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면 x 프리미티브
컴퓨터 그래픽스 기술은 해마다 눈부시게 발전한다. 우리가 이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바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볼 때다. 당장 1995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와 2019년의 토이 스토리4의 품질을 비교해보라. 그동안 그래픽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리고 최근의 그래픽이 얼마나 실사와 가까워 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도 그래픽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의도적으로 사실성을 배제시키는 영역이 있는데 바로 '인물'이다. 등장인물의 얼굴만큼은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만화적으로 처리하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에 앞서, 또 다른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을 살펴보자. 2015년에 개봉한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은 꽤나 잘 만든 작품이다. 인간의 다섯 감정(기쁨, 슬픔, 분노, 미움, 두려움)을 의인화하는 발상이 신선하고, 그 감정 캐릭터들이 풀어나가는 이야기도 짜임새가 있어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덕분에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했고 이듬해 아카데미 수상까지 거머쥐게 되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다. 길을 잃은 두 주인공 '기쁨이'와 '슬픔이'가 목적지까지 빠르게 가기 위해 지름길을 택하게 된다. 입구의 경고판을 보고 잠시 망설였지만, 길에서 만난 친구 '빙봉'이 돈워리를 외치며 무작정 이끄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 순간 갑자기 세 친구들의 몸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처음엔 조잡한 3차원 모형처럼 단편화되더니, 이윽고 몸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급기야 몸이 2차원으로 납작해져 버리고, 마지막엔 그냥 하나의 도형으로 변해버리고 만다. 이 위험한 장소의 이름은 바로 "추상적 사고(abstract thought)"다.
영화 내용은 잠시 접고 그래픽스의 관점에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결국 3차원 모형을 반복적으로 단순화하면 최종적으로는 몇 개의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진 도형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도형조차 궁극적으로는 점과 선들로 또 분해가 된다. 역으로 생각하면 점(point), 선(line), 면(surface)은 3차원 그래픽스에서 어떤 형상(model, 모델)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기초적인 단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선면을 통칭해 그래픽스에서는 "프리미티브(primitive)"라고 부른다. 사전적인 정의로는 '원시적인'이라는 의미인데, 점선면이 가장 기초 단위임을 생각하면 꽤나 적절한 용어다. 자, 그럼 프리미티브의 속성을 한번 살펴보자. 위 그림처럼 두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또 몇 개의 선을 연결하면 다각형(그림에서는 사각형)이 된다. 이 다각형들을 잘 이어 붙이면 드디어 3차원 형상인 다면체가 된다. 결국 3차원 그래픽스는 이러한 프리미티브들을 잘 만들고 연결하여 원하는 형상을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 형상을 표현하는 데 있어 그래픽스에서는 계산의 편의를 위해 삼각형 또는 사각형 프리미티브를 많이 사용한다).
아래는 고양이 형상을 다각형들로 만든 여덟 가지 경우들을 보여준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 사용된 다각형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세히, 적으면 적을수록 형상이 대략적으로 표현된다. 그림에서 왼쪽으로 갈수록 고양이의 눈, 코, 입 등 특징들이 살아나는 등 형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만, 오른쪽으로 갈수록 점차 단순화되면서 더 이상 고양이임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추상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게임이나 VFX 영화 같은 그래픽스에서는 결과물의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서 다각형의 개수를 꾸준히 증가시켜 왔다. 최근 출시된 게임 엔진은 '백억 개'가 넘는 다각형을 사용해 장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아래 그림은 그 결과물로 촬영된 사진이 아니고 그래픽스로 그려진 영상이다. 그 사실성은 놀랍기 그지없다.
고양이 예에서 다각형의 수가 줄어들면 형상이 단순해지며(simplification), 형태가 추상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서두에서 살펴본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 방에 갇힌 캐릭터들이 점차 단순하게 변하는 것으로 "추상적 사고"를 묘사한 것은 그래서 꽤 직관적이다. 추상화(抽象化, abstraction)라는 것은 복잡한 문제에서 핵심만 간추리는 작업을 의미하는데, 점선면으로 회귀되는 3차원 캐릭터들의 모습이 이를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추상화란 여러분의 직장에서 상사에게 보고할 자료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기억하자. 핵심만 간단히).
