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던 바다 - ① 거문도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찬란한 섬, 거문도

by 연목

1.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찬란한 섬, 거문도

여수에서도 배를 타고 2시간 넘게 가야 하는 섬, 거문도.

어렵게 여수에 왔다고 해서 거문도에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애당초 버리는 것이 좋다.

하늘과 바다가 허락해야 갈 수 있다. 낯선 이와의 눈 맞춤이 어색한 거문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출렁였던 이야기들을 숨은 여수를 소개하는 첫 꼭지로 꼽았다.

시간이 되거든 꼭 한 번 찾아 가보기를 권한다.


여수의 봄은 거문도에서 시작한다.

거문도 등대와 관백정 사이

수월산 동백꽃 사이로

서도 이금포해변 쑥밭 그물 사이에서

거문대교 아래 녹문 사이로

여수의 봄은 그렇게 온다



1. 거대한 관문 거문도


여수에서 뱃길로 두 시간 남짓 떨어진 거문도. 녹문(鹿門)을 지나자 연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이국적인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탁월한 문장가였던 귤은 김류 선생은 이러한 거문도를 삼호팔경(三湖八景)이라 부르며 시로 읊었다.


돛단배 귀향하는 백도

구름이 넘나드는 석름

낙조 그만인 용만

불 밝힌 고기 배들

파도가 넘실대는 녹문

명사십리 이곡

밤비 내리는 죽림 야경

가을 달빛 아름다운 귤정


여수엑스포 신항에서 출항하는 여수발 제주도행 골드스텔라호에 몸을 싣고 다도해를 이리저리 비켜가며 제주항을 향해 가다 보면 배 타는 것이 지루할 때쯤 갑판에 나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거문도와 거문대교가 눈에 들어온다. 최근 완공된 거문대교는 녹문 해협을 지나는 배들을 유유히 서서 바라보며 거문도를 드나드는 배들의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여수와 제주도의 중간에 위치한 거문도는 우리나라 남해안을 지키는 선봉장으로서 주변의 백도, 손죽도, 초도, 삼부도 등을 거느리며 거대한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쪽에서든 서쪽에서든 남쪽에서든 어디에서 출발하든 거문도 앞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것이다.


거문도에서 여수까지는 114.7km, 제주까지는 110km가 떨어져 있으며, 남해안 끝 부산까지는 197km, 동쪽 바다와 맞닿아 있는 일본 규슈까지는 161km, 대마도까지는 168km 떨어져 있어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과거부터 거문도는 일본과 중국을 오가는 수많은 어선과 무역선들의 피난처이자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더불어 거문도를 비롯한 손죽도와 초도를 출항한 어선들은 멀리 서해안 흑산도를 거쳐 위도, 연평도, 황해도의 장산곶까지 진출하였으며, 동해로는 거제도, 부산을 거쳐 포항의 장기곶, 울릉도까지 진출하여 동․서해를 막론하고 바다를 누볐던 이야기들이 거문도에는 넘쳐난다.


거문도는 동도, 서도, 고도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싸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어 예전부터 천혜의 항구로서의 기능이 탁월하였으며, 동도와 서도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그 사이 고도가 안겨 있는 형상으로 내해를 중심으로 민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평야가 거의 없고 일부 낮은 구릉지에 밭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짓고 있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음달산(서도, 237m)과 수월산(서도, 194m), 망향산(동도, 246m)이 있다. 극간 거리는 남북으로 6.9km, 동서로 5km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건조한 바람이 부는 전형적인 온대계절풍 기후가 나타나며 바다의 영향으로 연중 기온이 온화하고 강수량이 많은 해양성기후의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거문도를 만든 것은 8할이 바람이며 파도다. 수만 년간 바람과 파도에 깎이고 쌓여 여느 곳에서는 보기 힘든 해식애와 파식대, sea arch 등이 어우러져 리아스식 해안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다. 익히 잘 알고 있는 동백꽃과 해국, 원추리, 나리꽃을 비롯해 풍란, 갯까치수영, 갯무, 갯고들빼기 등과 같이 해안지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식생이 분포한다.


