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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Oct 13. 2015

고흐의 시선이 머물던 곳

반 고흐 미술관 - 그의 삶을 따라가는 한 시간의 여정

반 고흐 미술관. 이곳을 거치지 않는 암스테르담 여행자가 있을까. 미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미술관 이름에 붙은 '반 고흐'라는 이름만으로 이곳을 찾는 이유가 된다. 인생의 모든 것을 예술에 바쳤던 그의 삶이 너무나도 격정적이어서, 이생을 살아가는 누구나라도 한 번쯤은 그를 돌아보게 하니까. 반 고흐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어서 그의 대부분의 대표작들을 만나 볼 수 있고 더불어 그의 인생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연간 15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관중 하나이다.


이렇게 그의 유산이  세계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한편으로 대비되는 것은 그의 불우했던 생전의 모습이다. 거절감과 상처뿐이었던 마음,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던 삶. 마음의 아려온다.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이곳을 찾은 많은 후손들의 마음에 등불을 켜주고 있는 것을, 하늘에 있는 고흐가 알고 있을까.


반 고흐 미술관까지의 동선을 크뢸러 뮐러의 연장선에 두었다. 크뢸러 뮐러에서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그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가깝게 보기 위해서였다. 전날 보았던 '밤의 카페테라스'의 강렬한 노란 색감이 아직까지 내 시야에 아득했고, 그 밤하늘의 별빛이 내 마음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칫 미술관 입장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는 가이드북의 설명을 잊지 않았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고, 개장시간 보다 일찍 도착한 보람은 있었다. 생각보다 한산했고, 크뢸러 뮐러에서 구매한 네덜란드 뮤지엄 카드 덕분에 별 기다리는 수고 없이 입장할 수 있었다.


생각 보다 한산했던 반 고흐 미술관 입구. (c) 예나빠, 2014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은 그의 죽음 이후 동생이었던 테오, 그의 아내였던 요한나 봉헤르를 거쳐 그들의 아들인 빈센트 빌렘 (테오 부부는 아들의 이름을 고흐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에게로 상속된다. 그리고, 요한나 봉헤르나 빈센트 빌렘의 노력으로 고흐의 작품이 크고 작은 유럽 도시들에서의 순회전을 거치면서 그의 미술세계가 조금씩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후 반 고흐의 유작을 모두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에 영구 대여하게 되었고, 점차 고흐의 작품이 인기를 얻고, 관람객들이 밀려들자 네덜란드 정부는 좀 더 쾌적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건축회사 '그레이너 에 반 호르 아키텍트'에 미술관 설계를 의뢰하여 1963년 '반 고흐 뮤지엄'가 탄생하게 된다.


미술관을 들어섰을 때 나를 처음 맞이하는 것은 그의 많은 얼굴들이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최근에 전시 방식을 조금 바꾸었다고 한다. 과거에는 층별로 단순히 시간순으로 작품을 배치했는데 반해, 변경된 방식은 지상층에 자화상을 모두 모아 별도 전시하고, 각 층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작을 중심으로 배치하도록 했다. 덕분에, 미술관 입구를 들어온 관람객은 시간대별로 변화하는 그의 표정과 시선들과 정식으로 눈을 맞추면서 관람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반 고흐 미술관 그라운드층에 전시 중인 고흐 자화상 모음전. (사진 출처: http://www.telegraph.co.uk/)


미술관은 촬영이 금지되어 있어 사진으로 남길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그 덕분에 관람에 더욱 몰입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갖게 되었다. 하긴, 그의 위대한 유산을 저급한 카메라로 갈무리하는 것은 뭔가 겸언쩍고 미안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온라인 컬렉션 (http://www.vangoghmuseum.nl) 이 고해상도 이미지로 잘 정비되어 있어 감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데 충분한 도움을 준다.


검은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6)

반 고흐는 남들과 소통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 익숙했고, 그만큼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물론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서 이기도 했지만. 검은 펠트 모자와 준정장 차림으로 깔끔하게 갖춰 입은 자신의 모습이 담긴 이 그림은, 파리로 이주한 직후 그린 것이다. 은둔자로 지내던 네덜란드의 삶을 접고, 파리에 온후 도시생활에 익숙해지고자 했던 노력은 의복과 외모에 신경을 쓰는 것이었다. 색채의 마법을 익히기 전 시절이라, 고흐 특유의 화려한 색감은 없지만 정면을 응시하는 예의 그 눈빛만은 정확히 살아있었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은 가장 극적인 고흐의 얼굴이었다. 색채의 흐름을 짧게 끊은 선들로 표현한 방식은, 화실에서 만나 교류하던 '폴 시냐크'의 점묘법에 영향을 받은 것. 고흐는 이를 점이 아니라 선으로 발전시켜 더욱더 생생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회오리치듯 돌아 나오는 푸른 색선들은 배경을 지나 갈색 재킷 위로 넘실대고, 노란색에 기저를 둔 다양한 붓터치가 얼굴 중심으로부터 바깥쪽으로 휘몰아쳐서, 마치 캔버스를 뚫고 나올 것 같은 속도감을 느끼게 한다.


