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育我)] 머물게 하라

배우는 것은 머무는 것이다. # 머물다. # 머금다.

by 낯선여름


'아이들은 학교에서 말하지 않는 연습을 합니다'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이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것도 습관인데, 그럴 기회를 차단당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업시간에 국한된 이야기이겠지만, 교사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이라 더욱 충격적으로 와닿았다. '우리 아이들, 집에서는 잘 표현하나요?'라고 되묻는다. 혹시 의견을 이야기했을 때 주저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을 차단당하지는 않는지, 그런 경험을 통해 점차 의견을 말하지 않게 되는지를 되물었다. 자기 의견을 마음껏 표현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고개가 여러번 끄덕여졌다.


올 해 큰 아이가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학부모 독서회를 한다기에 신청했다. 아이 어려서부터 일하는 엄마라는 핑계로, 실은 이런저런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아서, 여러 '당번' 들은 신청하지 않았다. 내가 신청하지 않아도 금방 인원이 차는 걸 보면, 하고 싶은 어머니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 독서회라면 책을 읽고 나누는 것이니 해볼만한 것 같았고, 마침 인원도 적당히 남아있었다. 코로나 기간에 아이가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졸업식도 못가는 상황이 되고 보니,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입학식을 제외하곤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학교는 아이가 다니는 것이지만, 독서회 정도로 느슨하게 참여하면서 학교 교정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신청했다.


독서회를 이끄는 선생님과 (아무도 안면이 없는) 어머니들과의 만남은 어색하긴 했지만, 책을 매개로 하기에 이야깃거리가 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교사는 학교의 활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들은 일체 이야기 하지 않지만, 대화 중에 고등학생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는 소회를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런 평범한 이야기 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우리 아이는 독서회 선생님에게 배우지 않지만, 이런 선생님들께 수업을 받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교육이 특히 고등학교에서는 사교육/학원에 밀려 무너졌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것만은 아니구나, 안심이 되었다.


왜 독서를 해야하느냐는 학생들의 질문을 받으면 교사도 고민한단다. 한 권의 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없는 학생들을 앞에 두고 책만을 가지고는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생각보다 아이들의 수준은 높지 않아서 좋은 문장, 단어부터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단다. 아이들과 집에서도 '한 문장'에서 시작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해준다. '내 인생의 문장'은 무엇인지, 엄마인 나 자신도 생각해보며, 그 '한 문장 찾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책을 읽고 배경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배움에 있어 '머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영상도 훌륭한 교육 자료가 될 수 잇지만, 영상은 대부분 휘발되어 나가기 쉬운 매체이고 머물지 않는다고. 책과 문장은 우리 곁에 머물고, 남아서, 어휘 은행이 만들어지고, 자연스레 글을 쓰고 말을 할 때 여러 단어 중에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한 단어 밖에 몰라서 늘 그 단어만 쓰는 사람과 여러 단어 중에 적합한 것을 꺼내 쓸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다른 것인가. 그 다름을 느낄 수 있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오지 않지만,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나는 이 날, '머문다'는 말에 푹 빠졌다. 음식도, 차도 단순히 재빨리 먹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음미하고 다양하게 경험하면 그 풍미를 느낄 수 있듯이, 배움도 천천히 머물게 해야 한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교사 본인은 고등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며 부모와 단절되어 생각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 것이 참 감사하다고 한다.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다양한 것에 머물러 보았기 때문에 생각하고 읽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생 정도 되는 나이라면 이미 품에서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밥먹는 일 이외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책 읽기, 전시장 가기, 공연 보기 등도 전혀 강요하지 않는다. 강제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나 좋은 것은 이제 나 혼자 하고 있다. 그러니, '머무르기'도 아이에게 권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이번 모임을 통해서 이 머묾의 자세에 대해 다시 한번 곱씹고 여기에 머물러 보는 것이다. 아이의 시행착오에 대해 한발짝 뒤에서 더 기다려주자고. 앞으로 내가 책을 읽을 때나 삶을 살아나갈 때, 종종 이 단어가 보석처럼 빛을 발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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