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하여 복학한 늙은 학생들은 아무 여자하고나 장가가 버리고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약혼해 버리고
착한 아이들은 알맞는 향기를 내뿜으며 시들어 갔다
최승자, 197x년 우리들의 사랑
- 아무도 그 시간의 화상(火傷)을 지우진 못했다.
취업 시장은 마치 경매장 같았다. 굉장히 신속하게 모든 과정이 이루어졌다. 한눈을 팔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해야 최종 승리자가 되는 게임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경매에 참여하는 구매자가 아니라, 그 상품들이라는 점. 언젠가 가봤던 한 포구의 생선들처럼 우리는 맥없이 선택되길 기다려야 했다. 다른 물고기보다 더 살이 많고, 눈빛이 또렷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버려지거나 싼 값이 팔려나가는 운명이 되었다. 살아남자면 눈에 띄어야 했다. 내가 아닌 '상품A'로 나를 준비하고 나가는 편이 승률이 높을 터였다.
대학 4학년이 되었을 때는 여러 길을 기웃거리나 고시 공부 마저 포기하고 맥없던 시절이었다. 시민단체에 관심이 있었지만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이 직업이 될 수 있나 궁금했다. 주변의 롤 모델을 찾기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용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IMF 영향으로 취업하지 못하고 학교에 머무는 복학생 남자 선배들이 학교 곳곳에서 무덤처럼 쌓여있었다. 여자 선배들은 소리 소문없이 자취를 감췄고, 동기 여학생들도 눈에 안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각종 기업들의 취업공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문과 여학생들의 자리는 가뭄에 콩나듯 했다.
문과 여학생, 게다가 운전면허증과 겨우 커트라인을 넘은 토익 성적 외에는 이렇다할 자격증도 없는 사람이 서류라도 낼 수 있는 곳을 찾아 열심히 취업지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한 번 작성해 놓으면, 지원하는 회사에 맞게 조금씩만 고치면 되니 그렇게 어려울 일은 아니었다. 자기 소개서에 넣을 나는 조금 더 멋지고 부풀려져야 할 텐데 부풀려질 내용도 빈약해서 수시로 자괴감이 엄습했다. 본 게임을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지원하는 과정에서 이미 지쳐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더 괴로운 본 게임에 출전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20대의 멋모르는 잣대로 너무 작은 회사는 피하고 이름을 들어봄직한 대기업들로만 원서를 넣었다. 서류 통과도 어려웠고, 나를 세상에 증명할 기회 조차 얻지 못하는 냉정한 취업시장에 상처 받았다. 그러다 몇 번의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다. 6월에 있었던 첫 번째 면접 결과는 탈락이었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자신감 없는 태도가 역력히 드러나서 면접과 동시에 그 회사와의 인연이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발표일에는 그래도 자의 잠재력을 봤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결과를 조마조마하며 확인했다. 실패가 나쁜 것만 남긴 것은 아니었던지, 그 면접 이후 면접에 대한 요령을 알 것 같았다.
요령을 알게되자 조금 수월해졌다. 자신감을 찾았고 면접을 보았다. 자기소개서에서 물어봤을 때 연결점을 찾아서 그 고리를 풀어낸다는 느낌으로 말을 했고, 면접관들 얼굴에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읽었다. 면접까지 가면 대략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게 뭐라고, 여기에서도 경험이 중요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그 과정이 유쾌한 것만은 아니었다. 종종 벌거벗은 채 들판 가운데 던져진 느낌이었고, 어떤 질문은 상당히 불쾌했다.
결국 입사하게 된 지금의 회사의 최종 면접에서 "결혼해도 회사를 다닐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하마터면 감정이 흔들릴 뻔 했다. 20세기 말인 지금, 내가 이런 전근대적인 질문을 받아야 하는가, 내 귀를 의심했다. 함께 면접 방에 들어간 다른 남자 지원자들에게는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순간의 화를 억누르고 잘 대처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순조롭게 끝났고 결과는 합격이었다. 이후 입사 교육 이후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이 때, 이 회사의 수준을 알아챘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는 언제나 더 아픈 법.
면접을 마치고, 결국은 졸업 하기 전에 취업을 하게되면서 종종 최승자 시인의 시를 떠올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사학년 계집아이들은 아무하고나 약혼해버리고 였는데, 나는 그 구절을 한동안 '사학년 여자아이들은 아무데나 취업해 버리고'로 알고 있었다. 그만큼 황량하고 외롭고 쓸쓸했다. 꿈이라는 것, 되고 싶은 것, 어떤 일을 하고 살 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떠밀리듯 취업을 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이란 이런 것인지 체념하며 합리화하며 축하주를 들이켰다.
그렇게 수험번호 1509번, 김지수는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회사 입성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