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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Nov 01. 2015

시뮬라크르와 가상현실

진중권 교수는  '이미지 인문학'을 통해,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로 인해 상상과 이성, 허구와 사실, 환상과 실재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새로운 인문학적 양태가 도래하였다고 설파한다. 이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이자,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대중의 인지적 특성이라는 것이다 [1].  


이러한 '가상'이라는 것은 SF영화에서 보던 '공상'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의 '가상'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에 깊숙이 침투해있다. 대중매체를 통해 양산되는 기사, 광고를 통해 생산되는 제품의 브랜드,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진 셀럽들의 이미지, 정치권에서 떠도는 루머, 매일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SNS 등.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비하는 대중의 취향에 맞춰 생산되고 복제되는 가상은 그리고 보면 꽤 오래전부터 우리와 함께 해왔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이미지' 즉 허구적인 '상(像)'은 많은 부분이 가상일 것이며, 또한 역으로 가상이었던 것이 현실이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다. 


이러한 가상과 현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30여 년 전 한 철학자에 의해 이뤄졌다. 프랑스의 대표적 사상가인 장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이다. 그가 집대성한 저서 '시뮬라시옹'에는 난해하고 복잡한 철학적 용어가 난무하는데 각설하고 핵심 정의만 추리자면, 시뮬라크르는 카피, 복제물인데 원본이 없거나 혹은 원본보다 더 실제 같은 복제물을 의미하며, 이러한 원본에서 파생되어 실제가 되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인 것이다 [2]. 앞서 말한 대로, 디지털 기술로 물리적 복제가 일반화되고, 만들어진 이미지가 범람하는 오늘날은 어쩌면 시뮬라크르의 시대라 불러도 틀리지 않다. 30여 년 전에 창안된 한 철학적 이론이 현재의 문화, 예술, 기술,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디지털 기술로 실현한 시뮬라크르 중 하나가 바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이 아닐까 싶다. 현실이 아니며, 현실로부터 파생된 세상.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며, 원본보다 더 실제 같은 속성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기술이 발전하면서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시뮬라크르가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왜일까? 어쩌면 우리는 '원본인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모르는 사이에 '복제된,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상'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 세상이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참고

[1] 이미지 인문학, 진중권, 2014, 천년의 상상

[2] 시뮬라시옹, 장 보드리야르, 2012,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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