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하다는 소문의 그녀에게 결재 받기
올 해 정기 승격발표가 났다. 우리팀에서는 K 차장 1명만 부장으로 승진되었다. K 차장도 입사한지 24년차인데 이제 부장이 된 것이니 늦은 승진이긴 하다. 그리고 뒤이어 팀장 발표가 나며, 기존의 팀장이 다른 팀으로 옮기면서, 팀 내 유일한 부장인 K 부장이 팀장이 되었다. 이 나이에 팀장 한번 되는 것이 뉴스거리도 아닌데, 이놈의 회사에는 부장이 되고도 팀장 보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기 때문에 회사 안에서는 바로 화제가 되었다.
'너희 팀장님 어때? 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저희 팀이 40명이라 원래 잘 알던 분은 아니고, 아직 잘 모르겠어요. 잘 하시겠죠' 정도로 답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새 팀장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들은 이야기를 건네 준다. 중론은 '깐깐하다' '함께 일하기 편한 사람은 아니다' 였다. 솔직히 나는 이제 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연배도 그렇고, 실제로 여러 임원들과 팀장들을 거쳐오며 자연스레 단련이 된 탓이다. 어떤 괴물이 오더라도 내 사과나무를 심고 있을 수 있는 멘탈이 된 것이다. 뭐 나만 그렇겠는가. 어디에서건 20년 이상 일했으면 누구나 그 정도의 굳은살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자'팀장이라서 좋냐고 묻는 질문에는, 갑자기 멈칫하게 된다. 이런 질문 자체가 구닥다리여서이기도 한데,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여러 팀장들을 거쳤지만 '남자' 팀장이라서 어떻냐는 질문은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니 나에게도 회사생활 20년만에 '여자'팀장은 처음이다. 여성 친화기업이라고 불리는 이 회사에서, 여성 팀장을 처음 만난것이다. 점점 늘어나고는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부장, 팀장 중에 여성은 소수이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억세다' '깐깐하다' '어렵다' '불편하다'의 수식어를 달고다닌다.
툭 까놓고 진급을 빨리 하는 부장들, 팀장들, 여성인 경우에 소위 말하는 '튀는' 부류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떤가. 남성들 중에는 그런 사람 훨씬 더 많기도 하거니와, 남성들은 튀지 않아도, 역량이 뛰어나지 않아도 팀장, 그룹장의 역할이 주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중 몇몇은 그 전에는 눈에 띄지 않는데도 역할이 주어질 때 잘해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여성이라고, 소수라고 무조건 좋다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소수인 쪽에서 생각해보고 우호적인 태도를 가졌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내가 소수에 속해있어서 가능한 것일까.
지난 주에 우리 부서 최고 결정권자인 실장(상무)이 직원들에게 전체 메일을 보냈다. 6월 부터는 전면 사무실 출근을 하도록 하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팀장의 재가를 받아 재택근무를 신청하되, 재택근무는 주 2회로 한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올 것이 왔다. 회사가 정상화되니 예상했던 일이지만 지난 2년간 휴업도 1개월씩 두어 번 하고, 재택근무를 잘 활용했던 직원들에게는 이제 새로운 태세 전환을 요구하는 일이다.
나의 경우는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고등학생 큰 아이의 기말고사 기간이다. 이제 많이 커서 엄마를 필요로 하지는 않지만,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기말고사 시작시간을 학년별 차등을 두면서 기말고사 기간동안 셔틀버스 운영을 안하는 것. 버스를 탈 수는 있지만 차로 10분도 안되는 거리를, 40분 정도 소요해야 하는데 아침잠 많은 아이가 걱정이다. 아침도 챙겨먹여 보내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개인적인 사유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 하기가 구차하다.
우선 연차 휴가를 내놓고, 메일이라도 보내보고 포기하자 싶어서 간단히 글을 썼다. 형평성이 어긋난다면 부결하셔도 된다고 정중히 붙였다. 조금 뒤에 팀장에게 메신저가 왔다. 재택 2회 기준 지키면 내도 되니 하루만 휴가 내는 것으로 해서 변경해서 올리면 승인해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도 아이들 키우며 다니는 엄마라 잘 알아요' 덧붙였다. '원래 딸아이 학교 보내고 9시반 출근으로 다니다가 팀장이 되어 8시 반 출근으로 변경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상무님께 말씀 드리고 8시 40분까지 출근하고 있어요. 아침밥 챙겨주고 나오려면 아무리해도 40분밖에 안되네요. 그래도 딸래미가 가장 소중해서요'
퇴근 길, 평소에 별로 대화도 안해봤던 팀장님과 이런 대화를 메신저로 나누고보니, 갑자기 든든한 마음이 들고, 회사일에 대한 의욕까지 샘솟으려 한다. (이런 단순함으로 20년을 다닌, 나란 사람). 팀장 이전에 그도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이고, 아침밥 챙겨주고 싶어 고민하는 사람이라니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일하다보면 위치상 어쩔 수 없이 어려운 일들이 생기겠지만, 이 날의 배려를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누가 '여자' 팀장이라서 어떠냐고 물으면 당황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야겠다. 같은 여성 입장에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든든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