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뢸러 뮐러 - 빈센트 반 고흐의 영혼이 숨 쉬는 곳
아른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시차 탓에 이른 아침을 깨웠지만 몸은 그다지 피곤치 않았다. 크뢸러 뮐러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여행의 시작을 그곳으로 정한 이유가 있었다. 불꽃같던 그의 삶의 기억이 머물러 있는 그곳에 한시라도 빨리 닿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그의 영혼이 잠자고 있는 조용한 숲 속의 미술관, 크뢸러 뮐러에.
https://krollermuller.nl/visit
암스테르담에서 한 시간 기차를 타고 아른헴에서 내려, 또 버스로 갈아타 겨우 도달한 오텔로 센트럴. 가는 길이 다소 불편해 조금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정 내내 왠지 모를 차분함을 갖게 되는 건 조용한 시골의 아침이 주는 평화 때문이었다. 버스 창가로 스쳐 지나던 고즈넉한 풍광이 네덜란드의 한 국립공원을 걷는 나를 조용히 미술관으로 안내했다.
안톤 크뢸러와 헬렌 뮐러 부부가 생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덕에 고흐의 유화 90점, 드로잉 170여 점들이 소중하게 이곳에 간직될 수 있었다. 철강회사를 운영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의 재력도 세계 대공황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소장품들을 팔지 않았고 차라리 모든 것을 정부에 기증하고 전용 미술관을 대신 세워줄 것을 건의하는 방법을 택한다. 우여곡절 끝에 1938년 정부 주도하에 이곳에 미술관이 세워졌고, 이들 부부의 공로를 인정하여 이들의 이름을 딴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세워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반 고흐 갤러리로 들어서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의 두 장의 스케치였다. 갓난아이를 안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 아마도 고흐가 짧은 기간 동거를 했던 <시앵>이라 불리던 매춘부였을 것이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완연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된 여인에게도 모정은 살아있었다. 자신의 아이를 바라보는 그 수심 어린 시선은 세상의 어떤 엄마와도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을 드로잉으로 담던 고흐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아이 엄마에 대한 연민? 이들의 생계를 책임져주지 못하는 미안함? 이 불완전한 가정을 연명하기 위해 또 몸을 팔러 거리로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모며 고흐는 또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리면서 가졌던 고호의 사람들의 시선은 특별하다. 비록 이 그림이 여러 버전으로 그려진 것들 중 하나이고,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뮤지엄의 그것보다는 크기도 작고 덜 정교하지만, 이 그림에 대한 그의 의도는 살아있었다. 수고로움으로 땅을 경작하던 그 흙뭍힌 손으로 감자를 쪄 먹는 농부들의 모습. 그들의 고된 일상과 인생을 한 폭에 표현하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이 그림에도 온전히 담겨 있었다.
풍차가 인상적인 풍경화는 바로 <몽마르트르>. 이 몽마르트르 언덕은 고흐가 파리에 도착한 직후 그려졌다. 당시에도 몽마르트르는 지금처럼 많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사랑받는 장소였다. 풍차와 아름다운 정원으로 꾸며진 이 언덕을 화폭에 담는 것을 고흐가 놓칠 리가 없었다. 지금은 파리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밤낮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몽마르트르는 그림의 모습과 많이 다르지만, 오늘도 이름 모를 화가들은 이곳을 화폭에 담고 있었고, 이는 영락없이 고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해바라기는 고흐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린 정물이다. 반 고흐 뮤지엄과 내셔널 갤러리에 있을 해바라기와는 무언가 다르다. 이곳의 <네 송이의 해바라기>는 화분에 담겨있지 않고 가지가 잘려있었다. 고흐의 정물이 되기 위해 고흐의 아틀리에로 공수되어 온 네 송이의 해바라기는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었지만 고호의 그림 속에서 시들지 않고 영원히 살고 있었다.
