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서 안된다고요?
대학에 '새내기 배움터'라는 오리엔테이션이 있다면, 회사들은 '신입사원 연수'를 마련해놓고 있었다. 소위 OO맨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첫 단계로 짧게는 1주일, 길게는 3주까지 회사마다 다르다. 회사 관계자들이 나와서 이 기간을 회사생활의 꽃이라고 말해주었다. 회사에서 월급도 주면서 일 안하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게 해주는 기간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거다. (정말 그랬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회사에 선택되었다는 자부심과 고마움이 기대감과 함께 뒤섞이며 신입사원이라면 누구나 눈이 초롱초롱하던 때였다.
김지수는 이 회사를 오기 전에 먼저 합격한 L 회사의 3주 연수에도 참석한 적이 있다. 3주 동안 회사 전반에 대한 소개를 받고, 각 지역에 있는 공장들도 방문하고, 중간중간 회사에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커리큘럼이 빽뺵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회사에 대한 애사심을 쇄뇌시키는 장치들이 있었지만 S회사 처럼 창업주의 일대기를 외워서 시험을 보는 것은 아니니 이만하면 괜찮은 것이라고 동료들이 알려주었다. 과정 마지막에는 희망부서 배치 면담이 있었고, 5%가 채 되지 않았던 여성 신입들은 거의 미리 정해진 곳으로 배치되었다. 지수는 영업부를 지원했으나, 정해진대로 홍보실에 배치되었다.
L회사에서 3주 교육을 받고 부서 배치를 받고 나서도 항공사를 선택한 것은 선배들의 조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L회사에 입사한 여성 중 10년, 15년 후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여성들이 많은 회사가 확실히 여성 직원들이 오래 근무하는 데 더 유리하다는 논리이다. '여자에게는 교사가 최고지' 이런 말을 듣기 싫어 교직 이수 하고도 교사 임용을 선택지에서 배제했는데 회사를 선택할 때도 뚜렷이 인지해야 하다니 성별이 무시하고 싶어도 자꾸 걸려서 넘어지게 만드는 작은 돌멩이처럼 느껴졌다.
신입사원 연수는 10일 정도 진행되었다. 회사에서는 올 해부터는 신입사원들이 현장경험을 2~3년 필수로 하게 한 후 본사부서로 배치한다고 했다. 현장이라고 하면 별도로 선발하는 승무원과 정비는 제외하면, 크게 승객을 상대하는 여객 부서와 화물을 처리하는 화물 부서가 있다고 했다. 교육하러 오는 분들은 거의 여객 파트에서 온 분들이었다. 교육 과정 중에는 서비스 교육 시간도 배정되어 있었다. 과정을 진행하는 여자 과장은 여성 직원들만 남으라고 한 뒤 남성 직원들을 '오빠'로 부르면 안된다고 강조했고, 화장과 단정한 투피스 치마정장을 구입하라고 했다. 치마 정장을 입어보지 않아 갖고 있지도 않았던 지수는 당황스러웠다. 승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직종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봤고, 그 일이 투피스 치마정장을 입고 화장을 해야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피하고 싶었다. L직원에서 마지막 면담 때 끝까지 우겨서 원하는 부서로 배치 받았던 남자 동기를 떠올렸다. 꼭 화물을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연수의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는 부서배치 면담이 있었다. 인력배치를 담당하는 부서의 부장님들이 세 분 앞에 앉아서 입사할 때처럼 면담을 했다. 모두 남성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이 회사에 여성 부장은 한 명도 없었다. 어느 부서를 가고 싶은지를 묻고 확인하는 자리라고 했다. 면접관이 어느 부서에 가고 싶은지를 물었다. '화물' 부서를 가고 싶다고 답했다. 세 사람의 표정이 모두 일그러졌다.
그 중 한 사람이 입을 떼었다. "우리 회사는 기본적으로 서비스 회사이고, 서비스는 여객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김지수씨는 이력서를 봤을 때도 '여객'서비스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잠시 멈칫했지만 담담하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말했다. "저는 교육 기간에 화물 부서의 설명을 들으며 화물 파트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습니다. 그래서 여객은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질문 했던 사람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는 약간 언성을 높였다. "우리 회사는 화물에 여자 안보냅니다. 여객 어디 가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말해요"
지수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손이 떨렸다. 전공이나 다른 자격이 안되어서 못보낸다고 했으면 수긍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여성'이라서 안된다는 말에 순순히 '네,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저 말에는 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여자라서' 안보낸다는 말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갑자기 생각하지 않은 것을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도 어렵습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윽고 옆에서 듣고 있던 가장 나이 많은 부장이 매우 화를 내며 "김지수씨, 김지수씨의 의견은 더 이상 듣지 않겠습니다. 회사에서 알아서 배치할때니 그런 줄 아십시오" 하더니, 자리에서 나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