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0
눈이 이틀째 계속 내리고 있다. 창밖을 보니 하얀 눈이 멈추지 않고 온 세상을 덮고 있었다. 바람은 차갑고, 거리는 한산하며, 지나가는 차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길은 눈에 묻혀 흔적조차 없고, 현관문을 열고 나서려면 발이 푹푹 빠지는 걸 각오해야 했다.
옆집 아저씨는 오늘도 눈을 맞으며 눈을 치우고 계셨다. 눈이 많이 쌓이기 전에 중간중간 치우시는 것이다. 아저씨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길을 만들어 주셨다. 그 모습이 언제나 내게 작은 위안이 된다. 아저씨가 제설 도구를 들고 눈을 치워주실 때면, 세상이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지만, 결국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말로밖에 전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오늘도 여전히 활짝 웃으시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 낯선 곳에서 마주한 친절은 우리 모두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온종일 집에 갇혀 있었던 오늘, 아이와 함께 유난히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둘째 아이 이야기, 일 이야기, 그리고 꿈과 미래 이야기까지. 다시 돌아보아도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이는 이미 며칠 치 할 일을 마쳤다며 홀가분해했다. 뭐든 미리미리 해두는 아이와 미루고 미루는 나는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미루는 걸까? 왜 이런 습관이 생겼을까? 어떻게 하면 미루지 않고 바로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마치고 책을 읽는 동안에도 머릿속은 이런 생각들로 가득했다.
눈이 덮여 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내 삶에서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고,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날. 모두가 한 번쯤 겪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날들이 많았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소중했지만,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한 하루였다. 큰 창가 소파에 앉아 멍하니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눈만 내리고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눈에 가려졌다.
문득 떠올랐다.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었고, 용기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길을 찾지 못하는 순간들이 반복되면서, 어느 날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 사이 나의 그런 모습도 사라져 버렸다. 그럴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날에는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속 불안이 커져만 갔다. 그러다 문득 어제 둘째 아이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이 떠올랐다.
“엄마, 요즘 제 마음이 복잡했어요. 하지만 지금 실패했다고 제 인생 전부가 끝난 건 아니잖아요. 저는 결국 해낼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 말이 어쩐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내가 조심스레 요즘 하는 생각을 털어놓자, 아이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엄마를 칭찬해 주세요. 그리고 저를 믿어주시는 것처럼 엄마 자신도 믿어주세요.”
아이에게 위로받다니. 순간 울컥했다.
그래, 우리 모두는 순간순간 흔들리며 사는 거지. 그렇게 흔들리며 더디더라도 조금씩 나아가는 거지. 길을 찾지 못하는 날들이 결국 나를 더 강하게 만들겠지. 지나온 시간들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나를 변화시키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풍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눈이 내리고, 나는 아이와 함께 따뜻한 집 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날. 밖에도, 마음에도 길이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길을 찾고자 마음을 내보는 날. 내일은 다를 거라고 희망을 품어보는 날. 길이 보이지 않기에 더 많은 길을 상상할 수 있다고 믿어보는 날.
등 뒤에서 아이가 저녁 준비로 분주하다. 시금치와 새우를 넣은 오일 파스타를 만든다고 한다. 조금만 먹겠다며 면을 적게 삶아 달라고 했지만, 계획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에 결국 먹지 않고는 못 배길 것만 같다.
“엄마, 오늘이 이곳에 온 지 딱 한 달 되는 날이에요. 시간이 정말 빠르네요. 케이크라도 준비해서 기념할 걸 그랬어요.”
아이는 나와 함께한 한 달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고 싶었던 일도 모두 할 수 있었다며 만족스러워했다. 그 말을 듣자 문득, 우리가 일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나와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재미나는 일이 일어나거나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충분히 의미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