녹산등대에서 바라본 동도와 서도 사이 녹문 해협과 거문대교


서도 이끼미 해변의 노을


2. 거문도의 시간을 걷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테니스장과 당구장이 거문도에 있었다고 하면 의아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문도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충분히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거문도’라는 이름을 접한 것은 중학교 역사시간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군이 무단으로 거문도를 점령한, 일명 ‘거문도 사건’이다. 지도와 함께 한 단락 정도로 간략히 치부하기에는 바다와 함께 쉼 없이 출렁였던 거문도와 거문도 사람들이 일구어 온 역사와 문화가 매우 흥미롭다. 일찍이 구실은 다르지만 서양 열강들이 거문도를 두고 각축을 벌인 데는 거문도가 갖고 있는 지리적 위치와 천혜의 항구로서의 지형적인 원인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일찍이 영국을 비롯해 러시아 함대와 미국 함대가 거문도를 기항하였으며 이후 익히 잘 알고 있는 영국군이 2년 남짓 한 기간동안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도 하였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후 세력이 강해진 일본이 한일병탄 전후를 기점으로 거문도를 전략적 요충지와 어업의 전진기지로 삼고 고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고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그 시절 ‘세계 속의 거문도’에는 영국군 묘지, 해저케이블 육양점, 적산가옥, 신사터 등이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다.


거문도의 이름 변천사를 보면 일렁이는 파도만큼 얼마나 역동적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고도(古島, 孤島), 서도(西島), 동도(東島) 세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거문도는 오래전에는 삼도로 불리었으며, 이 세 개의 섬이 바다 위의 아늑한 호수를 만들어 삼호(三湖), 삼주(三州), 석주락포(石洲樂圃) 등의 또 다른 이름을 갖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예초에 섬이 세 개여서 삼도로 불리다가 왜구와 같은 오랑캐들이 자주 침범해 왜도(倭島), 혹은 이섬(夷섬)이라고 했으며, 영국이 해양측량을 구실로 거문도에 왔다가 불리던 이름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함장 포트 해밀턴’의 이름을 딴 ‘해밀턴항’으로 서양에 소개되기도 했으며,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거문도에 왔을 때 필담을 나누고 난 뒤 귤은 김류와 만회 김양록과 같은 큰 문장가가 있어 클 거(巨) 글월 문(文) 자를 써서 巨文島로 불리기도 했으며, 혹자는 백도(白島)와 견주어 ‘검은 섬’으로 불리었으나 한자화 하는 과정에서 거문도(巨文島)로 표기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거문도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끈다.


거문도 등대에 오르면서 바라본 보로봉과 선바위
백도



3. 거문도사건(1885년)과 영국군


거문도가 서양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의 이름은 ‘Port Hamilton’으로 거문도사건이 일어나기 30년 전(1845년) 영국은 사마랑(Samarang) 함대의 에드워드 벌처 제독에게 거문도 조사를 명하고 이후 당시 해군성 장관 조지 해밀턴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으로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 조선 영토에 대한 외국 군대의 일방적인 첫 무단 순방의 가슴 아픈 기록인 것이다. 지금도 거문도에서는 해밀턴이란 이름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의 거문도 무단 점령 사건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려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구실로 당시 거문도는 군사전략상 중요한 요지에 위치하고 있어 영국이 무단으로 점령하기 전 러시아(1857년)와 미국(1884년)의 함대도 각각의 구실로 기항한 적이 있었다. 모두들 세 개의 섬이 병풍처럼 내해를 이루고 있어 천혜의 항구로서 거문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영국 해군은 거문도를 ‘동부 아시아의 주요 전쟁터’로 칭했고, 미국은 ‘동쪽의 지브롤터’로 칭했을 정도로 거문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었다. 일본 또한 오래전부터 거문도 근해를 왕래하며 거문도의 항구로서 기능을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영국의 거문도 무단 점령이 끝나자 서도의 유림해변 근처에서 고도의 거문리로 옮겨 취락을 형성하고 그 이후 본격적으로 집단 이주하였다고 전해진다.


