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걸어도, 읽어도 읽어도

'걸어도 걸어도'란 일본 영화가 있다. 일찌감치 세상을 떠난 집안의 장남을 추모하는 기일에 온 가족이 모인다. 아들이 있는 여자와 결혼한 둘째 아들, 그리고 다복한 딸 가정이 함께 모여 하룻밤을 보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 특유의 현미경 같은 시선으로, 이 조그만 가정에 닥쳐왔던 크고 작은 사건들을 무심한 듯 그려낸다. 그러나 그 무심은 철저히 계획된 연출을 따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연코 할머니다. 자신을 구하고 바다에 빠져 숨을 거둔 아들을 기억하라고, 지나치리만큼 평범하게 살아가는 청년을 이 기일에 부른다. 이제 그만 오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할머니는 이렇게 답한다.


"벌을 주는 거야. 내 아들의 목숨을 대신 가져간거니 열심히 살라고 말이야."


어디에서고 볼 수 있는 인자한 할머니를 연상하던 우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재혼한 며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할머니는 상냥한 듯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뼈를 담아 보낸다. 손자의 이름에 기어이 '군'이란 호칭을 붙여 부른다. 한 없이 편안한 장면과 대화와는 무관하게 영화를 보는 관람객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요동치게 만든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늦은 밤 할아버지가 욕탕에 들어간 그 시간에 일어난다. 할머니가 오래된 유행가를 부른다. 그리고 그 노래에 숨겨진 사연을 이야기한다. 할아버지가 젊었던 시절, 바람 피는 남편을 찾아간 할머니는 웃음소리와 함께 새어나오던 그 유행가를 듣는다. 그리고 기억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른다. 가사 하나 빼놓지 않고 꼭꼭 씹어 부른다. 목욕하던 할아버지의 흥얼거리던 소리가 멈춘다.


KakaoTalk_Photo_2019-09-23-07-58-26.jpeg


5개월 간 계속된 북투어의 마지막 시간, 시인 한 분과 함께 시를 읽었다. 두 시간 동안 읽고 나눈 시는 겨우 세 편. 그마저도 시간 제한이 없었다면 얼마나 길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한 편의 시를 두고 온갖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읽은 시는 이사라 시인의 '뭉클'이라는 시였다. 대단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시는 아니었다. 내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 건 바로 이 시의 마지막 대목 때문이었다.


눈물이 가슴보다
먼저 북받친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 뒷모습을 보면서
왜 뭉클은
아니다 아니다 하여도
끝내
가슴속이어야 하나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인의 마음은 가슴 뭉클한 날로 채워져 있다. 아니면 그 시인을 바라보는 누군가의 가슴이 대신 북받치고 있을 것이다. 사별로 남편을 떠나보낸 참석자 중 한 분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주었다.


"세상에 한없이 선한 사람은 없어요. 애들이나 어른도, 노인까지도 말이죠. 그저 상처받기 쉽고 연약한 한없이 외로운 사람들만 있을 뿐이에요."


KakaoTalk_Photo_2019-09-23-07-59-01.jpeg


모두가 행복을 바라는 시대, 만족을 외치는 시대, 기쁨을 갈망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 쿨하게 우울해지는 법을고민해본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사람의 감정은 대단치 않다. 내일 있을 불행을 예측할 수 없고 오직 순간을 누릴 자유만 있을 뿐이다. 어떤 고난이 닥쳐오면 온 몸으로 맞아야 하고, 이보다 더한 일은 없겠다 싶을 때 찾아오는 비극을 견뎌야 할 수도 있다. 적어도 이 시인의 시를 나누는 동안은 냉정해져야만 했다. 그 불행을 묵묵히 견뎌온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는 일은 보람 있었다. 욕탕 방 할아버지의 속옷을 챙기며, 무심한 듯 부르던 그 유행가의 가사를 흥얼거리는 할머니처럼. 누군가는 견디며 살아왔을 소중한 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비오는 날 오후에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것, 파전을 쪼개는 것, 잔치국수를 들이키는 일. 태풍이 몰려온다는데 우리는 걱정이 없었다. 순간을 즐기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뭉클

- 이사라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

시력이 점점 흐려지는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희로애락

가슴을 버린 지 오래인

사람에게

뭉클한 날이 자주 온다


사랑이 폭우에 젖어

불어터지게 살아온

네가

나에게 오기까지

힘들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눈물이 가슴보다

먼저 북받친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네 뒷모습을 보면서

왜 뭉클은

아니다 아니다 하여도

끝내

가슴속이어야 하나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함부로 애틋하게, 엄마와의 집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