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 편
미국에 (오려면) 하루라도 빨리 와야 하는 이유 #1에 이어 나머지 세 가지 이유를 미국 거주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미국으로 이주하면 현지에 정착하는 시기를 반드시 겪어야 한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미국 살이에 완전히 적응하는데 짧으면 몇 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국제 이사, 렌트 집 구하기, 자동차 구매, 사회 보장 번호 신청, 은행 계좌 개설, 운전면허 취득, 자녀 학교 등록, 의료 보험 가입, 병원 주치의 찾기 등 기본적인 정착과정은 수개월내에 가능하다. 하지만, 지역 사회에 완전히 녹아들기까지는 실제로 더 많은 기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이웃과 친구를 만들고, 자녀를 위한 다양한 사교육 정보, 지역의 학군, 주택 구매 시 필요한 부동산 정보 등은 수년 이상 거주를 해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다. 또한, 함께 온 자신의 가족 외에는 일가친지가 없기 때문에, 이주 초반에 급한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도움을 청할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현지 정착과 적응은 젊으면 젊을수록 쉽고 그 기간도 짧아지기 마련이다. 싱글이라면 가족이 없기 때문에 이주도 간편하고 정착 시 해야 할 일도 훨씬 적다. 아직 자녀가 없는 젊은 부부라면, 아이들 교육 문제로 학군을 따져가며 집을 구할 필요도 없다. 나이가 많을수록 가족 구성원의 수나 연령대가 높기 때문에 이주와 정착 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이후의 수월한 삶을 위해서라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 정착기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 나는 이미 40대 중반이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늦게 한 탓(30대 후반)에 자녀가 그때까지도 아주 어렸다. 첫째가 2살, 아내는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다 추억으로 기억되지만, 유아 한 명과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하며 참 많은 고생을 했다. 모든 것이 낯선 환경에서 아직까지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소통하며, 미국 병원에서 출산을 하고 극악한 산후조리를 받는 등, 정착기와 아내의 출산이 겹치면서 가족들이 여러모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일찍 미국에 와 정착을 했더라면 그보다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매우 현실적이며 통속적인 이유다. 경험상 미국에 이주하는 한국 엔지니어들은, 개인별로 시점의 차이는 있지만, 이주 직후 한동안 렌트 살이를 하다가도 결국 현지에서 주택을 구매한다. 의식주의 문제에서 '자가'에 대한 애착이 있는 한국인 고유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인도나 중국 등 타국가에서 온 엔지니어들도 결국 일정 시점이 도래하면 다들 주택을 구매하곤 한다.
아파트나 주택을 빌려 렌트를 살 때 고정적으로 지출되는 렌트비(월세)는 수입에서 무시할 수 없는 비율을 차지하는데, 이는 결국 아파트를 소유한 회사나 집주인의 수입이 될 뿐 내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당연하다). 또한 아파트의 경우 렌트비는 "해마다" 2~3%씩 칼같이 오르기 때문에, 렌트 리뉴얼 시점이 도래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때 선택은 두 가지다. 렌트비가 더 싼 곳을 찾아 새로 이사를 가거나, 울며 겨자 먹기로 오른 렌트비를 내고 1년을 더 살거나 (읍소하며 렌트비를 조금이나마 깎는 시도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기회비용을 생각했을 때 고정적으로 무의미하게 렌트 비용을 지출하느니, 능력이 되는 시점에 차라리 은행 대출을 받더라도 주택을 구매하는 편을 선택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렌트 비용이나 대출로 인한 월 상관 금액이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월 상환 금액은 지출이긴 하지만 결국 내가 구매한 주택가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일종의 저축인 셈이다 (물론 렌트와 자가에 대한 장단점이 있고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단 주택을 구매하면 보험, 관리에 들어가는 비용, 그리고 재산세 등 별도의 지출은 발생한다).
문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국, 특히 실리콘 밸리 지역의 부동산 가격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코로나 이후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기침체로 상승세가 주춤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높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4인 가족이 살만한 산호세 지역 평균 주택 가격은 한국 돈으로 20-30억을 호가하고, 쿠퍼티노(Cupertino), 팔로알토(Palo Alto), 로스 알토스(Los Altos)처럼 학군이 좋은 지역은 40억이 훌쩍 넘는다. 시기나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주택 가격은 평균적으로 1년에 1~2억씩은 오르고 있다.
당연히 이런 비싼 집을 현금으로 일시에 구매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올 캐시로 구매하는 중국과 인도 부자들도 무척 많다. 대부분 은행 모기지 대출을 받아 집을 구매하게 되는데, LTV/DTI/DSR 비율이 까다로워 대출금 상한이 그리 높지 않은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DTI(총부채 상환비율)이 대략 50%, 즉 수입에서 50%까지 대출금을 낼 능력만 보여줄 수 있다면 '이론상으로는' 구매하려는 주택가의 90%까지도 대출을 받아 집을 살 수가 있다. 즉 20억짜리 집을 살 때 자신이 2억의 현금만 있으면, 나머지 18억은 은행 대출로 커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주택 매매가 희망자들 간 경쟁 입찰 형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낙찰을 받기 위해서는 이 현금 비중을 높여야 한다. '이론상'이라고 언급한 이유다). 따라서, 대출의 도움을 받으면 수억 원선의 현금으로 실리콘 밸리의 주택을 구매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수억 원의 돈이 어디 마련하기 쉬운 돈인가? 그렇다면, 미국 테크 기업에 입사한 사회 초년생들은 어떻게 이 종잣돈을 모아 집을 살 수 있을까? 여기서 미국 기업의 연봉 보상체계 중 하나인 RSU(Restricted Stock Unit, 주식)가 큰 위력을 발휘한다. 실리콘 밸리의 FAANG과 같이 괜찮은 회사에 입사했다고 가정했을 때, 주니어 레벨에서 받는 연봉은 현재 15-20만 불 정도이며, 이 중 회사에서 받는 주식 비중이 20-30% 정도 된다. 물가가 높기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저축은 쉽지 않지만, 해마다 받는 주식을 잘 축적하면 목돈을 만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몇 년에 걸쳐 두 번 정도 진급을 해 시니어 레벨에 도달하면 연봉은 30만 불을 훌쩍 넘기게 되고, 이때 주식 비중도 증가하여 40-50%까지 된다. 즉 해마다 주식으로만 1억씩 자산을 축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회사의 주식이 잘 올라주기만 한다면 추가적인 자산 상승효과도 거둘 수 있다. 따라서, 연봉 중 현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해마다 지급되는 RSU를 잘 저축한다면 몇 년 새 수억 원을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는 FAANG과 같이 주식을 잘 주는 회사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 있다. 미국에서 대학/대학원을 졸업해서 FAANG에 입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초반에 스타트업이나 작은 회사에서 경력을 시작하더라도, 몇 번의 이직을 시도하면서 FAANG에 안착하는 케이스도 실제로 무척이나 많다).
