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걸의 회사생활] 영혼을 내놓고 일하라고?

직장인의 덕목: 고분고분한 사람 되기

by 낯선여름

“그냥 영혼을 내놓고 일해요. 그냥 시키는대로 하는 게 답이야”


함께 일하는 동료이자 1년 선배가 한 말이다. A 상무가 B 부장에게 지시한 일이 선배인 C 차장을 통해 나에게 떨어졌다. 즉시 조치하라는 메일이 전달 전달되어 도착했다. 처리 자체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 일이지만, 상식적으로 납득이 잘 안가는 지시였다.


이 지시는 2주 전 내 직속 상사인 D 팀장이 반대했던 일과 관련이 있었다. 예약센터에서 요청했던 사항이었는데 팀장은 나름의 논리로 상대 부서를 설득했다. 곧 다른 팀으로 발령 예정인 D 팀장은 이번 지시에서 빠져있었다.


굳이 못할 일은 아니지만 시급하게 해야 할 일도 아니었다. 혹시 몰라 예약센터에 확인하니 그 쪽에서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이것은 누구를 위한 일이란 말인가.


같은 팀 선배가 다시 재촉을 한다. 금방 된다면서 안 하냐고. 지금 뭐를 따지고 말고 할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한 가지만 확인하고 한다고 B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이런 지시를 하게 된 것인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물었다.


그는 의외의 답을 했다. 지금 회사를 나와서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사장님 방문하시고 대책을 내놓기로 했는데 해결책은 오래 걸리니 우선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서 이 작업이라도 해놓는 게 안전하다고 했다.


긴 조직생활에서 여러 번 겪었던 일이다. B부장의 입장이 난처해질 상황임을 파악할 수 있는 눈치는 되었다. 통화 중에 실행 버튼을 바로 눌렀다. 미봉책으로 내놓은 이 대안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생각하면서.


다음 날 출근했더니 C차장이 웃으며 그냥 영혼을 내놓고 일하라고 조언했다. 그런 말이라면 입사할 때부터 수십 번 수백 번 들었다. 현장에서 일하며 고객이나 거래처에 시달릴 때는 한편 도움이 되기도 했었다. 회사에 나오면 나는 내가 아니기로 하고, 회사원 가면을 쓴다고 상상하고 스트레스 상황을 넘기기도 했으니.


하지만 이십 년이 다 되는 회사생활에서 선배에게 듣는 말은 씁쓸했다. 우리는 이십 년이나 회사에서 이 긴 시간을 보내며 영혼을 다 내놓고 일하고 또 그 방법을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일해야 조직에서 튀지 않고 잘 지낼 수 있고, 윗사람 말에 바로 순응하는 사람을 선호한다고.


애당초 영혼을 담아 일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야 했나, 일반 회사에서는 가능성이 없는 것일까. 같은 고민은 왜 반복되는 걸까.


괜히 생각이 많아지는 올드걸의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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