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나 한 잔 하자'라는 한국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어떻게 될까? 이 때의 차를 직역해서 Tea로 번역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모르긴 해도 Coffee를 연상하는 사람이 훨씬 많지 않을까. 하지만 진짜 속마음을 열어본다면 '커피'를 원하는 사람 역시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얘기나 좀 할까'로 번역하거나 '좀 쉬었다 하지' 라는 의미가 더 정확하지 않을지. 내가 스타벅스에 가는 이유 역시 커피 때문이 아닌건 확실하다. 집중해서 일할 공간이 필요하다거나, 특정한 미팅이 필요할 때가 훨씬 많았으니까. 그렇다면 청담동 골목 깊숙히 위치한 '티 컬렉티브'는 어떨까? 어떤 사람이 무슨 이유로 커피 값의 두 배를 치러가며 진짜 '차(Tea)'를 마시기 위해 모여드는 것일까. 심지어 이곳의 차는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차도 아니다. 호박차, 유자차, 감잎차...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재료들을 차로 재해석한 곳이다. '오설록' 같은 차 전문 카페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친근한 맛을 세련된 공간에서 만나는 묘한 부조화... 이곳을 찾은 때는 늦가을, 혹은 초겨울의 찬 바람이, 간간이 비치는 따뜻한 햇살을 시샘하는 어느 날의 오후였다.
첫 느낌은 '익숙하다'였다. 무지의 매장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면 이곳을 설계한 사람에겐 실례일까? 무지의 철학에 공감하는 나로써는 솔직한 심정이었다. 무엇을 더하기보다 최소한의 필요만을 담은 정제된 공간, 페브릭 소재의 흰 색 소파가 끌어올린 단어는 다름 아닌 '쉼'이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 공간을 설계한 창업자의 취향일 것이다. 이 공간을 설계한 이는 디자인그룹 '아트먼트 뎁'을 이끄는 김미재 대표다. 뒤늦게 찾아본 정보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 대표는 공간 브랜딩과 디자인 디렉팅만 15년 이상 해온 이 분야의 전문가다.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의 빵집 ‘르 알래스카’, 카페 겸 케이크 숍 ‘블룸앤구떼’, 삼청동의 베이커리 카페 ‘우드앤브릭’...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서울의 외식 공간들이 모두 그의 손과 안목을 거쳤다. 얼마 전 다녀온 '퀸마마 마켓'이 떠오르는 건 우연만은 아니었다. 패브릭의 따뜻함과 식물의 생명력이 절제된 동양화처럼 정갈하게 펼쳐져 있던 그곳의 1층에, 티 컬렉티브가 처음으로 입점하기도 했었다니 말이다. 비슷한 취향과 정서는 이어지기 마련이다.
차를 주문했다. 전혀 어렵지 않은 메뉴 이름에 한 끗 남아 있던 긴장감마저 풀리는 기분이다. 감잎차를 주문했다. 차를 내리는 모든 과정이 한 눈에 들어오는 Tea Bar는 블루보틀을 떠올리게 한다. 스타벅스가 공간을 판다면 블루보틀은 취향을 판다. 훈남 훈녀들이 직접 커피를 내리는 과정 하나하나를 확인할 수 있는 블루보틀의 바는 퍼포먼스의 현장이다. 그 정도로 요란스럽지는 않았으나 티 컬렉티브의 매장 역시 그 점을 강조하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바가 모든 공간을 지배하고 있다. 어느 곳에서도 차를 내리는 이곳의 Tea Bar를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곳의 주인공은 차 하나만이 아니다. 설계한 이의 취향이 고스란히 담긴 공간 전체를 소비하는 곳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디테일이다. 상하이에서 보았던 압도적인 크기의 스타벅스 매장과 대비되는 점도 바로 그것이다. 주문한 차가 테이블로 배달되었다. 다기부터가 다르다. 넌지시 물어보니 전문가에게 의뢰해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약간은 거친 다기의 텍스처가 한 잔의 차에 왠지 모를 신뢰를 더한다. 이곳은 청담동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한다.
라이프스타일, 편집샵, 츠타야... 이 세 단어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브랜딩의 기본 역시 '자기 부정'이다. 서점이 책을 팔지 않고, 커피 전문점이 커피를 팔지 않는다. 서점이 취향을 팔고 커피샵은 공간을 판다. 사람들은 이렇게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한다. 아니면 그것들이 조합된 편집샵을 구매하는 것이다. 그러니 티 컬렉티브에 주목해야 할 점도 '차'가 아닌 '공간'이다. 가장 싼 메뉴가 만 원을 넘기는 이곳이 설득할 것은 차의 맛과 종류만은 아닐 것이다. 이 정도의 취향을 선보이는 공간들도 드물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허전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이 공간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 그 나머지 한 조각이 '스토리'라고 생각했다. 경남 하동에서 공수된다는 이 차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이 공간을 설계한 창업자는 이 공간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디서 누굴 만날 때 티 컬렉티브를 찾아야 할까? 그때 필요한 것은 이 공간의 특별함을 더할 수 있는 바로 그 '이야기'가 아닐까?
무지가 특별한 이유는 제품 때문만은 아니다. 그곳을 설계한 디자이너의 철학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심플 라이프와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는 것에는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다. 먹고 살기 바쁠 때는 채우는 것이 낙이었다. 화장실 두 개 달린 30평의 아파트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캔버스였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와 다르다. 서재를 확장하고 거실을 늘리고 싶다. 심지어는 부엌 조차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풍족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공간을 확장하고 싶어한다. 티 컬렉티브는 어디선가 본 표현대로 '청담동 며느리'의 확장된 거실이다. 그렇다면 이 공간에 모인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누구를 초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어야 허세가 아닌 지적인 대화로 이 공간을 채울 수 있을까? 그래서 떠오른 곳은 바로 퀸마마 마켓 맞은 편에 위치한 '푸드 라이브러리'였다. 온갖 식자재로 가득한 그곳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건 온 세상의 모든 향신료를 모아 놓은 조그만 전시장?이었다. 그 하나하나가 이야기였고, 그 이야기의 조합이 곧 음식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푸드 라이브러리는 특별한 공간과 취향에 어울리는 '스토리'로 가득한 곳이었다.
우리에겐 가끔씩 허세가 필요하다. 공간과 취향을 소비하는 것은 시대가 요구하는 본능이다. 우리는 매슬로우가 제시한 욕구 5단계의 중간 어디쯤을 지나고 있다. 나다운 것에 열광하는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생리적인 필요에 충족한 우리의 본능은 자존감과 자아 실현 어디쯤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티 컬렉티브가 특별한 이유는 우리도 몰랐던 그 본능을 영리하게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아 실현은 자기 표현으로 이어진다. 인스타그램이 뜨거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삶의 아주 일부일지언정, 내 삶을 과시하고 싶은 작고 귀여운 허세가 용납되는 곳이 때문이다. 그러니 가끔은 공간을, 취향을, 라이프스타일을 소비해보자. 티 컬렉티브에서 소중한 사람과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 보자. 차와 다기, 공간에 담긴 스토리를 찾아보자. 그 날의 하루 만큼은 분명 우리도 어느 귀족의 오후를 담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테니까. 그런 소소한 허세는 누구에게도 기쁘게 용납되는 지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