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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순, 6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2013년의 일이었다. 지금은 엘레멘트 컴퍼니의 대표가 된 그를 만났다. 누가 봐도 스타일리시한 그의 외모에 대한 선입견은 인터뷰를 하면서 조금씩 무너져 갔다. 그는 진지했다. 일과 삶 모두에 충실해 보였다. 그를 덮고 있는 몇 가지 조건들을 들추고 나면 자신의 일을 정말로 사랑하는 한 사람을 만난다. 굳이 얘기하자면 '진정성'이라 말할 수 있을까? 6년 만에 최장순 대표를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했다.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든지, 두 권의 책을 냈다든지 하는 변화는 오히려 소소한 거라고 생각했다. 짧은 만남 후 돌아와 6년 전 그를 만난 인터뷰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때 그를 만난 나와 지금의 나는 얼마나 달라진 것일까? 달라진 나는 그가 한 말을 얼마나 더 이해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올해 서른 셋이에요. 그런데 가끔 초등학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면 '너 변했다, 왜 그렇게 변했어' 등의 얘길 듣죠. 전 이게 불편하더라구요. 나는 한 사람이지만 십대의 최장순, 십대 후반의 최장순이 다르고 이십대 초반과 후반, 서른 셋의 최장순이 다 다르잖아요. 저는 이게 아이덴티티와 컨셉의 차이라고 생각해요. 대다수 사람들은 브랜드의 에센스와 아이덴티티, 컨셉 등을 거의 같은 개념으로 쓰는데 사실 아이덴티티는 컨셉과 달리 굳이 남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거거든요. 친구들이 '너답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사실 보여지는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보여지는 모습은 컨셉의 일부분일 뿐인 겁니다."



최장순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인터뷰였다. 그는 단어 하나, 생각 하나가 분명하길 원하는 사람이다. 나처럼 하나의 언어를 뭉뚱그려 이해하고 사용하는 사람들이 긴장할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런 치열함이 그가 해온 일의 결과를 '남다르게' 만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보다 이 단어들을 더 잘 이해하고 있을까? 그는 아이덴티티가 사실상 내부 직원들을 위한 브랜딩이라고 말한다.이에 비해 컨셉은 외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것이라 설명해 주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를 제대로 아는 것과 나를 보여주는 것은 여러모로 다르다. 그리고 이 둘이 일치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비록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든 일일지라도.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자기다움'이란 무엇일까? 어쩌면 아이덴티티와 컨셉이 혼용된 듯한 이 표현을 그때의 그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자기다움이란 이 중 브랜드 아이덴티티와 같다고 생각해요. 뭐라고 한마디로 정의내리기는 힘들어도 이성의 프레임으로 판단할 수 없는 무엇이죠. 보통 브랜드 컨설팅 하는 과정들을 보면 우선 기업의 역사와 이해관계자들을 통해 귀납적인 방법으로 키워드를 추출해낸 후, 이렇게 뽑아낸 키워드를 특정한 카테고리로 묶고 이를 다시 추상화시켜서 에센스를 뽑아내거든요. 그렇다면 이렇게 요약된 단어가 그 회사의 자기다움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봐요. 자기다움을 언어화 하는 순간 왜곡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마치 장님들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처럼요."



이 대목이 문제였다. 내가 브랜드 컨설턴트라는 이름을 굳이 쓰고 싶어하지 않는 이유였다. 실제 시장에서는 왜곡들이 너무도 많았다. 브랜딩 작업이 포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런 그의 생각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릴 적 만들어 집안에 걸어두었던 가훈처럼, 많은 회사들의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사훈 정도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의심스러웠다. 그조차도 어려우면 BI, CI를 바꾸고 슬로건을 만드는 것을 브랜딩 작업으로 이해하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간극을 그는 어떻게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책을 쓰고 강연을 하고 필드에서 결과물로 보여주려는 노력도 어쩌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왜곡된 브랜딩 작업에 대한 문제 의식 내지는 사명감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가끔씩 저보다 어린 친구들을 만나면 기업의 존재 목적이 '영리 추구'라고 추호의 의심도 없이 말해요. 하지만 이익은 기업의 존재 목적 중 하나일 뿐입니다. 다 같이 잘 살자고 만든게 기업 아닌가요? 이 중에서 좀 더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들이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이 되는 거죠. 그런데 아무도 기업의 존재 목적에 대해서 물음표를 던지지 않더군요. 저는 그게 숨이 막혔어요. 영리추구에만 혈안이 된 기업이나 그 조직의 윗사람들만을 위한 보고서를 만드는게 싫어서, 그런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게 '매아리'입니다. 약 서른 분 정도가 지금까지 저와 함께 이 일을 하고 있어요."



여기서 '매아리'란 '매일 부르고 싶은 아름다운 이름'의 약어로 2009년 그가 설립한 공익단체의 이름이다. 처음엔 비영리 활동 및 공익 활동을 하는 분들의 네이밍을 돕는 것에시 시작했다. 그와 인터뷰를 했던 2013년까지 그는 이미 '푸드뱅크', '한국장애인부모회', '나눔문화대축제' 등 약 30여 개의 복지단체와 사회적 기업에 재능을 기부해오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비로소 선명해지는 대목이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자기다움이란 우분투(ubuntu)가 있어야만 한다는 거에요. 아프리카어로 우분투는 'I am because you are', 즉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뜻이에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이들이 관계를 매우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이들은 서양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개인을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타자와 섞여 있는 덩어리로 생각했어요. 개인의 자기다움을 포지티브하게 정의하는 순간, 개인과 개인은 대립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는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에게 표절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태생적으로 서로의 것을 구분하지 않는 기질적인 DNA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정학적인 위치도 그렇고, 항상 섞여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에 능숙한 민족이 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다. 자기다움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타인과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교감을 통해 비로소 '나다움'이 발현될 수 있다. 내가 스몰 스텝이란 모임을 통해 비로소 나다움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대화와 일맥상통하는 바였다. 골방에 틀어박혀 고민하거나 심리검사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의 '자기다움'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그는 이 지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온갖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굳이? 회사를 만들어 7명의 동료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그가 만들어가는 '최장순다움'이 여전히 기대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과연 자기다움이라는 것이 독립적으로 떼어낸다고 해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요? 혼자서 책을 읽는다 해도 그 책은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죠. 밖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나 혼자 생각한다 해도 그 사람이 지나가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이 나오지 않았을 테죠. 서양 사람들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in-dividual)' 개인을 세계 구성의 기본 단위로 상정해왔죠. 이러한 맥락에서 자기다움에의 사유는 개인의 합 보다 큰 전체, 전체 속의 개인, 우리다움 속의 자기다움을 놓치게 되는 것이죠. 지금의 세상은 우리를 영화 매트릭스 속의 건전지로 만드는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자기다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거고, 이 논의를 '우리다움'으로까지 이어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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