이 그림을 근접해서 보았다. 전체를 보았을 때와 또 다른 느낌. 얼굴 주변으로 덧칠된 색선들이 화이트, 옐로, 브라운, 스카이 블루, 다크 그린, 그레이 등 생각보다 훨씬 많은 색으로 표현된 것이 신비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지쳐 버린>, 1882년 11월, 종이에 연필, 50.4cm x 31.6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다 타 버린 벽난로는 잿더미뿐이다. 새로운 장작을 살 돈이 없는 걸까. 옆에 앉아 움켜쥔 두 주먹 사이로 머리를 떨군 이 노인을 보고 있노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일  수밖에 없는, 한 노인의 고단함 삶이 가슴 아프게 전해져 온다. 해어진 옷과 구두가 왠지 이 노인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고, 얼마 남지 않은 머리숱은 왜 이리 슬프게 보이는지.


1890년 자신이 죽던 해, 고흐는 이 노인을 채색하여 또 다른 그림으로 남긴다. <슬픈 노인>이라는 제목으로. 8년간의 세월처럼 노인도 더욱 마르고 늙어 버린 모습이었다. 곧 영원의 문턱을 넘을 고흐가 그림 속의 지치고 슬픈 영혼을 바로 자신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처연한 그의 삶이, 잴 수 없는 깊이의 먹먹함으로 다가오게 만드는 그림이었다.


<슬픈 노인(영원의 문턱)> 1890년, 캔버스에 유채, 80 x64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캔버스에 유채, 81cm x 114cm,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미술관 2층을 들어서자마자 이 그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명성답게 관람객을 가장 많이 불러 모으는 작품이었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대표작을 꼽을 때 빠질 수 없는 그림이다. 화가로써의 경력을 막 시작하던 초창기, 많은 열정을 쏟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크뢸러 뮐러에서 이 그림의 습작을 본 터라, 제대로 된 완성작을 보고 싶었는데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전체적으로 왠지 투박한 느낌이지만, 가까이서 부분 부분을 살펴보면 꽤 정교한, 수고와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어두운 방안, 작은 등불 아래 모인 일가족이 수고로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끼니를 때우려 감자를 쪄먹는 모습이 참으로 특별하다. 팍팍한 살림살이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이들의 표정에서 슬픔은 보이지 않는다. 무뚝뚝해 보이지만 가족을 위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하던 아빠나,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많이 들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자상한 엄마. 덕분에 이 가족은 행복하다. 밭일로 거칠어진 아빠의 투박한 손이 그래서 이 그림을 더욱 특별하게 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 크뢸러 뮐러 미술관. 2014, 예나빠



<펼쳐진 성경, 불이 꺼진 초, 소설책이 있는 정물>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유채, 65 x 78cm, 반 고흐 미술관


고흐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커다란 산과 같았다. 오르기 힘든 높은 권위의 상징과 같은 존재였다. 고흐는 부친에게 인정받고 싶어 적성에 맞지 않는 신학대학을 다니기도 했고, 이도 여의치 않게 되자 화가로써 성공하여 떳떳해지고 싶었다. 불행하게도 이런 바램이 실현되는 것보다 부친의 죽음이 먼저 그를 찾아왔다. 인정 욕구와 내면적 갈등의 대상이었던 부친이 죽자, 설명할 수 없고 해소되지 않는 감정에 사로잡혀 이 그림을 며칠 만에 그려 내렸다.


불 꺼진 촛불은 한순간에 사라진 권위를 상징하고,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책의 대비가 부자관계의 반목을 암시한다지만, 정작 고흐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부친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을까. 이 그림에서 느껴진 것은, 거인과 같았던 아버지도 결국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메멘토 모리’의 메시지가 아니라, “잘했다, 우리 아들”이라는 따듯한 말 한번 듣고 싶었던, 부정(父情)에 대한 간절함이었다.


그래서, 한 번도 ‘아버지’가 되어보지 못했던 고흐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 그림이었다.



<구두>, 빈센트 반 고흐, 파리, 1886, 캔버스에 오일, 37.5 x 45cm, 반 고흐 미술관


고흐를 알고 지내던 파리의 한 화가는 이렇게 회상한다. 


