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테라오 겐은 학교로부터 설문지를 받아듭니다.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어떤 대학이나 학과에 진학하고 싶은지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학생은 끝내 설문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출 당일에 자퇴서를 냅니다. 재산도 경험도 없는 그였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열일곱 살의 어정쩡한 상황에서 장래를 결정한다? 그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한 모욕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런 조사를 하는 어른도, 순순히 쓰고 있는 친구들도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이 발칙한 소년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2021년, 이제 마흔 다섯 살이 된 이 학생은 세계적인 소형 가전 회사 '발뮤다'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2003년 홀로 창업한 이래 15년 간 매출은 무려 1500배나 증가했습니다. 직원은 85명, 지난 해 매출은 900억 원에 달합니다. 2010년 선풍기를 발매하고 나서부터 매출이 크게 늘었습니다. 이 밖에도 공기를 순환시키는 서큘레이터, 가습기, 히터 등 냉난방 가전을 연이어 만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러한 성장의 비밀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발뮤다의 성공은 겉으로 드러난 숫자에만 매달리면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바로 그의 어린 시절입니다.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구요? 그런데 테라오 사장의 경우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학교를 나온 그는 밴드 활동을 시작했지만 10년 만에 접었습니다. 이후 자신의 팬 집에서 만난 건축 잡지를 보고 디자인에 눈을 뜹니다. 그래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노트북 거치대를 만들어 작은 성공을 거둡니다. 하지만 창업 7년 째 찾아든 미국발 경제 위기 때문에 도산 위기에 처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살던 그도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그는 여전히 호황 중인 레스토랑의 모습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렇게 멋진데, 왜 우리 제품이 안 팔리는 걸까. 비싸서 그런가? 멋진 제품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가?’
해답은 그가 만든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제품이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그린팬 S'라는 선풍기입니다. 오래도록 바람을 쐬면 머리가 아픈 사람들을 위해 자연의 바람을 재현했습니다. 미리 2000대의 주문을 받아 공장에서 6000만 엔을 빌려 만든 제품입니다. 그리고 출시 첫 해 12000대를 팔았습니다. 그 다음 해는 2만 5천대, 3년 째는 5만 대를 판매합니다. 이 선풍기는 기술적으로도, 그리고 스토리 관점에서도 열광할 많나 부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열일곱 살 고등학생이 학교를 뛰쳐나온 뒤 실패한 록밴드 연주자자 테라오 사장의 생각에는 한결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직'이 아닌 '업'에 대한 자각입니다. 기타 연주자이건 가전 회사의 사장이건 그가 추구하는 '가치'는 한결같기 때문입니다.
“음악에 대한 꿈을 접고 ‘다음에 뭘 할까’라고 생각했을 때 애플, 파타고니아, 버진이라는 세 회사에 눈길이 갔다. 애플에는 스티브 잡스, 파타고니아에는 이본 취나드, 버진에는 리처드 브랜슨이라는 창업자가 있다.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 록밴드의 방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록밴드는 곡을 만들 때 시장조사를 하지 않는다. 네 명이 모여서 함께 생각해 나오는 것을 당당하게 곡으로 만들고 연주한다. 하고 싶은 것을 할 뿐이다. 세 회사는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상품이나 서비스로 만들고 그것을 필사적으로 모두에게 전달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소울'에는 아픈 딸 때문에 수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이발사 된 '데즈'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간절한 꿈을 이루지 못하는 그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직업은 다르지만 사람들의 문제를 들어주고 이를 해결해주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그의 '가치'는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물건에 자신의 생각과 고집을 담으면 그건 결국 브랜드 스토리가 됩니다. 자연의 바람을 담은 그린팬 S, 죽은 빵도 살리는 토스터기 '더토스트'는 어린 시절, 당연한 것에 저항하는 테라오 겐 사장의 고집이 아니었다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품을 만들기 전에, 가게를 열기 전에 한 번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당신 브랜드의 진정한 '차별화'는 거기서부터 시작될테니까요.
“세상에는 수치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크기·속도·무게·거리·성능은 수치로 표현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다. 첫사랑의 느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아이들에 대한 애정, 아내에 대한 감사 등이다. 디자인이라는 건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것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내가 하고 있는 제조업에는 원가도 있고, 공장 라인도 있고, 설계도도 있고, 여기저기 수치투성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결과적으로 구매하는 것은 수치로 나타낼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