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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낯선, 토요일의 흥분을 만나다

'스몰 스텝' 8번째 모임 후기

10여 년 전의 어느 날이다. 다섯 살 정도 된 아들과 나는 동네 놀이터에 와 있다. 그 날도 아마 토요일이었을 것이다. 모처럼의 주말, 아이와 즐겁고 뛰어놀면 정말 좋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머릿 속이 회사 일로 가득했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동공이 풀린 눈으로 아들의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이상한 죄책감이 든다. 결국 내가 일하는 이유도 행복한 가정, 즉 아이들과 잘 놀아주기 위함이었을 텐데, 나는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고 있었다. 일이 우선이었다. 일이 나를 압도했다. 그러나 나는 일을 압도하지 못했다. 그렇게 적지 않은 기간 '루저'의 삶을 살았다.


어제도 토요일이었다. 스몰 스텝의 8번 째 정기모임이었다. 내가 들어본 중 최고의 영어 강의를 들었다. 단순히 영어학습법이 아니어서 더욱 그랬다. 영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 자신의 일에 대해 나름의 철학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무료 오픈 강의였지만 참석율이 90퍼센트에 가까웠다. 25명의 참여자 중 21명이 뒷풀이에 참석했다. 적어도 나는 이런 뒷풀이를 본 적이 없다. 20분 단위로 자리를 바꿔가며 수다를 떨었다. 2시에 시작한 모임을 3차까지 뛰고 나니 8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돌아가는 마을 버스 안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2차를 가는 와이프를 만났다(대박!). 거기서 와이프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이상해. 일이 점점 더 커지고 있어."



나는 솔직히 지금의 이런 내가 너무 낯설다. 나는 여전히 금요일 밤의 넷플릭스, 그리고 맥주 한 캔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모임도 사랑하게 되었다. 각각의 영역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분들이 만나 기분 좋은 충돌이 일어난다. 웃음 소리에 깐부 치킨이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한 분 한 분 인사를 하다보니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도 개성 강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았다는 생각에 흥분이 인다. 모두 다 강사로 내세우고 싶다. 책을 쓰게끔 채근하고 싶다. 이미 이런 비슷한 모임을 하고 있는 리더들을 만났다. 즉석해서 콜라보 제안이 이어졌다. 글쓰기 모임이 그랬고, 디자이너 모임이 그랬다. 이 모임이 앞으로 어떻게 커져나갈지 도저히 모르겠다. 당장 다음 모임은 장소를 걱정해야 한다. 왠지 더 많은 분들이 스몰 스텝 모임을 찾을 것 같아서다.


어제의 주강사인 '성봉영어'는 한 마디로 보석의 발견이었다. 남다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는 1,500여 명이 모인 거대한 영어 학원에서 이미 일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규모가 커지면 운영에 대한 부담이 는다. 교육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FBI와 CIA에서 일한 강사를 모셔와도 결국 10명 중 2명은 그 강사를 싫어하고 1명만 좋아하며 나머지 7명은 포기한다는 이야기였다. 규모가 크면 좋은 학원일 거란 상식을 깨는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는 자기만의 철학을 담은 영어 공부법을 전달하고 싶어했다. 영어가 가진 유익, 가능성을 가지고 남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했다. 내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나는 내 방식대로 사람을 돕고 싶었다. 이런 모임을 통해 각각의 사람들이 자신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나다워지는' 것. 성봉영어도 정확히 그 지점에서 '차별화'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내게 있어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대기업을 다니지만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경험한 분을 만났다. 뒷풀이가 끝날 무렵 그가 내게 말했다. 자신에게 놀라운 변화의 경험을 담은 이야깃거리가 있다고.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 그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리고 글로 그의 그 '놀라운 변화'를 사람들에게 전할 것이다. 이미 수십 명의 디자이너들과 오프 모임을 지속해오고 있는 디자이너를 만났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남을 돕는 진정한 '리더' 한 명을 만난 기분이었다. 각양 각색의 인연으로 스몰 스텝을 만난 사람들의 사연이 이어졌다. 그 와중에도 쉴새 없이 자리를 바꿔가며 이야기 꽃이 피었다. 웃음의 파열음이 일었다. 건강한 에너지였다. 마치 원자들이 만나 폭발하는 것처럼 각각의 에너지들이 만나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적어도 내겐 생소한 장면이었다. 10년 전의 나라면, 아니 불과 1년 전의 나라면 이런 장면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0년 전의 나를 다시 만난다. 그 때와 나의 나는 능력적인 면에서 차이가 없다. 여전히 이해력이 짧고 학습의 속도는 늦은 사회적 루저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더딘 배움이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쉽게 말하고 쓰는 능력을 주었다. 사람들은 내가 '쉬워서' 좋다고 한다. 어려운 말을 쉽게 전달해줘서 고맙다고 한다. 단점이 장점이 된 셈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일견 '인싸'가 된 기분이다. 그래서 기분이 좋으냐고? 꼭 그렇진 않다. 나는 여전히 이런 분주한 모임이 익숙치 않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이다.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이 혼란을 수습하고 싶은 욕망이 순간 순간 일었다. 하지만 지금도 좋았다.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 이런 자극을 받겠는가. 모든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오늘 주강사인 '성봉쌤'의 전화를 받았다. 고맙다고 했다. 그 흔한 거마비 한 푼 받지 않고(오히려 퀴즈 상품을 준비해왔다!) 주말에 무료 강의를 해주신 분이 내게 고맙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말이 진심이었음을. 나는 더욱 열렬한 '성봉영어'의 지지자, 팬, 마니아, 팔로어가 되었다. 이번 강의를 통해 더욱 열렬한 영어 학습의 욕구가 일었다.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스몰 스텝 모임이 가능성을 알아본 이들의 제안을 자주 받는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바는 단 한 가지다. 이곳에 모인 분들이 나와 같은 변화를 경험하는 것이다. 자기 안의 가능성을 재발견하고, 스스로에게 놀라는 경험이다. 그런 경험을 타인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연쇄반응처럼 이러한 흥분의 경험들이 전파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이 모임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지속 가능한 플랫폼을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단톡방의 수다 속에서 눈팅을 하는, 잠재력 만랩의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일이다. 나는 어제 그 가능성을 보았다. 자꾸만 가슴이 뛴다. 이것이도 병이라면 병일까? 만일 병이라면, 불치병이었으면 좋겠다. 어제의 뒷풀이에서 터져 나온 수많은 가능성의 씨앗들을 안고 집으로 가는 마을 버스에 올랐다. 산책을 하고 싶었지만 딸을 위해 산 마카롱이 녹을까봐 그럴 수 없었다. 내일은 내일의 스몰 스텝을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하루 쯤은 이 흥분에 젖어 있고 싶었다. 다행이 독감에 걸린 딸은 내가 사 간 마카롱을 뛸 듯이 좋아해주었다. 아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10년 전과는 전혀 다른, 행복한 토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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