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직 커리어 패스상 미국 이주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시점들
앞에서 두 번의 글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빠른 미국 이주에 대한 이점을 나눠보았다.
그 글을 쓴 이유는 기술/연구직 대학원생/직장인이 미국 이주를 결심했다면, 1년이라도 빨리 실행에 옮기라는 조언을 드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애 커리어 패스상 아무 때나 가능한 것이 아니고 이주를 시도할 수 있는 적기가 존재한다. 이는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신분 문제(비자, 영주권)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이주를 시도해 볼 수 있는 몇 가지 시점들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내가 미국에 오기까지 거쳐온 경로와 단계별 소요 시간을 간략히 정리한 타임라인은 다음과 같다.
타임라인을 그리고 보니, 미국까지 오는 데 있어 참 멀리도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장기 목표를 세워 체계적으로 다음 단계를 계획하지 않고 시류에 따라 움직인 결과다. 학부 시절엔 대학원에 갈 생각도 없었기에 군대 26개월을 그대로 다녀왔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시점에는 박사까지 할 생각도 없었다. 석사 졸업시점에 무엇에 홀린 듯 박사를 진학했다. 이른 시기부터 미래를 생각해 계획했다면, 단계별로 소요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방법(전문 연구요원, 석박 통합과정 등)들은 분명히 있었다. 물론 늦은 시점이라도 미국에 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만, 돌아보면 더 일찍, 체계적으로 준비했더라면, 시간도 절약하고 더 좋은 방법으로 미국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타임라인에서 가정법은 언제나 의미 없긴 하다을 기반으로 미국 이주 시점에 대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내 직간접적 경험에 의한 의견이며 일반화할 수 없다는 점도 먼저 말씀드린다.
한국에서 학사를 마치고 미국 실리콘 밸리의 회사로 직접 취업하는 경우다. 매우 매우 어렵다. 미국 회사에서 해외 학부 졸업생을 그것도 H1B 비자를 지원해주며 데려올 정도가 되려면, 학사 시절 'ACM 프로그래밍 경진대회 우승급' 스펙을 쌓아야 한다. 물론 세상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기에, 불가능은 없다. 이 경로를 성공하면 신문 지면에 기사로 장식될 정도다.
내가 학부를 졸업할 때 즈음, 친구 A는 졸업 후 미국(실리콘 밸리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취업에 성공했다. 학부시절부터 이미 Embedded System 관련 한국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로 프로그래밍 실무를 하던 친구였다. 그 친구는 회사를 통해 알게 된 인맥을 통해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학부시절 A와 같은 경력을 쌓을 수만 있다면, 극히 힘든 경로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학부 수업에 충실하는 것을 넘어, 오픈 소스 활동이나 글로벌 회사 인턴쉽 등, 미국 회사에서 인정될만한 단기 경력이 있다면 분명히 기회는 있을 것이다. 코로나 이후 재택근무가 보편화됨에 따라, 실리콘 밸리의 크고 작은 회사들이 인력 채용을 위해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의미 없는 가정법 #1.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23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며,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한국에서 학사 후 바로 미국으로 취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국 대학 석사를 디딤돌로 삼는 것이다. 2년간의 석사 학위기간 동안 영어 수준도 끌어올리고, 인맥도 쌓을 수 있다. 또한, 이력서에 미국 대학 학위를 포함시켜 지원하는 회사 HR에 자신의 가시성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취업 확률은 극적으로 올라간다.
유학기간 동안 F1 학생 비자로 체류하고, 취업 후엔 정식으로 H1B 비자로 전환해 직장에서 근무할 수 있다. 졸업 후 취업이 바로 되지 않더라도, OPT라 불리는 유예 기간이 있기 때문에, 짧으면 1년 길면 최대 3년(전공이 STEM 분야 인경우)까지 F1 비자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취업을 했더라도, 간혹 스타트업이나 작은 회사인 경우는 F1이 3년간 유예되는 점을 악용해, 직원의 H1B 비자 지원을 꺼리곤 하는데, 안정적인 근무 환경을 위해 필요하다며 적극적인 어필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실리콘 밸리의 큰 회사에서는 입사가 결정된 직원의 H1B 지원을 웬만하면 해결해준다.
