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작을 마셨다. 차 맛이 달았다. 결코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알 수 없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일주일 정도였다. 마음 고생을 했다. 늘 그렇듯 프로젝트는 또 한 번의 난항을 만났다. 며칠을 고생해 준비해갔지만 설득이 쉽지 않았다. 주말을 꼬박 일했다. 그리고 어제, 드디어 클라이언트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목소리가 밝았다. 세 시간을 예정한 미팅이 1시간 반만에 끝났다. 오늘은 편히 잠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과 바다'의 노인이 꾸었던 사자의 꿈을 말이다. 녹차 한 모금을 다시 마시자 영혼까지 따뜻해졌다. 그리고 알았다. 어느 새 이런 과정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오늘 다시 새벽이 왔다. 두시 반에 잠에서 깼다. 어제 밤 8시 뉴스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좀 더 잘까 하다가 내친 김에 하루를 시작하기로 했다. 세줄 일기를 쓰고 스몰 스텝 플래너를 펴들었다. 그 전날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텅 빈 플래너가 속상하긴 했지만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문득 새벽 기상 시간을 적은 첫 번째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새벽 두시 반, 세시 반, 네시 반... 프로젝트를 붙들고 새벽을 깨운 기록들이 빼곡했다. 급기야 월요일 아침에는 일곱시 반에 겨우 일어난 기록이 플래너에 선명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으로 일을 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새벽을 깨웠다. 물론 일을 끝내고 나면 종종 오침을 하곤 했다. 혼자 일하는 사람의 특권이었다. 스스로가 대견스러워졌다. 과정과 결과에 나만의 일하는 방식이 녹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자주 새벽을 깨우곤 했다. 주말에도 적지 않게 일로 고민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한 가지 이유로 확연히 달라졌다. 지금은 내 일의 주인이 바로 나다. 내 이름을 걸고 내 일을 한다. 평가도 온전히 나의 몫이다. 그 사실이 부담이 될 때도 있지만, 그 위기를 넘기고 나면 한 뼘 자란 나를 보고 흐뭇해진다. 직장에서 일 할 때는 달랐다. 누가 뭐래도 '노예'의 삶이었다. 시킨 일을 해내기에 급급했다. 결과는 내 몫이 아니었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작아졌다. 내가 하는 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지금 나는 내가 하는 일의 주인으로 일하고 있다. 비판도 칭찬도 온전히 내 몫이다. 힘든 만큼 보람도 크다. 그 보람이 나의 자존감을 조금씩 회복시켰다. 대단한 건 아니다. 이 한 마디를 스스로에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힘들다고? 저번에도 잘 해냈잖아. 나는 나를 조금씩 믿어가고 있는 중이다.
어떤 일에도 왕도는 없다. 세상에 쉬운 일도 없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는 내내 징징거리며 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고 혼자 일하고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회사의 일을 주인처럼 하는 사람들이 세상엔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이 결국 리더가 된다. 그들은 문제를 당연시 여기며 해결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 주변에는 이상한 에너지가 흐른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의 일하는 방식이다. 나는 나의 일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닌, 그 일의 숨은 즐거움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욕을 먹더라도 내 방식대로 일해 보아야 한다. 월급(도 중요하지만)보다 그런 '일하는 기쁨'을 찾아야 한다. 그 방법을 찾은 사람은 회사에 소속되었다 해도 '노예'의 삶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회사에서 그런 사람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 마련이다.
어제의 나는 녹차를 마시고 있다. 클라이언트의 지난 번 피드백은 무지 아팠다. 일해본 사람은 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표정만으로도 이 일의 되고 안되고를 평가할 수 있다는 걸. 이를 악물었다. 피드백을 넘어선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로 했다. 이틀간 몰입에 몰입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는 내가 풀 수 있겠다는, 이상하게 근거없는 자신감이 나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그런 기분으로 어제의 미팅을 준비했었다. 그리고 결과도 좋았다. 새벽의 맑고 깨끗한? 생각으로 준비한 새로운 컨셉안을 클라이언트에게 내밀었다. 네 파트 중 두 번째 파트를 지날 때쯤 클라이언트가 말했다. 정말 많이 준비해오셨네요. 내가 속으로 답했다. 아니요. 아직 절반도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녹차가 달았다. 세작의 차맛이 그렇게 달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오늘도 새벽을 깨운다. 맑은 정신으로 내가 주인이 된 일을 한다. 여전히 녹차보다 커피를 좋아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차맛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 시간만큼은 내 일의 주인으로 살아가자고. 그리고 클라이언트를 행복하게 하자고. 그게 무슨 일이 되었건,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건, 이 사실 하나는 기억하기로 했다. 결국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다. 그리고 클라이언트를 웃게 할 것이다... 바로 어제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