“고흐는 벼룩시장에서 왠지 투박하고 큰 중고 구두를 한 켤레 샀어요. 행상들이 신을 법한 신발이었죠. 하지만,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답니다. 고흐는 어느 비 오는 날 이 신발을 신고 이 오래된 도시를 여기저기를 걸었습니다. 신발은 곧 진흙으로 더러워졌고, 더러워진 신발이 한순간 고흐에게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고흐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흔하지 않은 정물 중 하나가 '신발’이다. 가장 낮은 곳에 존재하기에 미천해 보이기까지 하는 ‘발’을 품어주는 신발. 낡고 헤어진 구두를 화폭에 담은 고흐는 이를 통해 노동자의 고된 삶을 은유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신성한 노동의 세계가 담긴 도구’라 말한, 하이데거 선생의 거룩한 표현을 빌지 않아도, 신발 주인의 (아마도 고흐) 고된 발걸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몽마르트르 중턱에서 풍차가 있는 언덕 풍경을 열정적으로 그리던 고흐는 해가지면 이젤을 접고 언덕길을 터벅터벅 걸어 내려와 동생 테오의 집으로 향했다. 새로운 화가들과 어울리고 싶어 화실을 드나들었고, 틈만 나면 그에게 영감을 주던,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보러 다녔다. 오래된 도시의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며 조금씩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던 고흐의 발에는 언제나 이 낡고 해어진 신발이 함께 있었다.


<몽마르트르 언덕> 파리, 1886,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오일, 56.3 x 62.6 cm, 반 고흐 미술관

화창한 날이면 고흐가 자주 오르던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물감 묻은 빵조각을 씹으며 이젤 앞에서 열심히 붓질을 하던 이 가난한 화가에게, 비록 삶은 고단하였지만, 이 그림만큼은 참으로 평화롭고 서정적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바라본 파리 (c) 예나빠 2012


<아스니에르의 봐이예 다르장송 공원>, 빈센트 반 고흐, 파리, 1887, 캔버스에 오일, 75 x 113 cm, 반 고흐 미술관

파리의 풍경을 눈에 그리고 화폭에 담으면서, 고흐는 가끔씩 몽마르트르의 한 카페에 들르곤 했다. 처지가 비슷한 몇몇 화가들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신들의 미술세계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중 폴 시냐크라는 화가가 흥미로운 이론을 설파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그림은 점으로 그릴 수 있다네, 왜냐하면 공기 중의 빛도 따지고 보면 아주 작은 입자로 되어 있거든.."


평소에 고집 세기로 유명했던 고흐도 시냐크의 열정에 차츰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냐크의 '점묘법'은 고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곧 자신의 그림에도 적용해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남의 이론을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은 왠지 탐탁지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은 것. 여기에 자신만의 특징을 부여하고 싶었다.


'빛이 꼭 점으로만 표현되어야 할까? 점을 연장하여 짧은 선으로 표현하면 뭔가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고흐는 다음 그림엔 꼭 이 방법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마침, 다음 그림으로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스니에르 공원의 풍경이었다. 그 시절 고흐는 몽마르트르의 카페에 드나들면서, 카페 여주인에게 잠시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상처와 고독으로 점철된 영혼인 고흐에게 위안이 되어 주던 여인.


그래서였을까, 고흐는 시냐크가 가르쳐준 방법으로 그린 이 그림에서, 연애 중인 세 커플을 등장시킨다. 고흐답지 않은 주제였다. 짧은 사랑 중이던 고흐의 마음에도 완연히 봄이 무르익었던 것이다. 열정적인 빨강과 초록으로 그려진 이 그림 속 여인의 옷처럼.



<탕부랭 카페의 탁자에 앉아 있는 여인>, 파리, 1887,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오일, 55.5 x 46.5 cm, 반 고흐 미술관


카페 <탕부렝>의 여주인이었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는 최근 신경 쓰이는 남자 손님이 생겼다. 그는 가끔씩 혼자 와서 식사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동료 화가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러 오기도 했다. 몽마르트르 골목에서 언제라도 볼 수 있을 법한 남루한 행색의 화가였지만, 왠지 분위기가 남들과 달랐다. 혼자 오는 날이면 무언가 열심히 스케치를 하기도 하고, 어느 날엔 혼자 압생트를 마시며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곤 했다.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조금 늦은 시간 카페를 찾은 그가 평소와 다르게 아고스티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조금은 머뭇거리면서.


"저기.. 혹시, 잠시 모델이 되어 줄 수 없나요?... 왠지 이 카페와 당신 분위기가 묘하게 어울리셔서...."


