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란 일본 영화가 있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집안의 장남을 추모하는 기일에 온 가족이 모인다. 아들이 있는 여자와 결혼한 둘째 아들, 그리고 다복한 딸 가정이 함께 모여 하룻밤을 보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 특유의 현미경 같은 시선으로, 이 조그만 가정에 닥쳐왔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무심한 듯 그려낸다. 그러나 그 무심은 철저히 계획된 연출을 따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코 할머니다. 자신을 구하고 바다에 빠져 숨을 거둔 아들을 기억하라고, 지나치리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년을 이 기일에 부른다. 이제 그만 오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벌을 주는 거야. 내 아들의 목숨을 대신 가져간거니 열심히 살라고 말이야."
어디에서고 볼 수 있는 인자한 할머니를 연상하던 우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재혼한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할머니는 상냥한 듯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뼈를 담아 보낸다. 손자의 이름에 기어이 '군'이란 호칭을 붙여 부른다. 한 없이 편안한 장면과 대화와는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관람객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요동치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늦은 밤 할아버지가 욕탕에 들어간 그 시간에 일어난다. 할머니가 오래된 유행가를 부른다. 그리고 그 노래에 숨겨진 사연을 이야기한다. 할아버지가 젊었던 시절, 바람 피는 남편을 찾아간 할머니는 웃음소리와 함께 새어나오던 그 유행가를 듣는다. 그리고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가사 하나 빼놓지 않고 꼭꼭 씹어 부른다. 목욕하던 할아버지의 흥얼거리던 소리가 멈춘다.
5개월 간 계속된 북투어의 마지막 시간, 시인 한 분과 함께 시를 읽었다. 두 시간 동안 읽고 나눈 시는 겨우 세 편. 그마저도 시간 제한이 없었다면 얼마나 길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한 편의 시를 두고 온갖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읽은 시는 이사라 시인의 '뭉클'이라는 시였다. 대단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시는 아니었다. 내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 건 바로 이 시의 마지막 대목 때문이었다.
눈물이 가슴보다
먼저 북받친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 뒷모습을 보면서
왜 뭉클은
아니다 아니다 하여도
끝내
가슴속이어야 하나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가슴 뭉클한 날로 채워져 있다. 아니면 그 시인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가슴이 대신 북받치고 있을 것이다. 사별로 남편을 떠나보낸 참석자 중 한 분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세상에 한없이 선한 사람은 없어요. 애들이나 어른도, 노인까지도 말이죠. 그저 상처받기 쉽고 연약한 한없이 외로운 사람들만 있을 뿐이에요."
모두가 행복을 바라는 시대, 만족을 외치는 시대, 기쁨을 갈망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쿨하게 우울해지는 법을고민해본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사람의 감정은 대단치 않다. 내일 있을 불행을 예측할 수 없고 오직 순간을 누릴 자유만 있을 뿐이다. 어떤 고난이 닥쳐오면 온 몸으로 맞아야 하고, 이보다 더한 일은 없겠다 싶을 때 찾아오는 비극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시인의 시를 나누는 동안은 냉정해져야만 했다. 그 불행을 묵묵히 견뎌온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일은 보람 있었다. 욕탕 방 할아버지의 속옷을 챙기며, 무심한 듯 부르던 그 유행가의 가사를 흥얼거리는 할머니처럼. 누군가는 견디며 살아왔을 소중한 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비오는 날 오후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것, 파전을 쪼개는 것, 잔치국수를 들이키는 일. 태풍이 몰려온다는데 우리는 걱정이 없었다. 순간을 즐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뭉클
-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시력이 점점 흐려지는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희로애락
가슴을 버린 지 오래인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사랑이 폭우에 젖어
불어터지게 살아온
네가
나에게 오기까지
힘들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눈물이 가슴보다
먼저 북받친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 뒷모습을 보면서
왜 뭉클은
아니다 아니다 하여도
끝내
가슴속이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