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조국 게이트

은밀하지 않은 은밀한 제안

by 예나빠


"기회에도 자격이 있는 거다"
- 드라마 <미생>



조금은 한가롭던 어느 날 오후였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돌아와, 남은 점심시간을 어떻게든 비생산적으로 보내려 하던 때였다. 못 보던 계정으로부터 메일이 한 통 도착한 것을 발견했다.


"안녕. 나는 I사의 HR직원 '몰지각'이야. I사의 연구팀을 담당하고 있어. 우리가 현재 리서치 사이언티스트들을 채용 중이라 좋은 사람들을 찾고 있거든. 그러던 중에 우리 회사 누군가가 너를 추천했어. 우리 팀에서 그동안 네가 발표한 연구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거든. 관심 있으면 답장 줄래?"


마치 제세동기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갑자기 내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 가지 이유였다. 첫째는 그동안 리스펙하던 I사 연구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었고, 둘째는 이 제안을 자그마치 회사 메일 계정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직 권유를 당사자 회사 메일로 보내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버럭)! 이런 제안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게 국룰이 아닌가. 물론 개인 정보보호법에 따라 사측이 직원의 메일을 임의로 열람하지는 못하게 되어는 있다. 하지만, 법으로 못하는 것과 기술적으로 못하는 것과는 완전 다른 이야기 아니겠는가.


길 가다 지갑을 주운사람 마냥,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다들 남은 점심시간을 알차게 보내느라 내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부리나케 메모지를 꺼내 송신인 메일 계정과 이름을 받아 적은 뒤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누구에게 들킬세라 메일을 수신함에서 바로 삭제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복구가 될 테지만, 메일 삭제는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 행동이었다. 증거 인멸 중인 범죄자가 이런 느낌일까. 심장 박동은 더 거세졌다.


I사 HR 직원은 몰지각했다. 출처=예나빠 태블릿


따지고 보면 메일 수신만으로는 내가 이렇듯 쫄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메일은 원래 수신하라고 있는 법. 스팸만 아니라면 외부 메일은 얼마든지 도착한다. 내가 메일에 답장을 하며 커뮤니케이션을 개시하지 않는 한 아무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아니면 회사에 충성심을 어필하기 위해 '꺼져'라고 답장을 보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었다. 뭐 그것도 다 회사가 내 메일을 열람할지도 모른다는 억측에 가정한 것이지만.


하지만, 그래서 쫄렸다. 도둑이 제발 저렸기에, 결국 I사의 HR직원과 커뮤니케이션을 개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이름과 이메일 계정을 괜히 받아 적은 것이 아니었다.


퇴근 후 집에 왔을 때 바로 PC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받아 적었던 몰지각군의 계정 앞으로 개인 메일을 이용해 답장을 썼다.


"안녕 몰지각군. 내 연구에 대한 관심과 I사 연구팀에 대한 소개를 해줘서 고마워. I사의 연구원들과는 학회에서 만나 교류를 한 적이 있었어. 나도 평소부터 I사의 훌륭한 연구 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었지. 제안해 준 리서치 사이언티스트 자리에 관심이 있어. 다음 절차를 알려줘"


"추신. 앞으로는 내 회사 메일 계정으로 메일 보내지 마라 (안 그럼 죽는다)"




"저기 혹시 너 I사의 '골골이' 아니니?"


"어. 맞아. 어떻게 나를.."


학회장에서 골골이에게 먼저 말을 건 쪽은 나였다. 나는 부서장이었던 능력쩔 부장의 배려로 거의 매해 학회 출장을 갈 수 있었다. 학회 출장자는 경쟁사 동향 파악, 인적 네트워크 구축, 신규 연구 과제 발굴이라는 거창한 미션을 부여받았다. 가능하면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려 했다. 특히 신경 쓴 것은 '네트워크 구축'이었다. 회사의 미래만큼이나 내 미래도 중요했다. 인맥은 일단 문어발식으로 뻗어두는 게 좋다.


