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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들을 위한 시(詩)

나는 언제나 내 키가 169.5라고 우긴다. 와이프는 168로 기억한다. 그래도 170이 안되긴 매 한가지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 아빠의 키는 언제나 즐거운 놀림감이다. 고 1의 아들은 174를 넘은지 한참 되었다. 딸은 키 뿐만 아니라 두루두루? 건강하다. 165의 와이프 역시 또래들 중에는 큰 편에 속했다. 결혼식 사진을 찍을 때는 발판에 올라서야 했다. 하지만 결혼 후엔 이 모두가 아득한 고민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지금은 키를 두고 고민하진 않는다. 별도의 깔창을 깔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학창 시절은 달랐다. 발육이 더딘 나는 언제나 작은 키로 놀림감이 되어야 했다.


중학생 선배가 키 큰 후배와 권투 시합을 시킨 일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분함을 못 이겨 엉엉 울며 세수를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젖이 모자라 그랬다며 나만큼이나 속상해 했다. 같이 살던 동갑내기 사촌 동생의 키는 185를 넘었다. 작은 어머니의 젖을 동냥하며 컸다. 작은 키로 주눅 들던 삶을 꽤 오래 살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스몰 스텝(Small Step)'이라는 책의 저자가 됐다. 곧 출간될 두 번째 책의 이름은 '스몰 브랜딩(Small Branding)'이다. 작은 것들의 미학을 웅변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은 빵집 밀도는 이제 더 이상 작지 않은 브랜드로 성장했다.


약 7년 간 브랜드 전문지의 에디터로 일했다. 에디터들에게 좋은 브랜드는 크고 화려한 브랜드들이었다. 사진이 잘 나오는 브랜드는 더욱 환영을 받았다. 해외의 유수한 저자들과의 인터뷰는 매거진의 큰 차별점이었다. 우리는 일주일간 깊은 산 속 교회 수련관에 들어가 기도 대신 글을 쓰곤 했다. 개별 꼭지의 분량은 큰 판형의 매거진으로도 열 장을 넘기곤 했다. 주제는 언제나 '브랜드'였다. 판타지 브랜딩, 휴먼 브랜딩, 스마트 브랜드, 브랜드 뱀파이어, 호황의 개기일식, 디자인 경영, 브랜드 직관력... 제목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이 책은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호평과 환호를 받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 책을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독자들을 직접 만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사놓기는 했지만 읽지는 못했다고. 읽기는 했지만 이해하진 못했다고.


하지만 나는 달랐다. 크고 화려한 브랜드들 보다는 작고 소박한 회사들에 더욱 마음이 갔다. 영어 인터뷰는 불가능했다. 어려운 브랜드 용어와 전략에는 언제나 젬병이었다. 덕분에 내 글은 쉽게 읽히는 편이었다. 편집장은 이 점을 오랫동안 못마땅해했다. 책이 가진 브랜드 아우라에는 못미친다는 점을 은근히 강조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회사 몰래 페이스북을 운영했다. 쉬운 사례와 읽기 편한 콘텐츠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7만 팔로어를 가진 페이스북의 개별 콘텐츠 도달율은 최소 20만 명, 많게는 200만 명이었다. 잡지의 취재 요청을 받기도 했다. 대기업 브랜드의 컨설팅 요청이 페이스북을 통해 들어왔다. 어떤 호텔은 페이스북 운영이 매뉴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작고 쉬운 나만의 브랜딩이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보리출판사의 윤구병 대표


작지만 강한 브랜드를 좋아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브랜드 중에 '보리'라는 출판사가 있다. 누가 봐도 눈에 띄는 세밀화로 유명한 이 브랜드의 오너는 서울대 출신의 철학 박사님이셨다. 책 한 권을 만드는데 8,9년이 걸리는 독특한 출판사였다. 인터뷰하러 갔던 그 날 나는 유기농 농산물로 가득한 점심상을 선물받았다. 당시 이 회사의 최대 이슈는 6시간 근무제였다. 노동자가 주인공이 되길 바라는 대표의 바람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호소하는 직원들이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브랜드였다. 그때 오너의 철학이 한 브랜드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뼈 속 깊이 배울 수 있었다. 몇 년 후 성공적으로 안착한 이 제도에 대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다.


작음은 바꿀 수 없다. 모자람을 억지로 채우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차별화하는 방법이 있음을 꼭 말해보고 싶었다. 머리가 나쁜 나는 어렵게 말하지 못한다. 복잡하게 쓰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에게 차별화된 경쟁력을 선물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어진 조건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회는 온다. 대형 빵집이 망하고 동네 빵집이 흥하는 시대다. 개성과 취향이 존중되고 다양성이 추앙받는 시대다. 시대의 아이콘 BTS의 노래 제목이 바로 '작은 것들을 위한 시(詩)'다. 


널 알게 된 이후 ya 내 삶은 온통 너 ya

사소한 게 사소하지 않게 만들어버린 너라는 별

(Oh yeah) 하나부터 열까지 ay ay 모든 게 특별하지 ay ay

너의 관심사 걸음걸이 말투와

사소한 작은 습관들까지 (oh ah)


그들은 노래한다. 이제 여긴 너무 높다고. 내 눈에 널 맞추고 싶다고.


BTS의 노래 가사를 보며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들도 한 때는 아이돌 세계에서 '작은' 존재였다. 사소한 걸 사소하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나 자신에 대한, 세상을 향한 작은 관심이 나와 당신을 바꿀 수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특별해질 수 있다. 바야흐로 크고 어렵고 요란한 것들이 아닌, 작고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작은 것들을 위한 한 편의 소박한 시(詩)이다. 그런 나를 응원한다. 그런 당신을 응원한다. 작은 우리는 분명 좀 더 특별해질 수 있다.




* 윤구병 대표가 만든, 작지만 작지 않은 '도서출판 보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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