사실 아고스티나는 이미 파리에서 모델로 어느 정도 알려져 있던 여자였다. 언제나 예술가들로 북적이는 몽마르트르에서 많은 화가들이 그녀를 화폭에 담곤 했기에, 그녀에게 이런 제안은 크게 새로운 일도 아니었다. 아고스티나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전 좀 비싼데, 괜찮으시겠어요?"


"아, 그런가요.. 얼마나..."


"풉. 농담이에요.. 저희 단골이신데 공짜로 해 드릴게요. 대신 예쁘게 그려주세요. 

예전에 마네라는 화가에게도 한번 모델을 해줬는데 완전히 아줌마처럼 그려놔서 얼마나 마음 상했는지,  그다음부터는 그 양반 아는 척도 안 해요."


“아, 네... 최선을 다해보죠. 하하”


아고스티나는 흔쾌히 이 남자의 요청에 대답해 주었다. 사실 그녀가 파리에 정착하면서 스쳐 지나듯 몇몇 화가들과 사랑에 빠졌었지만 끝은 그다지 좋지만은 않았다. 그 후로 다시는 화가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이 남자의 부탁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그의 쓸쓸한 모습만 보아와서였을까.


그렇게 테이블에 앉아 남자의 요구대로 포즈를 취해주었습다.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우며, 요구대로 최대한 고독을 연기해 주었다. 그는 그녀를 정성껏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하얀 스케치 북위에 또 다른 그녀가 조금씩 나타났다. 스케치하는 시간이 길어져 그녀가 틈틈이 마시던 맥주는 어느새 두 잔이 되었다. 그녀와 가끔씩 눈이 마주치면 남자는 어색한 웃음을 짓곤 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게 되는 짧은 사랑의.



<사과가 있는 정물> 1887-1888, 파리,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오일, 46 x 61.5 cm, 반 고흐 미술관

파리에서 여름을 나던 고흐는 더 이상 모델에게 지불할 돈이 없어,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포기한다. 대신 다양한 정물을 통해 색채의 신비함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유화로 채색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다양한 색깔의 꽃과 과일을 그렸다. 빨간 양귀비, 파란 수레국화와 물망초, 하얗고 분홍색의 장미, 노란 국화와 같은 다양한 꽃들과 청포도, 배, 사과, 레몬 등의 과일을 통해 생명이 깃든 색채를 캔버스에서 실현시키는 것을 시험했다. 파란색과 오렌지, 빨강과 초록, 노랑과 보라의 대립이 주는 시각적인 강렬함을 통해 고흐의 그림은 점차 생명력을 얻어가고 있었다.


고흐의 사과를 처음 본 순간, 내게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조명과 동화된 사과의, 그리고 바닥에 반사된 사과의 빛깔이 현실적이지 않지만 오히려 현실적이었다. 초록과 빨강의 대비가 특유의 거친 질감에 덧입혀져, 사과를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였다. 그림은 흐르는 세월을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지만, 고흐가 불어넣은 생명은 꺼지지 않고 오랫동안 생기를 머금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꽃이 핀 자두나무>, 빈센트 반 고흐, 캔버스에 오일, 73 x 54 cm (상), <오이렌>, 105.5 x 60.5 cm (하), 반 고흐 미술관


어느 날 한 화랑에서 본 이국적인 그림 한 편이 고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색채도 단조롭고 음영도 거의 없는 심심한 그림이었지만, 그 작은 화폭 안의 세상은 지금까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정물을 치열하게 그려왔지만, 자신이 그렇게 쌓아 올린 미술과 완벽하게 다른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자 이전에 없던 시각적인 욕망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고흐는 미술상을 통해 유키요에(浮世繪)라 불리는 이 그림들을 닥치는 대로 사 모았고 (다행히 가격은 저렴했다), 무작정 작업실에 걸어두고 하루 종일 감상하곤 했다. 결국, 그는 자신이 그리는 몇 편의 그림에서 이 새롭고 신비로운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고흐에게 어쩌면, 동양의 한 작은 섬나라에서 건너온 그림들을 통해, 이국에 대한 동경이 시작되지 않았을까. 서툰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와 예술이 넘쳐나는 도시에 대한 염증은, 고흐의 마음을 또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고 있었다.


새로운 빛과 색이 있는 곳으로.


고흐의 작품과 결합된 비디오 아트가, 층간을 이동하는 관람객의 시선을 더욱 즐겁게 합니다.




안내에 따라 반 고흐 미술관의 1층, 2층을 산책하듯 걷다 보면 고흐의 여정을 함께 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파리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색을 찾아 떠났던 그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동선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을 지금도 많은 이들이 뒤따라 함께 걷고 있었다.


나의 발걸음은 이제, 격정의 서클, 휘몰아치는 사이플러스, 그리고 삶과 죽음의 밀밭이 있는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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