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심 플랜트'는 어느 부자의 서재 같았다. '다시 서점'은 토끼굴 같았다. '스틸 북스'는 어느 일본인의 서재 같았다. 각각의 다른 개성과 취향이 공존하는 공간들. 그 옛날의 미니홈피에 쓴 글과 지금의 브런치에 쓴 글은 그 형식 만큼이나 내용도 달라진다. 인간은 환경에 취약하다. 그것은 즐거운 취약함이다. 내가 있는 공간만 바꾸어도 나의 생각은 리셋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쉬운 걸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룬다. 그런 게으름을 떨쳐내고 새로운 공간을 마주하게 하는 모임이 바로 독서모임 '독깨비'가 주관하는 '북카페 투어'이다.
맥심 플랜트는 넓고 밝고 쾌적했다. 빈곤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어느 부자의 호혜를 입은 기분이었다.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고 마음껏 사진 찍을 수 있고 마음껏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철의 강인함과 나무의 부드러움이 넓은 공간에서 만나니 대충 이어도 멋진 뷰를 만들어냈다. 한남동의 기슭을 따라 층층이 높아지는 이 공간은, 그러나 개성 넘치는 공간이라고 말하기엔 2프로 부족했다. 그러나 어느 한가한 휴일 오후, 맘껏 여유를 누리고 싶을 때면 이 공간이 생각날 것 같다. '맥심'이라는 가볍고 익숙한 이름만 조금 덜 기억할 수 있다면...
다시 서점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토끼굴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사진 찍기 좋은 공간이었다. 그 말은 책 읽기엔 그저 그런 공간이라는 의미도 있다. 주말 오전,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주인은 약간 언짢은듯 보였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사진만 찍고 가는 우리가 조금은 미웠으리라 지레 짐작했다. 하지만 토끼굴의 인심은 그래선 안된다. 책 한 권 사가지 않아도 웃을 수 있는 여유, 우리는 어쩌면 그런 토끼를 이 공간에서 만나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책은 두 번째였다. 혼자 있고 싶은 날은 이 공간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그런 약속 하에서. 좀 더 넓은 다시 시점을 원한다면 주말의 '투데이 북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스틸 북스는 정갈했다. 베이지와 화이트가 주를 이룬 공간은 '적당함'이란 키워드가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크지도 작지도, 밝지도 어둡지도,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공간 속에 적당한 책들이 역시 적당하게 모여 있는 공간이었다. 너무 상업적이도, 너무 컬트하지도 않은 큐레이션이었다. 이 책을 고른 사람들의 정서도 딱 고만고만하지 않을까. 한남동이라는 부촌에 어울리는 책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보았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츠타야 서점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내내 가시지 않는 그런 공간이었다.
자주 다니는 남산 터널 아래도 뻗은 산기슭의 고적한 동네. 아마 한국의 부자들은 이런 입지 때문에 이곳에 자신의 집을 지을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아무나 올 수 없기에 아무나 살지 않는 그런 공간. 그런 입지에 맞게 위치한 공간들도 그 사람들을 닮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여유 있어 보였다. 최소한 생계는 고민하지 않는, 내일의 출근이 두렵지 않은 그런 사람들... 그런데 어쩌면 이것도 공간과 사람에 대한 나만의 선입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공간을 누렸다.
그래 좋다. 아주 가끔은 한남동을 찾고 싶다. 맥심 플랜트에서 오전을 보낸 후, 다시 '다시 서점'에 들렀다가 스틸 북스에서 오랫동안 끌리는 책 한 권을 붙잡고 읽고 싶다. 공간에 베푼 은혜로운 시간을 맘껏 누리고 싶다. 그 안에 깃든 여유로운 사람들의 넓고 밝은 마음과 교감하고 싶다. 북카페 투어는 즐거운 일탈이다. 그 핑계조차 대지 않는다면 내 일상은 무료할 것이다. 어떻게 매일 밥만 먹고 살겠나. 가끔은 파스타도 먹고, 부리또도 먹고, 스테이크도 썰어야지. 가끔은 한남동에서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어야지. 한 시간을 버스를 타고 30분을 걸을 용기와 여유만 있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말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