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리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택도 없는 소리입니다. 한국보다 더하면 더했지 이곳도 사교육 공화국이죠. 미국 입시제도에 맞춰진 또 다른 형태의 사교육 시장이 있을 뿐입니다. 자녀들이 선진국에 걸맞은 전인교육을 받고 원하는 대학도 잘 갈 수 있어, 사교육 없는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순진하게 미국으로 건너온 저 같은 부모는 그래서 멘붕에 빠집니다.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아빠의 무관심'이 아이들 입시에 필수조건 중 하나라고, 애들 교육에 감나라 대추나라 간섭하는 것보다는 엄마가 알아서 하도록 방관(?)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했지요. 그래서인지, 미국에 와서도 아이들 교육은 주로 아내에게 맡겨두고 있는데, 올해부터 아이를 미국의 학교에 보내면서 아무래도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군요. 아내가 자신과 주변 지인들의 무용담을 남편에게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사정을 접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엄마들이 모이면 대화 주제 1순위는 아이들 교육문제이겠지요. 미국에 온 한국 아빠들도 자녀교육에 쏟는 관심은 그래서 이에 못지않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매체와 지인들을 통해 한국의 사교육 문화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지인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해야 하는 아이들이 안타깝지만 한 목소리로 어쩔 수 없다고들 하더군요. 안 하면 자신의 아이만 뒤 쳐질 것 같은 불안감에 과외를 시키거나 학원으로 내보내고 있답니다. 심지어 학원을 안보내면 자녀에게 친구가 안 생긴다고, 자녀의 사회성을 위해서라도 시켜야 한다는군요. 일종의 부작용이면 부작용인데, 한국이 워낙 불확실성이 높아서 그런지, 아이들이 졸업 후 사회에서 대접받으려면, 일단 좋은 학교를 나오고 봐야 한다는 심리가 강해서 그런가 봅니다. 다 부모가 사회에서 겪은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사정이 이러니 선거철만 되면 대선주자들이 사교육을 포함한 각종 교육정책을 내놓습니다. 제대로 지켜진 것은 없지만.
그래서, 저는 미국에 건너오면서 이제 '자녀들을 사교육으로 내모는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건 엄청난 착각.
일단, 공교육을 받기 전의 2-5세의 미취학 아동은, 우리나라로 치면 유치원 같은 프리스쿨(Preschool)을 다니게 됩니다. 학교를 들어가기 전까지 아이를 끼고 있을 수만 없잖아요. 아이들의 사회성 발달을 위해서, 육아의 수고를 덜기 위해서라도 보냅니다. 그런데, 이 프리스쿨은 사립으로만 운영되기 때문에 일단 학비가 비쌉니다. 자녀 한 명당 월 1,000~2000불 정도. 그럼에도 인기 있는 좋은 프리스쿨은 들어가기도 힘들어서 늘 대기자 명단은 꽉 찹니다.
프리스쿨을 졸업해 6세가 되면, 킨더(Kindergarten, 번역하면 유치원인데 한국 같은 유치원은 아니라 헷갈려요)라고 불리는 학교를 시작으로 제도권 교육을 받게 되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한 사교육을 병행하게 되죠. 학교를 마치면 소위 액티비티(Activity)라고 불리는, 한국의 방과 후 활동과 유사한 프로그램에 아이들을 돌립니다. 축구, 농구, 수영, 테니스, 골프, 펜싱, 체조, 발레, 댄스, 미술, 악기 등 주로 예체능이 주를 이루는데 특히 체육이 무척 중요하답니다.
체육 종목 하나는 확실히 할 줄 알아야 나중에 사람 구실(?) 제대로 한다는군요. 체대 보낼 것도 아닌데 왜 이러냐면, 바로 사교성, 책임감, 리더십을 중요시하는 미국 문화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양하고 원활한 교우관계를 쌓으려면 교내 동아리나 클럽활동을 활발히 해야 하는데, 운동을 잘하면 이에 무척 유리한 것이죠. 군대에서 축구 잘하는 후임이 이쁨 받듯이 말입니다. 지역에 운동 관련 클럽, 리그들도 정말 많이 발달되어 있죠 그래서 우리 아이가 공부만 잘하는 아웃사이더가 될까 봐 부모들은 아이들을 다양한 활동에 노출시켜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을 일찍부터 찾아주려 합니다.