석사 2년(빠르면 1년 반)의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여, 미국 취업의 확률은 극적으로 높일 수 있기 때문에 가장 보편적으로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의미 없는 가정법 #2.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21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다만, 유학 비용을 부모에게 지원받을 만한 금수저가 아니었던 관계로 실행 가능성은 아주 낮았을 것이다.
미국 석사 후 박사까지 학위과정을 이어가는 경우다.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녀본 적이 없어서 확실히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본인이 정말 연구를 계속하고 싶고, 향후 Research Scientist로 업계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겠다는 생각(과 그에 맞는 실적을 쌓을 자신)이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라 생각한다. 본인이 잘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결과가 가장 좋기 때문이다.
다만, 실리콘 밸리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 걸쳐, Research Scientist 직군은 일반 엔지니어보다 채용의 수가 그리 많지 않다. 통상 Research Scientist를 뽑는 곳은 국가 연구 기관이나, 몇몇 기업체 연구소 정도다. 정말 연구가 좋고, 졸업 후에도 이런 곳에서 연구원으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다면, 박사과정 중에 인정받을 만한 좋은 논문을 많이 쓰고, 업계 인사들과 인맥도 잘 쌓아야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박사 후에도 엔지니어 직군으로 취업을 많이 한다. 그런데, 엔지니어로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박사 경력이 있으면 나쁠 것까지는 없지만, 그리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인터뷰 시, 인터뷰어는 지원자가 박사 때 쓴 논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같은 기간 동안 엔지니어 직군에 필요한 스킬을 잘 쌓았는지만 본다. 어차피 엔지니어 커리어를 할 거라면, 석사만 마치고 일찍 취업하는 것이 기회비용 측면에서 훨씬 나은 길이다.
의미 없는 가정법 #3.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17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다만, 연구가 좋기는 하지만 박사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 같고, 설사 박사를 했더라도 졸업 후 Research Scientist로 커리어를 시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미국 유학은 학비, 체류비 등 당연히 비용이 든다. 전체 생애 경력 주기로 보았을 때, 졸업 후 벌게 될 돈을 생각하면 그리 커 보이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연 5천만-1억까지도 들 수 있는 유학 생활을 학부 졸업하자마자 떠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정도 비용을 부모가 지원을 해줄 수 있는 금수저가 아닌 이상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일단 한국에서 취업 후 몇 년 동안 이 비용을 마련한 뒤 미국으로 유학을 오는 것도 현실적인 방안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방법을 이용하고 있고, 미국에서 만난 많은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이러한 배경을 갖고 있었다.
짧지만 한국에서의 경력이 전공 연관도나 실무 경험에 따라 석사 유학 지원 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의 교수가 지원자의 실무 경험을 높이 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한국에서 취업을 했을 때 가능한 미국 유학 시 경력이 될만한 직군을 잘 선택해야 한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만큼 미국 이주 시점은 늦어지지만 전체 생애 경력 경로를 봤을 때, 그 영향은 미미하다. 다만, 한국에서 취업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나면, 그 기간 동안 결혼, 출산 등 인생에서 중요한 일들이 일어날 시기이며, 이에 따른 현실적인 문제들이 발생하기 때문에 애초 가졌던 유학 의지가 점차 약해질 수 있다. 반대로, 한국 직장의 조직 생활에서 쓴맛을 본 뒤 회의감, 자괴감에 유학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더 불태울 수도 있다.
의미 없는 가정법 #4.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18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여기서부터는 내가 실제로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실제로 시도도 했던 경로들이다. 한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뜻한 바가 있어 미국으로 박사 유학을 떠나는 경우인데, 석사 과정을 겪으면서 한국의 대학원에서 만족하지 못한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 랩, 지도 교수, 연구 인프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좀 더 나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연구자의 꿈을 키우는 경우다. 박사 학위를 위해 유학을 떠날 정도면, 최종 목표는 학계에 남거나, 연구직을 지향하는 경향을 갖는다 (최소한 유학을 떠나는 시점에는).
