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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가 찌개를 태운 까닭은...

와이프가 찌개를 태웠다. 저녁 댓바람부터 친구 만나러 간다고 호들갑 떨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물론 식사 준비는 완벽하게 해놓고 갔다. 다만 찌개를 데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 중 누구에게는 알렸어야 했다. 나는 굳이 눌어붙은 냄비 밑바닥을 긁지 않고 슬쩍 데운 후 아이들 앞에 내놓았다. 미각에 있어서는 천재적으로 둔감한 아들이 군말 없이 먹어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딸은... 굳이 일부러 물어보지 않았다. 재밌는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아침 일찍 아들과 나누는 대화가 방문을 타고 들려왔다. 탄맛 가득한 찌개를 맛보던 와이프가 중대 발표가 있다면 아들을 구슬르고 있다. 와이프가 아들에게 말한다.


"자네, 혹시 요리를 배워볼텐가?"


논리인즉슨 주부가 찌개를 태우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은퇴를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누구에게 물려줄지 모르겠으니 아들더러 요리를 배우라 한 것이다. 순진한 아들은 '평소에 요리를 좋아했지만...'이라며 쓸데없이 미끼를 덜컥 물고 있다. 시트콤의 한 장면 같은 이 장면을 나는 말없이 쓴 웃음을 지으며 보고 있었다. 부쩍 건망증이 심해진 아내다. 270만 원짜리 패딩 링크를 보내며 '이걸 내가 입으면 동네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을 칭찬하겠냐'며 꼬드길 때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인데, 이럴 때 보면 '그래, 이제 당신도 나이가 제법 있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 안스러운 생각도 든다. 물론 패딩 링크를 보며 그런 생각은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말이다.


찌개를 태운다. 늘 하던 일에 대한 감을 잊어먹는다는 사실은 조금 슬픈 일이다. 나에게 찌개는 무엇일까? 아무런 생각 없이 눈 감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내게 익숙한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없어 누군가에게 물려줄 만한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고보니 '스몰 스텝'이라는 작은 모임의 리더 아닌 리더로 활동을 해온 지가 1주년을 넘긴 지도 반년 가까이를 지나고 있는 중이다. 서른 개에 달하던 스몰 스텝 실천 리스트들은 이제 대여섯 개로 줄었다. 게을러서라기 보다는 선택과 집중 때문이었다. 본 모임보다는 '쓰닮쓰담'이나 '황홀한 글감옥' 처럼 실용적인 모임을 무게추를 옮기고 있었다. 매달 계속되는 모임에 운영진도 피로도도 높아진 상태이다. 더 이상 아무런 대가없이 어떤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기엔 내 양심이 허락치 않는다. 어떤 식으로는 내년에는 또 한 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직감으로 알고 있었다.


스몰 스텝의 초심을 되새기고 싶다. 모임을 위한 모임보다 실용적인 변화를 이끄는 모임으로 변신을 시도하고 싶다. 비슷한 생각과 성격을 가진 사람과 모임들과 연결되고 싶다. 가장 '나다운 삶'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은 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현실적이고 좀 더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무엇이었으면 좋겠다. 지금 있는 모임들은 저마다의 색깔로 성장해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독립'을 장려하고 싶다. 지난 1년 이상은 의도치 않게 내가 주인공이었으니, 이제는 그들도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다시금 정리해보고 싶다. 오늘은 '사람책'으로 모이는 날이다. 사람책이 본 모임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인지는 꽤 되었다. 이런 모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개성으로 가득한 활기 넘치는 싱싱한 모임들이 더욱 들불처럼 일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모임들의 스몰 스텝이 그늘을 벗어나 나름의 '브랜드'로 더욱 성장해갔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지방 출장을 다녀와 사람책 모임을 코 앞에 두고 밀린 글을 쓰고 있던 참이다. 모임을 한 시간 앞둔 지금 이 글을 쓰지 않으면 오늘의 글쓰기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아서다. 오늘 사람책에는 휴직자들이 강연자다.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지만 요즘의 직장인들에겐 가장 핫한 주제가 아닌가. 이 멋진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 중인 나코리님을 응원하다. 세상에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그들을 만나고 연결하는 일은 스몰 스텝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스몰 스텝을 있는 그대로 끓이면 타버릴 것만 같은 위기감을 느낀다. 이 위기감이 건강한 것이길 바란다.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부터 비워야 한다. 저녁 퇴근 길 산책을 결심하며 마을 버스 대신 탄천을 걷던 그때를 떠올린다. 나는 그 때 오늘의 이 변화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년에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를 예상하지 못한다. 그저 오늘의 한 걸음을 걸어갈 뿐이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스몰 스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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