그런데, 추상화라고 하니 같은 발음, 다른 의미의 단어 하나가 내 심상에 이미지를 떠올린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하고 난해한 그림 한 장. 추상화(抽象畫, abstract art)는 내게 언제나 그런 느낌이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무언가를 무작위로 그려 넣은 누군가가 관찰자로 하여금 '알아서 이해해봐'라는 듯 인식을 강제하는 느낌까지 든다. 추상화를 그린 화가는 정말 자신의 그림의 의미는 아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추상화(abstract art)를 추상화(abstraction)의 관점에서 바라보니 조금은 이해가 가능해진다. 바로 추상회화의 시작이 구체적인 장면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본질만 남기는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화가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이다. 그들이 활약하기 이전까지의 미술은 고전주의, 사실주의 시대를 통해 보이는 것을 충실히 그리는 것이 미덕이었다. 이 후 인상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야 조금씩 사물의 형태에서 벗어나 '빛'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를 발전시켜 그림에 자신만의 개성을 담기 원했던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an, 1872-1944)은 사물의 형태를 좀 더 벗어나 보겠다는 과감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기하학적인 요소(직선, 곡선, 도형) 만으로 그림을 그리겠다는 아주 독창적인 발상을 하게 되었고 고민과 사색을 거듭한 끝에 우리에게도 이미 친숙한 <구성> 연작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
<구성>에서 캔버스에 그려진 것은 몇 개의 검은선과 원색으로 채워진 면일뿐이다. 몬드리안을 처음 접하는 관객들이라면 '나도 화가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줄만한 그림이다. 누구나 이 그림과 똑같이 그릴 수 있겠지만, 문제는 정작 우리는 이 그림을 그린 몬드리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몬드리안은 '대상을 추상화'시키는 무수한 실험을 거듭하고 거듭한 끝에 이 그림을 그려냈다. 그래서, 그는 작품 하나를 완성할 때 실제 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지라도, 구상을 위해 몇 달을 소비하곤 했다.
몬드리안의 <나무> 연작은 그가 <구성> 연작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정립하기 이 전에, 즉 '대상 추상화' 과정을 반복적으로 실험할 때, 그렸던 작품들이다. 아래에서 보듯이 그의 초기 그림에서는 대상의 형태는 남아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조형은 단순해지고 형태가 간략화되면서 결국 '대상과의 닮음'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완성한 것이다.
화가이자 학자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아예 점, 선, 면과 색상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점, 선, 면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을 토대로 그는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그림의 본질은 있는 대상이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화가 자신의 내면을 투영하는 것에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점, 선, 면만으로도 자신의 다양한 의도를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아예 '선'마저도 빼버린 즉 색과 면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에서는 애초 대상이 되는 사물은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나 이미지만 남는다. 로스코는 그림에 담는 것은 일종의 '감정'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가 경계와 묘사를 걷어내고 색으로만 표현한 그림은 관객에게 더 많은 울림을 전달한다.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영감을 주는 것은, 시각적으로 많은 것을 전달하는 구체성이 아니라,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가치에 있었던 것이다.
추상회화는 그래서 관객에게 새로운 형태에 대한 인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을 더 많이 담길 바라는 그림이다. ‘대상의 추상화’란 결국 본질만을 남기고 모두 비워버린 그릇과 같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은 그림은 대상과의 극단적인 닮음에 관객에게 '감탄'과 '놀라움'을 줄 수는 있겠지만,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담을 여지는 없애버린다. 그래서 그림이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관객에게 자리를 더 내어주어 보면 볼수록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제 서두에서 제기한 물음에 답이 되었을 것 같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 의도적으로 인물을 추상화시키는 이유는, 등장 인물에 대해 관객의 주관적 감성을 높여 공감을 갖게하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인물의 얼굴이 사실에 가까울 수록 '불쾌함의 계곡(uncanny valley)'의 문제도 발생하지만, 인물에 대한 관객의 감정을 담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3차원 게임의 경우도 유사한 이유로 결과물에 추상성을 높여 관객의 주관적 감성을 높이곤 한다. 이런 접근이 사용자에게 더 높은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하기 때문에 나이 어린 청소년들에게 더 높은 인기를 끈다. 게임 제작사가 실사 그래픽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추상 화가가 데생을 못해 추상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듯 말이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처럼, 점, 선, 면은 미술에서 조형, 즉 형태를 만드는 데 있어 기본적 요소중 하나이며, 그래픽스 분야에서는 형상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기하학적 프리미티브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선면"으로 출발한 형상을 개발하고 발달시키면 구체성이, 단순화시킬수록 추상성을 높이게 되는데, 추상성이 깊어질수록 관객의 주관적인 감성을 더 많이 불러일으키게 된다. 점선면에는 이렇듯 결국 인간의 감성으로 귀결되는 비밀이 담겨있다. 아마도 그것이 오랜 기간 칸딘스키가 탐구해왔던 그림의 본질이 아니었을까.
표지 이미지 출처: Lee Griggs@Autodes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