고 게으른 나에게 더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삶을 살고 있음을. 저 바다 건너 일본도 마찬가지다. 일드 한 편으로 일본 사회를 속단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해 마다 수만 명의 일본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버린채 어딘가로 사라진다(신분을 숨기고 잠적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이어지는 경쟁의 원심력을 견디지 못해 나가 떨어진 ‘낙오자’이자 '루저들'인 셈이다.


서점의 매대에 '진열'되는 것조차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았다.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40년간 만화를 그리느라 등이 굽은 만화가는 그 해의 ‘만화 대상’을 탄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그림을 못 그리는 만화가는 결국 ‘중판(2쇄)’의 기적을 만들어낸다.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 ‘만화적’ 주인공 코코로가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인물은 그들이 아니었다. 대상을 받은 작가 밑에서 20년 간 문하생으로 일하다가 결국 고향집으로 돌아간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혜성처럼 나타난 작가의 천재성에 압도 당해 ‘언젠가’ 이루고자 했던 프로 등단의 꿈을 접는다. 그리고 전통 술을 빚는 집으로 돌아가 가업을 잇는 평범한 삶을 선택한다. 하루 24시간, 365일 만화만 생각했던 그였다. 데뷔 첫 해에 신인상을 받을만큼 재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만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다. 과연 가업을 잇기로 한 그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만화가의 길을 계속 가는게 맞았을까? 물론 그 선택은 오롯이 그의 몫이지만...


우리가 우울한 이유는 한 가지다. 내가 공황을 겪었던 이유 역시 단순했다. 이루고자 했던 성공과 행복이 기준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죽을만큼 노력하는 세상에서 성공한 1퍼센트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타고난 재능과 부단한 노력 말고도 하늘이 돕는 천운이 따라야 한다. 그것은 드라마 속 일본 만화계의 일만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지난 한 달동안 '스몰 스텝'으로 인해 정말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근에 만난 어느 회사의 부사장님은 한때 극단적인 선택까지 고민했노라고 내게 털어 놓았다. 대기업의 접대 문화에 지쳐 창업을 선택한지 10년 차, 중국의 이름 모를 거리를 울면서 걸어간 적도 있다고 했다. 수십 억의 투자를 받아 한 숨 돌린 지금도 여전히 그의 삶은 왠지 모르게 위태해 보였다. 상위 1퍼센트의 삶도 이렇게 고단할진대 한없이 평범한 내 삶이 순탄할리는 만무하다지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이 글을 맺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저마다의 이유로 매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그저 그것을 굳이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스몰 스텝’은 나를 위해 쓴 책이다. 마흔이 넘어 아무 내세울 간판을 갖지 못한 나를 격려하기 위해서 썼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나름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음을 웅변하기 위해 썼다. 꼭 연말의 ‘만화 대상’을 타지 않아도, 천재적인 재능과 노력으로 2쇄를 찍어내는 괴물 신인 작가가 되지 않아도, 나름의 방법으로 제 삶을 충분히 가치있게 살아갈 방법이 있다고 세상에 말하고 싶어서 이 책을 썼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글을 쓴, 삶을 살아간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응원도 함께 옮겨 실었다.


문득 가장 인상 깊었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20년 간의 어시스턴트 생활을 그만 두고 작가와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던 그 날, 그 문하생은 집에서 생일 선물로 보내온 사케를 스승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과 말투는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정미율 30%. 원료인 쌀을 30%까지 계속 깎아 낸 다음 좋은 것만 추출해 빚은 술이에요. 저희 가게에서 가장 좋은 술이죠.”


20년 간의 문하생 생활 후 마지막 인사, 그의 삶은 과연 '실패'한 삶일까?


나는 그 순간 작은 희망을 보았다. 20년 간 만화를 사랑한 그가 만드는 술은 그만의 방법으로 남달라지지 않을까. 만화가로서의 실패가 인생의 실패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나이 마흔의 진짜 인생은 거기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성공과 행복은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빛깔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한 분야를 전심으로 사랑한 그의 성실함이 전혀 다른 곳에서 빛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도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게 가장 ‘나다운 삶’이라면 우선 나부터 그 답을 찾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몰 스텝’은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내가 찍어낸 작은 ‘점’이다. 이 점 또 어떤 다른 점으로 이어져 선을 만들어낼지, 그 선들이 이어져 어떤 면을 만들어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묵묵히 오늘 하루의 점을 성실히 찍어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생의 중쇄’를 찍는 진짜 성공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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