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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비친 잔물결처럼, 암환자를 돕는 윤슬케어

2012년, 대학 졸업을 눈 앞에 두고 있던 한 청년이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공군 장교를 거쳐 세종과학기지에서 일하고 싶었던 그의 꿈이 크게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혈액암은 크게 백혈병과 림프종으로 구분되며, 고열·호흡곤란·어지러움·피로감 등의 증상을 수반한다. 그를 낙담에 빠지게 한  버킷림프종은 그 중에서도 공격성이 강해 빨리 치료를 받지 않으면 수 주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었다. 그가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복부와 양팔에 암세포가 퍼져있었다. 심지어 허벅지 뼈에도 전이가 의심 가는 상황이었다. 힘겨운 투병 생활이 시작됐다. 항암치료를 시작하고 10kg 가까이 체중이 줄었다. 항구토제가 맞지 않아 매번 헛구역질에 시달렸다. 다행히 항암제가 잘 맞아 암세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6번의 항암치료 후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도 문제가 없어 퇴원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에게 두 번째 삶의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완치를 한 그에게는 또 다른 종류의 두 번째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투병하며 약해진 체력 때문에 그는 계단을 오를 때도 몇 걸음 오르면 몇 분은 쉬어야 했다. 원서를 쓰는 시기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대학원 진학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 서류 제출과 면접 심사 때는 군 면제 사유를 밝혀야만 했다. 암 투병을 밝히면 번번이 탈락 소식을 들었다. 암 환자는 약하다, 오래 일할 수 없다는 편견과 싸워야 했다. 재발하면 어떻할거냐라는 질문을 듣고 좌절에 빠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입사와 퇴사를 반복한 끝에 그는 혈액암 환자를 돕는 비영리단체에 입사했다. 그제서야 그는 이 문제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비영리 단체에서의 일들은 한계가 많았다. 정승훈 대표가 사회적 기업 '윤슬케어'의 창업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윤슬케어는 암 치료를 마친 생존자가 원활하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는 회사다. 환자 병원 동행과 모임을 운영하는 일이 주된 비즈니스 모델이다. 여기에는 과거와 달라진 가족 구성원의 형태가 큰 몫을 했다. 암 환자들의 치료 과정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일 중 하나가 보호자의 동행이다. 가족과 형제가 여럿인 과거에는 돌아가며 환자를 돌보는 일이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족의 수가 서넛을 넘지 않는 핵가족의 형태인 경우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경제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어렵다. 매번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보호자 역할을 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보호자는 죄책감이 들고 환자는 서운함을 숨기기 어렵다. 윤 대표는 이 과정의 '문제'에 집중했다. 똑같은 경험을 한 환자가 이 과정을 함께 한다면 어떨까? 선배 환우라면 단순한 동행이 아닌 공감어린 소통도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대로 이 서비스는 큰 호응을 얻었다. 환자는 용기와 위로를 얻었고 동행하는 선배 환우는 뿌듯한 보람과 삶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정 대표의 솔루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독서 모임 '트레바리'처럼 환우들끼리 시간과 취미를 공유하는 서비스를 새로이 만들었다. 이 과정 역시 그 자신의 경험이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일단 암환자들은 치료 때문에 일상의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다. 특히나 낮 시간은 경제 활동 때문에 홀로 되는 시간이 많아진다. 암 때문에 돈과 시간, 경력까지 잃었는데 친구까지 만나기 힘들다. 잘 먹고 잘 관리하고 운동까지 해야 하는데 혼자서 이 모든 걸 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경험을 가진 환우들이 함께 모인다면 어떨까? 이런 가정 하에 함께 운동하는 '홈 트레이닝' 서비스를 오픈했다. 코로나 이후에는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줌으로 함께 운동을 한다. 글쓰기 모임을 한다. 자체 제작한 다이어리로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고 타인과 함께 나눈다. 실제로 암을 경험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들어내기 어려운 프로그램들이었다.


최근 우리나라의 암 환자 수는 무려 200만을 헤아린다. 흔히들 찾는 인터넷 카페는 잘못된 정보들이 넘쳐 난다. 너무 상업적으로 빠지거나 자연 치유 쪽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들은 인터넷에서 찾은 정보들 때문에 의사와의 신뢰 관계가 깨어지는 일도 흔하다. 자신이 직접 찾은 정보와 다른 치료와 처방 때문에 쌓인 불신은 결과적으로 치료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마음이 편해야 치료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암 관련 뉴스 기사들도 적지 않은 문제다. 최근 이슈가 된 김철민 씨의 경우에도 기존 치료를 병행하면서 구충제를 복용한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를 맹목적으로 따라 해서 병원에 가지 않고 구충약만 복용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된다. 약이 가진 독성 때문이다. 이 때문에 오히려 간의 상태가 나빠져 정작 받아야 할 항암 치료조차 못 받게 되는 일이 생긴다. 암과 환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기사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일반인들이 가진 암 환자들에 대한 관심은 '치료' 영역에만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암 환자들의 70%는 완치라 부를 수 있는 5년 이상 생존자들이다. 윤슬케어는 이 과정의 환자들에게 집중했다. 암 환자들의 사회 복귀를 돕는 동시에 정확한 관련 정보들을 제공하는데 온 힘을 기울인 것이다. 윤슬케어의 비즈니스 모델은 명확하다. 일단 200만 명에 달하는 암 환자들과 5년 이상 생존에 성공한 완치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맞딱뜨리는 치료 과정과 완치 이후에 겪는 어려움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Pain Point)가 된다. 윤슬케어의 잠재적인 경쟁자들은 신뢰할 수 없는 정보들로 가득한 인터넷 카페들이다. 기존에도 요양 병원과 연결하거나 문화 컨텐츠를 만드는 회사들은 있었다. 하지만 윤슬케어는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하는 환자들의 '경험'에 집중하고 그 해결책을 찾았다. 그 해법이 바로 환자들과의 '동행 서비스'였고, 환우들을 위한 '모임'이었으며, 암환자들의 불안을 보듬어주는 '투병 수업'이었다.


'윤슬'은 다른 말로 물비늘이라고도 불린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이른다. 화창한 한낮에도 볼 수 있고, 휘영청 달 뜬 밤에도 볼 수 있고, 해가 뜨거나 지는 어스름에도 만날 수 있다. 바다에도 드리우고, 강이나 호수에도 드리운다. 물결이 잔잔해야 윤슬이 더 잘 든다. 윤슬케어라는 회사명은 바로 이런 순 우리말 '윤슬'에서 왔다. 잔잔한 물결처럼 암환자들의 마음에 평화와 위로를 가져다주기 위함이다. 정 대표는 이제 다음 스텝을 준비 중이다. 일상을 찾아주는 힐링 소설과 오디오북을 준비 중이다. 암 환자들과 따듯한 소통이 가능한 보드게임도 개발했다. 지금은 참가자의 기초체력 증진과 자세 교정을 위해 소셜벤처 '마이리얼짐'과 운동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다. 희망을 키우는 음악 교육은 '몽작소프로젝트'와 건강한 식단조절을 위한 영양 교육은 '텐먼스맘'과도 함께 하고 있다. 더불어 자연에서 힐링을 만끽하기 위해 숲 해설사와 동행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할 예정이다. 윤슬케어와 함께 하는 환자들의 마음의 바다가 잔잔해지고 그 위로 반짝이는 잔물결이 일렁이고 있다. 바로 이 회사 '윤슬케어'가 만들어진 목적이자, 존재하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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