또한, 이는 향후 미국 대학 입시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데, 우리나라의 수능과 같은 SAT/ACT 시험 점수뿐만 아니라, 체육/음악/봉사 액티비티 활동도 주요한 채점 포인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해봤다 수준이 아니라, 각종 대회 수상 등의 기록을 보유할 정도까지 돼야 한답니다. 대학 입시 사정관의 눈에 뜨일 정도가 되려면 중고등학교 때 시작해서는 이미 늦고, 초등학교 때부터 빨리 재능을 찾아 꾸준히 시켜줘야 하죠.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니 한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영어'사교육은 안 해도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텐데, 아뇨. 합니다. 해요. 다만, 영어 회화가 아니라 작문을 위해서 개인교사를 붙이죠. 이는 저희 같이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이민자들에 국한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 한국에서 말하는 논술, 소위 말하는 에세이를 써야 할 일이 많은데, 아무래도 원어민 가정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아이가 고급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는 것에 한계에 느끼죠. 미국인 가정에서는 아빠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특정 주제에 대해 함께 토론하며 자연스럽게 훈련시키곤 하는데, 가정에서 한국어를 주로 쓰는 부모 밑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결국, 에세이 때문에 또 개인 튜터를 붙입니다.
한국에서 또 많이 하는 '수학'. 당연히 여기서도 합니다, 캘리포니아 공교육이 부실하기도 하고, 태생적으로 수학 유전자가 흐를 것 같은 인도, 중국인 자녀들과 경쟁하려면, 그 부족함을 또 학원으로 매워야 하죠. 또한, 미국 교육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많은 과목이 우열반 제도로 되어 있어서, 아이들 수준에 받게 클래스가 각각 운영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가장 상실감을 많이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어제까지 함께 같은 반에서 공부하던 자기 베프가 어느 날 우등반으로 훌쩍 가게 되는 경우랍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부모는 또 속상하겠지요. 또 좋은 튜터를 알아봅니다.
그래서, 아이가 프리스쿨을 졸업해 공교육을 받기 시작하면 학비로 지출은 안 하겠지 싶겠지만, 웬걸 온갖 액티비티나 학원비로 결국 매달 그 이상의 지출이 발생합니다.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아이들 사교육으로 휘는 건 아빠의 허리. 이게 다 캘리포니아 공교육이 부실해서인데, 주정부가 거둬들인 세금을 어디에 쓰는 건지 공립학교로 돌아오는 재원은 빈약해서, 학교마다 예산이 부족해서 난리입니다. 실질적으로 학교 운영에 필요한 대부분의 자금은 학부모들의 기부금(Donation)에 기대고 있는 형편이죠. 수시로 기부해달라는 이메일이 옵니다. 박봉에 고생하시는 선생님들(방학 때는 무노동 무임금) 생각하면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미국의 기부문화가 잘 발달한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닌 듯하군요.
학교 평준화가 어느 정도 되어있는 한국과 다르게 (물론 좋은 학군이라는 것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미국의 이 부실한 초, 중, 고 공립학교들 사이에서도 평점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나마 좋은 학교들이 있는 학군에 사람들이 몰리고, 아울러 그 동네 집값도 나날이 올라가죠. 교육열이 있는 부모들은 주립대에 한 명이라도 많이 보낸 고등학교에 자녀를 보내고자 어떻게든 이런 동네에 입성합니다. 가진 예산이 부족하면 원하는 집 컨디션을 포기해서라도. 허름한 집에 살더라도 자녀는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부모의 눈물겨운 사투입니다.
두서없이 장황하게 썼는데, 결론은 미국이라고 사교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직간접적으로 겪은 바는 주로 한인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이고, 어쩌면 한국에서 건너온 많은 분들이 이런 문화에 일정 부분 기여한 바도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민자가 다른 나라의 문화에 적응하는 데는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요.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자란 이민 1세대 부모가 미국 교육 시스템에 자녀들을 적응시키는 데는 당연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미국 학교 경험치가 없는데 자녀를 어떻게 직접 가르치겠어요. 그래서, 결국 그 간극을 매우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을 것이고, 이 수요에 맞게 사교육에 대한 공급이 자연스레 발달했겠지요. 자연스러운 시장논리입니다.
요즘 아내와 아이들 교육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한말이 있습니다. 정말 우리 아이가 후일 공부를 잘 못하더라도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자. 설령 주립대 갈 실력이 안돼서 커뮤니티 칼리지를 보내더라도 아이가 스트레스 없이 행복하게 학창 시절을 보내도록 해주자라고요. 사교육을 피할 수 없어서 시켜야 한다면, 아이에게 있는 재능과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아주기 위함이고, 대입용 스펙을 쌓기 위해 억지로 시키지는 말자고도요. 미국까지 와서도 타이거 페어런팅(Tiger parenting, 아이를 쥐 잡듯 교육시키는 것)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나마, 미국 교육이 좋은 것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위한 다양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죠. 국영수를 못해도 다른 과목으로 자신의 재능을 키우며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마음을 이렇게 먹어도, 또 모릅니다. 막상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입시를 앞두게 되면 또 조급해져 돌변하게 될지. 하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저 아이들이 티 없이 밝게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공부에 재능을 보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지원해주고 말없이 응원해 것이 부모의 역할 아닐까 싶네요. 그동안 애들 대학 등록금이나 조금씩 저축할 뿐입니다 (지금 유치원 아이들이 대학 갈 때쯤이면 주립대 졸업시키는데 드는 비용이 30만 불이랍니다. 허허).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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