골골이의 얼굴을 알아본 것은 평소 I사 연구팀 웹사이트를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주기적으로 논문을 확인하며 경쟁 연구팀의 동향을 주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웹사이트는 연구원들의 사진과 간략한 프로필을 올려놓고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머리숱이 거의 없고, 부족한 모발을 콧수염, 턱수염으로 커버하던 골골이의 얼굴은 한번 보면 쉽게 잊기 어려운 관상이었다.


"안녕, 난 S사에서 온 예나빠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올해 너희가 발표한 논문들이 내 논문을 많이 인용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어"


"아. 그랬구나. 반가워"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던 표정이었다. 입으로는 반갑다고 하던 골골이였지만 얼굴은 별로 그렇지 않아 보였다. 의외였다. 통상 학회에서 누군가와 새롭게 안면을 트면, 그들은 외국인 특유의 오버액션으로 호들갑을 떤다. 가식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될 만큼 환하게 웃으며 대화를 시작하기 마련이다. '변방의 연구원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그런 거야? 응?'


욱하던 마음을 이내 억누르고 의연하게 대처했다. 자기 암시를 걸었다. '나는 글로벌 S사를 대표하는 출장자다. 쫄지 마라'. 그리곤 출장 미션에 충실하기 위해 대화를 이어갔다. '최근 너희 논문들이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와 같은 분야를 연구 중이라는 사실이 반가웠다'. 'I사가 이 분야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라며 질문을 쏟아냈다.


건조한 표정을 짓던 그도 동종 업계, 게다가 자신들이 인용하던 논문의 저자가 먼저 말을 거니 흥미로웠던 것 같았다. 의외로 또 골골이는 질문에 술술 답했다. 그렇게 이전 저런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무르익자 나는 자연스럽게 '경쟁사 동향 파악'을 위한 본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렇구나. 요즘은 그럼 어떤 연구를 하니?"


"아, 미안.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어"


골골이는 급작스레 철벽을 쳤다. '오. 교육을 잘 받았는 걸? 너희도 예외는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기술 보안은 국적을 불문하고 여느 IT회사들에게나 매우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 동향 파악을 위해 학회장을 찾은 업계 연구원들은 서로 교류를 하되 선을 지킨다. 혹시 회사 중요 기밀이 내 입을 통해서 흘러나가지 않는지 항상 신경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입꾹닫만 하면 대화 자체가 안되기 때문에 적정선에서 정보를 주고받는다. 최대한 내가 가진 정보는 적게 노출하고, 상대방의 정보는 많이 취하려는 탐욕을 발산한다. 그래서,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해외 학회에서 외국인들과 자연스레 대화를 개시하는 스킬 따위 애초에 내겐 없었다. 뼛속까지 내향인, 천상 아싸인 내가 서구식 파티 문화에 익숙해질 리 전무했다. 학회 출장을 다닌 지 처음 몇 년간은 세션 간 쉬는 시간이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사람들 사이에 멀뚱멀뚱 서있었다. 잘하지도 못하는 맥주만 홀짝거리며.


그나마 이들과 대화가 가능해진 것은, 학회에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다음부터였다. 일단 논문을 발표하면, Q/A 시간, 쉬는 시간에 질문하러 먼저 찾아오는 이들이 있다. 극찰나의 시간이지만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논문 발표가 몇 번 계속되면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그때부터는 조금은 네트워킹이 쉬워진다.


골골이가 철벽을 치는 바람에 대화가 잠시 어색해지긴 했지만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명함을 주고받으며 환하게 인사를 했다. 멀어져 가는 골골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 잠시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을 끝내 내뱉지 못한 것에 대한.


'혹시 I사 연구팀에 자리하나 없니?'


고개를 크게 저으며 다시 마음을 잡았다. '난 지금 글로벌 S사를 대표하는 출장자다! 어딜 비굴하게 경쟁사에 인사 청탁을...'. 갑자기 이름 모를 슬픔이 몰려왔다. 흑.