거문도 사건이 발생하기 전 영국과 러시아는 세계 곳곳에서 충돌을 빚는다. 특히 아프가니스탄의 조그만 오아시스 마을 소유권을 둘러싸고 충돌이 벌어져 영국군이 강군으로 육성한 아프가니스탄 군대가 러시아군에 의해 전멸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내 여론을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기 위한 첫 시도로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거문도를 점령한 것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한 이후 군대 막사, 우물파기, 포대 설치와 병원 건설에 착수했으며, 거문도와 중국의 상해간 통신선 설치까지 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거문도와 홍콩까지 통신을 연결하였다. 이러한 작업에 동도와 서도 주민들이 작업에 동원되었으며, 춘궁기를 맞은 주민들은 임금과 음식을 받을 수 있어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영국 측의 건설작업에 협력했다고 전해진다. 거문도를 무단 점령한 후 약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거문도 주민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다양한 신문물들을 접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테니스와 당구로 우리나라 최초로 거문도에 테니스장과 당구장이 생긴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비스킷, 과자, 통조림, 생필품 등이 전해졌고 전기도 서울보다 2년 먼저 설치되었다고 전해진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머물던 영국군이 떠나고 지금은 영국군의 수병이 묻혀있는 묘지와 홍콩과 상해와 연결했던 해저케이블 육양점만이 흔적으로 남아있다.

고도에 있는 영국군 묘지


4. 거문도의 일본인 이야기


거문도의 뱃길은 오래전부터 일본인들이 자주 왕래하며 조업과 무역을 하던 길이었으나 왜구에 의해 약탈, 노략질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거문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까지의 거리는 규슈로 161km에 불과하다. 거문도가 속해있는 삼산면의 초도와 손죽도의 역사를 살펴봐도 왜구들의 출몰이 빈번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문도가 일본인들에 주목받게 된 것은 이 주변 해역이 황금어장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일본인들의 조업이 잦아지자 조선 세종 때에는 일본 어선의 정박지를 3포(부산포, 제포, 염포)로 제한하고 왜관을 설치해 일본인들이 장기 이주하도록 했다. 그러나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 규모가 늘어나고 불법 체류자가 늘어나자 고초도(거문도)조어금약을 체결하여 무단 조업을 금지하고 세금(잡은 고기의 일부를 세금으로 냄)을 거두기도 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항거왜인(삼포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삼포의 난 이후 거문도 근처의 조업은 금지되었다.


운요호 사건을 구실로 맺어진 강화도조약(1876년) 이후 일본 어선들의 조선 근해 조업이 잦았고 거문도 무단 점령 이후 1887년 영국군들이 철수하자 고도에 마을을 형성한 것은 일본 사람들로 이미 서도의 유림해수욕장 부근에 유곽을 운영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되고 일본인들이 본격적으로 거문도 이주가 늘어나게 되었다. 일본인 이주자가 증가함으로써 무인도였던 고도를 거문리라 부르고 서도 장촌마을에 있던 면사무소를 고도로 옮겨 행정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후 거문도우편소, 거문도순사주재소를 설치하여 마을의 규모가 점차 커져가 1914년 15호 47명이던 일본인들은 1923년 98호 360명, 1942년 87호 347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때 형성된 고도의 마을 형태는 지금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으며 골목골목 일본인들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5. 마치며

여수에서 출발한 배가 고흥 외나로도를 거쳐 손죽도, 초도를 지나 거문도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서도 녹산곶 끝에 서 있는 녹산등대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거문도 등대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여행자를 반긴다. 거문도 등대길이 바닷바람과 파도에 깎이고 패인 바위 위를 걷듯 거친 남자의 속내를 닮았다면 녹산등대길은 바람에 나부끼는 여인의 머릿결처럼 고운 풀숲 사이를 걷는 여인의 길이다. 녹문에 부는 바람에 풀이 이리저리 눕는 풍경이 마치 이국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거문도에 가게 되거든 꼭 녹산등대길을 걸으라고 말하고 싶다.

20180426_144625.jpg 녹산등대에서 바라본 거문도 전경


참고문헌 : 여수시사, 삼산면지, 한국 거문도의 일본마을, 거문도와 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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