통상 박사 유학은 석사보다, 연구실에서 RA/TA 등을 통해 펀딩을 받을 기회가 많고, 초반에 괜찮은 연구 실적을 내면, 여름 방학 동안 기업체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잡을 수 있다. 따라서 석사 대비 유학 기간 내 재정적 지원을 받을 기회가 많다. 다만, 기간도 길고 워낙 불확실성(지도 교수, 프로젝트 연장, 퀄 시험 통과, 졸업 여부)이 높기에, 사실상 4-5년 내내 풀 펀딩을 받으며 졸업하는 것은 쉽지는 않다.
현재 우리 팀에 여름마다 인턴으로 박사 과정 학생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인턴 월급도 나쁘지 않게 받는다고 한다. 인턴 기간이 통상 3개월인데, 경우에 따라 추가 3개월 연장도 가능하다. 통상 학위 과정 중 인턴으로 2~3개의 회사들과 인연을 맺으면, 졸업 후 취업은 큰 문제가 없다. 다만, 연구직 인턴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학위 기간 초반에 반드시 좋은 논문 1~2편은 작성해서 학계에 가시성을 높여 놓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 3번의 경우에서 언급했듯이, 졸업 후 눈을 낮춰 엔지니어 직군으로 취업을 해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에서 석사를 하면서 박사 유학에 대해 잠깐 고민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전에 몸을 사리는 우매하고 소심한 성격이라 금세 생각을 접고, 바로 같은 학교 박사를 진학했다. 후회한다!
의미 없는 가정법 #5.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17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한국에서 박사를 마치고 바로 미국으로 이직하거나, 미국 대학이나 연구소에 포닥(박사 후 연수생)을 가는 경우인데, 잘 풀리면 여전히 좋은 경우다. 그런데 포닥을 마치고 미국에 취업을 하는 경우는 경험상 그리 많지는 않았다. 보통 포닥은 자신의 Education 이력이 줄곳 한국에서만 이뤄졌기 때문에, 자신의 이력에 미국 경력을 추가하기 위해 많이들 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교수직을 희망하거나, 한국에서 커리어를 하기 전에 미국 생활에 미련이 있는 사람들이 포닥을 떠나곤 한다.
포닥을 하면서 미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취업을 시도할 수도 있다. 박사 과정시 실적도 우수하고, 1년의 포닥 기간을 알차게 보냈다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미국 경험이 짧아서 영어 실력이나, 인맥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지에서 연구직으로 취업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모든 것이 다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다.
박사 후 직접 이직도 물론 가능하다. 한국 박사 과정 중에 좋은 논문을 발표하면, 미국 회사 연구원들의 눈에 들게 되고 인턴의 기회도 잡을 수 있다. 코로나 이전에는 여름 방학에 미국 현지에 건너와 3개월 인턴을 하고 돌아가기도 했고, 코로나 기간 중에는 한국에서 원격으로 미국 회사 인턴을 할 수도 있다. 인턴 시 팀에 좋은 인상을 주고, 멘토들과 관계도 잘 유지하면서, 이런 해외 인턴 경력을 잘 쌓아 두면, 박사 졸업 후 미국 회사에 연구직으로 오퍼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박사 초반, 가능하면 1~2년 차에 무조건 좋은 논문을 써서 발표해야 한다. 박사 과정에서 이 정도 실적을 쌓으면 O-1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박사 졸업이 결정된 시점(디펜스 완료)에 실제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 포닥과 이직 투트랙이었다. 자기소개서, 포닥 지원서를 작성에 3-4 명 정도 미국 교수들에게 메일로 보냈고, 선망하던 미국 회사 한 곳 엔지니어 포지션에 온라인으로 지원했다. 교수님들에게는 한 분에게 정중한 거절 답장이 왔고, 회사 지원은 폰 인터뷰에서 바로 광탈. 연구 실적도 미미했고, 영어도 짧았고, 글로벌 회사 인턴 경력도 전무했으며, 무엇보다도 절박함이 없었다. 이미 삼성에서 받은 오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가 가졌던 '되면 좋고, 안돼도 그만'이라는 마음 가짐으로는 미국의 문턱은 절대 넘을 수 없었다.