끝내 골골이에게 하지 못한 말.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I사의 HR직원 몰지각군이 내 회사 계정으로 메일을 보냈던 이유는 바로 골골이를 통해 건네받은 내 명함 때문이었다. I사의 연구팀에서 새로운 연구원을 채용하게 되었을 때, 골골이는 학회에서 만난 나를 떠올렸다 했다. 나는 그가 평소에 관심을 두던 변방의 연구원이었는데, 학회에서 잠시 만났던 기억이 더해지자 우선 채용 후보로 떠오른 것이다. 골골이는 매니저에게 나를 추천했고, 매니저는 HR 직원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취했다. 내 명함에 적힌 이메일로.


이심전심이었을까. 아니면 내 눈망울이 그리도 슬퍼 보였을까. 끝내하지 못했던 내 마지막 말을 어쩌면 골골이가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유였든 골골이를 통해 천조국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조금씩 열리게 된 것이다.


내 메일을 받은 HR직원 몰지각군은 다음날 내게 바로 답장을 했고, 메일을 통해 연구팀의 매니저 '척척이'를 소개했다. 그리고 매니저 척척이와 몇 번 인사 메일을 주고받으며 바로 30분가량의 통화 약속을 잡았다. 척척이는 자신의 팀을 소개할 예정이라 했고 내 생각도 듣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인 듯 인터뷰 아닌듯한 간 보기 시간이었다.


"예나 엄마, 나 I사에서 연락 왔어. 이거 잘되면 우리 미국 가는 거야"


아직 돌이 채 안된 딸아이를 막 재운 아내는 남편의 들뜬 목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육아 때문에 남편의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왔을 수도, 아니면 갑작스레 천조국 타령을 하는 남편이 영 못 미더웠을 수도 있다. 하긴 해외로 나가겠다고 큰소리치다 흐지부지 된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현숙한 아내가 양치기 소년 남편에게 대답했다.


"그런 건 되고 나서 이야기해도 안 늦어..."


오기가 생겼다. 내 반드시 천조국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리라. 그래서 아내의 남편에 향한 눈빛을 '의심'에서 '존경'으로 바꾸리라 굳게 다짐했다. 그리곤 다음날 아침 일찍 예정된 I사와의 통화를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하지만 긴장감에 밤새 뒤척였다.



"하이! 예나빠. 반가워 나는 I사 연구팀 매니저 척척이야"


토요일 이른 아침,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척척이의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정통 백인의 억양이 느껴지는, 중년 남자의 중저음 섞인 고급진 영어를 듣다 보니 귀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척척이는 무척 친절하고 나이스하게 연구팀, 연구 주제, 사내에서의 위상, 사내 외 주요 고객에 대해 소개했다. 그리고 이번에 팀을 좀 더 키우기 위해 연구원을 충원하는 중이라 했다. 그는 내 이력서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I사 연구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드림 잡! 드림 잡 (Dream Job)!"


이런. 한없이 촌스럽기 짝이 없는 대답이라니. 아무리 천조국에 가고 싶어도 그렇지. 내 본심이 바로 튀어나와 버렸다. 내 이 촌스러움을 수습을 하기 위해 허둥지둥 교과서 같은 정답을 서둘러 가져다 붙였다.


"응, 그동안 학회나 저널을 통해 발표된 너희 팀의 연구실적을 주목하고 있었어. 업계를 선도하는 I사의 기술력에 항상 감화되고 있었지. 이 팀에 합류하게 될지도 모르는 기회가 찾아온 것에 기쁘게 생각해"


내 말에 척척이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고마워. 그럼 언제 미국으로 건너와서 우리 팀원들이랑 미팅을 할 수 있을지 알려줄래?"



통화를 마치고 바로 아내에게 달려갔다. '여보!' 내 어깨는 두 뼘 가까이 봉긋 솟아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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