이렇듯, 해마다 지급되는 RSU를 통해 해가 거듭될수록 직원들의 자산은 불어난다. 따라서, 자산 증식과 부동산 가격 상승의 속도를 고려했을 때, 1년이라도 미국에 먼저와 정착한 뒤, 하루라도 빨리 테크 기업에 입사해 RSU를 받기 시작하는 것이, 종잣돈을 모아 주택을 구매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빠른 방법이다. 이외에도, 미국 회사에만 있는 401K라고 불리는 개인연금도 불입 기간에 비례에 증식되기 때문에 무조건 빨리 가입하는 것이 좋다.
미국에서 거주한 5년 동안 많은 한인 분들을 만났다. 유학이든 이직이든, 짧게는 5년 길면 10년까지, 대부분 나보다 일찍 미국에 와 정착한 분들이었다. 젊은 나이에 학군 좋은 동네에서 크고 넓은 집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볼 때마다,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부러운 마음이 안들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 박사 졸업 후 대기업에서 근무했던 내 11년을 실리콘 밸리에서의 시간으로 치환한다면 나도 이들 못지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뒤따른다. 미국에서 가족과 행복한 시기를 보내며 현재의 내 모습에 감사하면서도, 이런 속물스러운 감정을 숨길수는 없는 걸 보면, 내가 자본주의의 종주국(?)에 살고 있는 것이 맞긴 맞나 보다 (웃음).
많은 이들이 미국 이민의 이유로 자녀 교육을 꼽곤 한다. 부모들은 자녀를 한국의 치열한 경쟁사회로 내몰고 싶지 않고, 학원과 사교육의 굴레를 벗어나 선진국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게 하고픈 마음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영어 때문이라도 미국에서 학교를 보내고 싶어 한다. 자신이 평생 겪은 영어 스트레스를 내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라고 할까.
이유야 어쨌든 미국 이주를 고민하게 될 때, 자녀 나이는 큰 변수가 된다. 자녀가 어리면 어릴수록 미국 이주 후 적응은 수월하다. 학교에서 새로운 친구들도 쉽게 사귀고, 영어도 빠른 시간에 습득한다. 미취학 자녀라면 이주 후 적응에 전혀 문제가 없고, 그 이상이라 해도 약 10세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큰 무리 없이 미국 학교 시스템에 적응할 수 있다. 오히려 이 나이대에 미국에 오는 것이 한국어-영어의 이중 언어 구사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
이주 시점에 자녀 나이가 그 이후가 될수록 미국 학교 적응에 대한 난이도는 점차 올라간다. 학생들이 전학을 좀처럼 하지 않는 미국에서는, 유치원 시절부터 사귄 교우관계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이어지곤 한다. 중학생쯤 되면 아이들이 이미 무리를 지어 어울리곤 하는데, 영어가 아직 능숙하지 않은 자녀가 이런 환경에 전학을 가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은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자녀에게는 자아가 형성되어 있고, 한국에 이미 많은 교우 관계도 맺어져 있기 때문에, 아빠를 따라 이민 가는 것을 본인 의지로 거부하기도 한다.
한국에 있는 미국계 N사에 다니던 아는 어떤 분이 있었다. 좋은 기회로 미국 본사로 트랜스퍼를 하게 되었는데, 미국에 온 지 석 달만에 가족과 함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다. 고교생이었던 첫째 딸이 미국에서 적응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성격도 밝아 교우관계도 좋고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였던 딸이, 미국 학교로 전학 후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으로 이주를 결정했다면, 자녀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해야 한다. 혹자는 한국어를 잊어버릴까 너무 어린 나이에 하는 이민을 기피하기도 하는데, 전혀 걱정할 문제는 아니다. 물론 이민 2세 교포로 살면 영어가 제1언어가 되는 것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부모와 한국어로 꾸준히 소통한다던지, 한글학교에 다니는 방식 등으로 자녀가 한국어를 계속 쓰게 할 방법은 미국에도 얼마든지 있다.
늦은 나이에 미국에 왔기에 정착하고 살면서 느꼈던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 번의 글을 통해, 미국에 온다고 결심했다면, 하루라도 빨리 해야 하는 7가지 이유를 이야기해보았다. 부디 내 경험이 미국 이직/이주를 꿈꾸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두줄 요약.
미국에 오기로 결심했으면, 본인, 가족, 자녀가 현지에 잘 적응하고, 자산 증식과 주택 구매의 기회를 높이기 위해서 1년이라도 빨리 이주해야 한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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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