의미 없는 가정법 #6.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15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한국에서 박사를 하면서 미국으로 취업할 만한 실적을 쌓지 못했다면, 이후 한국 회사에서 근무하며 부족한 실적이나 경력을 쌓으면 된다. 한국에서 석/박사를 하지 않았다면, 동기간 한국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는 동안 미국 이직에 적합하도록 경력을 가꾸고, 스킬 셋을 연마하면 된다.
이 시기에 있는 한국인들(30-45세 정도, 과부장급 기술/연구직)이 미국 진출에 대한 열정이 가장 높다. 한국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조직 개편, 꼰대/조직 문화, 야근, 워라밸 붕괴, 불확실한 진로,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미국 이주에 대한 필요성을 뒤늦게 절감하는 것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박사를 받고 삼성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온 세상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꿈꾸던 세상은 다른 멀티버스에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미국 진출을 시도하면 일단 비자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미국 회사에서 합법적으로 일을 하려면 무조건 취업 비자인 H1B가 있어야 한다. 미국 회사에서는 지원자가 포지션에 적합한 실적이나 업계 경력을 쌓았더라도, 비자 지원을 해주면서까지 생면 부지인 외국 거주 엔지니어를 뽑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라인으로 지원 시 '비자 지원 필요' 항목이 체크된 경우, 대부분의 경우 해당 지원서가 필터링된다. 미국 회사에 근무 중인 직원의 추천(referrel)을 받은 지원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한국에 있는 후배 몇몇으로부터 부탁받아, 현재 회사에 추천 시스템에 등록하기도 했는데, 전부 이 단계에서 걸러졌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회사 지원이 필요 없이 자신이 스폰서가 되어 신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NIW 미국 영주권을 받는 길이다. 박사 학위 소지자 또는 석사 학위 + 충분한 업계 경력이 있으면 기본적인 자격이 주어지며, 이를 통해 영주권을 취득하면, 미국 진출에 대한 문턱을 꽤 낮출 수 있다. 비자 지원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에 미국 회사들도 지원자들의 이력서를 비로소 눈여겨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NIW 영주권을 취득한 시점부터 6개월 이내에 미국으로 입국하지 않으면, 취득자가 미국에 영구 거주할 의사가 없다고 판단해 이민국에서는 해당 영주권을 말소시킨다. 3~6개월 이내에 이내에 미국을 입국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기간 동안 한국에서 미국 취업에 성공하지 못하면, 일단 미국으로 이주부터 한 뒤 현지에서 구직활동을 이어가야 한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취업이 안된 상태에서 가족을 데리고, 자비로 국제 이사를 한 뒤, 현지에서 정착하는 것도 상당한 모험이다. 일단 미국에 입국하면 영주권은 있기 때문에 체류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취업을 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에 의료 보험이 없어, 이 기간 동안 가족 중에 병원에 갈 일이라도 생기면 좋은 의료 보험 지원을 받기 힘들어, 가족 중에 큰 병에라도 걸리면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NIW를 통한 미국 이직도 이 정도의 위험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주저하게 된다. 사람 심리상 미국으로 이직이 확정돼야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위에서도 NIW를 통해 미국 정착에 성공한 몇몇 분들을 보았는데, 이주 초반에는 다소 고생스러운 기간을 겪기도 했지만 (가족과 이주한 뒤 취업이 잘 안 되어, 가족을 일단 다시 한국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결국 다들 취업에 성공해 잘 정착해 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도 한국에서 직장 생활 5~6년 차부터 현실 자각 타임이 왔고, 조금씩 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 취업 시 비자/신분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고 (비자 쪽은 알아보지도 않았다. 막연히 비자는 회사가 알아서 해주는 것 아니야?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온라인을 통해 미국 회사에 계속 지원했는데, 연락이 온 것은 전무했다!