<아를의 다리> 풍경은 고흐가 프랑스 남부 아를에서 보낸 시절에 그렸던 초창기 걸작 중 하나이다. 그가 아를의 푸른 하늘과 태양빛을 받는 노란 벽돌을 그려내며 이전에 미처 보지 못한 색감에 자신도 놀랐을 것이다. 네덜란드 시절의 우중충한 색감에서 탈피하였고, 밝은 색감에 눈을 뜬 그의 팔레트는 온갖 황금색의 햇빛으로 빛나고 있었을 것이다.
아를에선 평온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과일나무들이 개화하는 시기에 맞춰 몇몇 꽃이 만개한 나무들을 연작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핑크빛 복숭아나무>는 그중 하나로, 파리 시절에 일본풍 그림 우키요에에 받은 영향이 살짝 드러난다. 나무의 경계를 짙은 테두리로 감아올리는 모습이 그것. 파란 하늘에 흰구름을 덧칠하고 나뭇가지 사이에 핀 꽃을 희고 붉은빛 물감을 붓으로 찍어 올려 표현하였다. 그 두터운 질감이 그대로 살아나 흐드러지게 핀 꽃의 느낌이 더욱 살아 있었다.
정신착란 증세가 심해지자 스스로 입원한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도, 마음의 안정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떠오르는 해와 밀밭>은 병실 창가를 통해 바라본 어느 날 아침의 풍경이다.
"금속 창틀로 된 창을 통해 내가 바라본 풍경은, 담을 둘러싼 밀밭과 이를 환하게 비추며 떠오르는 태양의 장관이었다"
그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묘사한 그 장면이다. 그림의 3/4 이상을 밀밭에 할애했고, 초록과 노랑 밀밭에 붉고 하얀 꽃들이 피어난 모습에서, 아직까지 희망의 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고흐의 모습이 투영된다.
<밤의 카페테라스>는 이 미술관을 찾은 대부분의 관람객의 목적이며 대상인 그림이었을 것이다. 이곳에 온 많은 이들이 암스테르담에서 이른 아침을 깨우며 불편한 교통편을 갈아타고 이곳에 도착했을 터. 이 그림 하나로 그 모든 수고로움을 보상받는다. 아른헴행 기차 안에서 내내 생각한 것은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어떤 느낌일까'였다. 심장이 멎고 호흡이 사라지는 전율일까. 의식혼란과 환각을 동반하는 스탕달 신드롬일까. 그러한 의문점을 꾹꾹 누르고 풍경화를 돌아 이 그림 앞에 섰을 때 의외로 나의 가슴은 담담했다. '아-' 짧은 외마디 단말마만 뒤따랐을 뿐.
그저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푸른 밤하늘에 아스라이 빛나는 별빛. 테라스를 노랗게 환히 밝히는 가스등. 아를의 밤을 한가로이 보내는 사람들. 가스등의 노란 조명과 어두운 밤하늘의 극단적인 대비가 묘한 조화를 이루지만, 한편으로는 점점 현실과 유리되어 가는 고흐의 내면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테라스의 지붕과 짙푸른 밤하늘에 꾹꾹 눌러한 덧칠이 마치 그를 짓누르던 마음의 무게 같았다. 그리고, 그 붓 자국에서 조금씩 배어나는 것은 까닭모를 슬픔이었다.
그가 세 들어 살던 아를의 한 카페에서 고호의 눈에 담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상과의 단절로 외로움과 슬픔에 조금씩 메말라가는 그 영혼과 육신에 저 하늘에 반짝이던 별빛이 잠시나마 비추어 주었기를 빌어보았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린 2년 후 그 별들 중의 하나가 된다. 그중 가장 빛나는 별이.
고흐의 그림을 만나면 무언가 해답을 얻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 마음은 더욱 복잡했다. 그의 숨결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지만 그의 유산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미 늦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영혼에 안식과 평안이 있길.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내내 들었던 바람이었다.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