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리에 민감하다. 조용한 버스나 지하철 속 소음에 특히 취약하다. 버스 바로 뒷자리에서 라디오을 틀어대는 무례함을 참지 못하고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방금 전화를 통해 부하 직원에게 한 마디 하고 있었던 상대방은 법적으로 허용된 데시벨을 운운하며 또 한 번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결국 내가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기차 안에서 안방처럼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을 보면 혐오스럽다. 이어폰 밖으로 새어나오는 음악 소리는 쇳소리를 닮아 자극적이다.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파는 분들을 보면 그 행위보다는 호객 소리에 질려 자리를 옮기곤 한다. 나는 예민하다. 소리 뿐 아니라 촉각도 예민한 편이다. 영화관 팔걸이에 닿은 타인의 팔이 그렇게 불편할 수 없다. 출근길 지하철 안은 실제로 지옥이다. 여러모로 피곤한 인생이다. 내 핸드폰을 찾기 위해 와이프의 스마트폰으로 번호를 눌렀더니 '예민보스'라는 이름이 떡하니 뜬다. 부인할 수가 없다. 하루는 도무지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클라이언트 이야기를 했더니 와이프가 정색을 하고 내게 말했다.
"당신도 그래."
설명을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에디터로 일하던 시절 논리적인 글쓰기에 강했던 후배는 내 글을 '점프가 많다'고 표현했었다.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는 의미였다. 대화 중에 엉뚱한 주제를 꺼내어 상대방을 당황시킨다는 와이프의 '증언'과도 비슷했다. 나는 나만의 세계에 빠질 때가 많은 사람이다. 공감 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환경은 회식 자리다. 대화의 주제보다는 분위기를 잘 타야 하는 이런 자리에서 나의 취약함은 배가 되곤 한다. 상대방의 농담을 매끄럽게 받아치고, 분위기 해치지 않는 선에서 상대방에게 한 방 돌려줄 수 있어야 하는, 미묘한 감정선의 파도타기에 항상 실패하곤 한다. 요즘 사람들은 그걸 '갑분싸'라고 부른다. 내 딴에는 용을 쓴 한 마디가 주변의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경험을 한 적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증인'에 나오는 주인공의 자폐성장애 증상이 이와 비슷했다. 남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작은 시계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상대방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서번트 증후군과 같은 천재적인 능력을 빼고 나면 이상하게 공감이 되는 영화였다. 어쩌면 나 역시 약한 정도의 자폐성장애를 가진 사람은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영화는 시작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비밀의 숲'과 같은 추리의 재미를 기대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자폐성장애를 가진 주인공을 통해 '진정한 소통'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자폐성장애는 정신병이 아니다. 단지 우리와 '많이 다를 뿐'이라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영화는 살인 사건을 빌렸을 뿐이다. 물론 그 살인 사건에는 허점이 많이 보인다. 종량제 쓰레기 봉지와 테이프 만으로 여자 가정부가 남자 노인을 죽이는 장면은 다양한 설명에도 설득이 쉽지 않았다. 자폐성 장애의 아주 일부에게만 보이는 서번트 증후군이 영화에선 과장되었다. 주인공 정우성이 아버지의 편지 한 장으로 개과천선하는 모습은 영화적 몰입을 해친다. 선과 악으로 뚜렷이 구분된 영화 속 세상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럼에도 배우 김향기의 연기는 스킵 버튼을 누르지 못하게 한다. 내가 본 영화 중 정우성의 연기가 가장 자연스러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평가는 내게 있어 사족에 가까웠다. 영화 속 김향기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이 영화가 말하는 좋은 사람의 정의는 아주 심플하다. 상대방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 자폐성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증언을 끌어내기 위해 영화 속 변호사 정우성은 다양한 노력을 한다. 그 중 하나가 오후 다섯 시의 퀴즈다.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영화 속 김향기는 퀴즈를 좋아한다. 정우성은 매일 전화로 퀴즈를 내고 다음 날 오후 다섯 시에 김향기는 전화를 걸어 정답을 말한다. 상대방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영화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진짜 범인을 찾아내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다소 느슨한 극의 진행을 단번에 잊게 해주는 한 방이 있는 영화로 극적 반전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상대방의 다름을 얼마나 인정하는 사람인가. 얼마나 자주 용기있게 그들의 세계로 뛰어드는 사람이었나. 나는 그런 관점에서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물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나다워진다'는 것은 골방에 들어가 심리검사를 한다고 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맺는 관계 속에서 나는 가장 나다워질 수 있다. 며칠 전 강의 의뢰를 받아 울산에 있는 어느 공기업 사람들에게 '스몰 스텝'을 강의하고 왔다. 오전 9시에 출발한 나는 1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밤 9시가 되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곳에서 작은 천국을 볼 수 있었다. 내 책을 읽어주고, 내 강의를 들어주고, 친구에게 주기 위해 대신 사인을 받는 사람들을 통해 '공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그들은 기꺼이 낯선 나의 세계로 들어와 주었고, 나 역시 가감없는 이야기로 그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우리는 그 시간만큼은 '스몰 스텝'으로 묶여진 작은 하나가 됐다. 나는 그 강연을 통해 또 한 번 나다워졌다. 금요일 밤의 미드와 맥주 한 캔이 유일한 낙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수백 킬로미터를 달려가 그들과 교감을 나누는 과정을 즐기는 성숙한 사람이 됐다. 타인의 다름을 이해하고, 그들과의 공존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가장 자기다운 사람이며, 이 영화가 말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영화 속 주인공 처럼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래서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글쓴이의 목소리로 이 글을 들어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