의미 없는 가정법 #7.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10여 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다만, NIW를 받아 취업 전에 가족을 데리고 미국 이주를 감행할 만한 용기가 있었을까 의문이다.
박사 과정에서 논문 실적, 인턴 경력, 영어 실력 등을 쌓지 못했기에, 졸업 후 바로 미국에 취업을 할 수도 없었고, 이는 삼성에 입사 후 5년 정도 연차를 보냈을 때까지도 사정은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NIW를 받아 미국 이주를 감행하는 방법은 당시만 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취하기 쉽지 않은 방법이지만).
삼성 외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경력을 만들기 위해 6년 차 즈음부터 논문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연구소(삼성 종합 기술원)였기에 논문을 쓰는 일은, 널리 장려되지는 않았지만, 본업에 지장이 없다면 문제되지 않았다. 공식 업무와 병행을 해야 해서 없는 시간을 내는 것(야근, 주말근무)이 문제였지만.
결국 삼성 6-9년차에 집중적으로 쓰고 발표한 논문들이 인텔 연구원의 눈에 띄었고, 인텔 HR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인터뷰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삼성 11년 차에 인텔이 스폰서가 되어주는 O-1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현재의 모습 내가 만일 이 경로로 미국에 왔다면, 지금의 난 5년의 어마어마한 실리콘 밸리 경력을 쌓았을 것이다. 몇 번의 이직을 통해 연봉을 상승시켰을 것이고, RSU는 축적되었을 것이다. 벌써 은퇴 시점을 고민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웃음). 하지만, 내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을 일.
내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본 미국 이주의 가장 적기는, 결론적으로 말해 금수저라면 한국에서 학부를 마친 시점이다. 졸업 후 미국으로 바로 석사 유학을 떠나는 것이 베스트다. 하지만, 대부분 금수저가 아니기에, 학부를 마치고 취업하여 유학 자금을 마련한 뒤, 석사 유학을 떠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학부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막 시작한 20대중후반에는 사실 미국에 가야 할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 때가 가장 적기다. 석사 유학, F1 비자 -> OPT -> 미국 취업 -> H1B 비자 -> 영주권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수순을 밟으며 미국 사회에 편입될 수 있는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한타깝게도, 미국 이주에 대한 강한 동기 부여를 느끼는 시점은 통상 뒤늦게 찾아온다. 한국에서 성공을 다짐하며 직장생활을 하다가, 어떤 이유든 좌절을 맛보고 그 때서야 미국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대략 35-45세). 그간 경력은 쌓였지만, 미국 회사에서 원하는 스타일로 관리 되지 않았기에 인정 받기 쉽지 않다. 인맥도 없다. 또한 이 때쯤 되면 홀몸도 아니고 왕성히 부양할 가족도 있을 시기라,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도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가장 문제는 현실적으로 NIW 영주권 아니면 신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학부생이라면 이 결론을 잘 곱씹으시기 바라며, 이미 그 시기를 놓치신 분들은 위에서 열거한 시나리오들을 바탕으로 차선책을 잘 찾아보시기를 바란다.
- 예나빠
ps.
가상의 시나리오를 언급하며 내가 가보지 못한 길(미국 석사, 박사, 포닥)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도 간접적인 경험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내 글에는 충분히 오류가 있을 수 있다. 혹시나 미국에서 박사나 포닥을 하고 계신 분들께서 상처가 되거나 기분 상한 부분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드린다.
예나빠 브런치 매거진 소개
미국 연구원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정보 전달 잡지
미국 오기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에서 일하니 여전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직장 에세이
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어쩌다 실리콘 밸리 - 팩션 형식으로 작성될 실리콘 밸리 입성기 (예정).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그래픽스로 읽는 서양 미술사 - 그래픽스 전공자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 교양서.
표지 이미지 출처: up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