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오브 프리퀄
"자신이 하고 싶은 걸 관철시키는 힘이 진정한 강함이라고 생각해.."
-애니 <이세계 삼촌>
시간은 참 빨리 간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항상 어렵다는 것. 솔직히 시간의 흐름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돌배기 아기와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미국 아파트 현관문을 처음 열었던 그날, 내 마음속 시간은 정지했다. 어떨 때는 판타지 소설의 한 장면처럼 이곳은 엘프나 드래곤이 득실대는 이세계(異世界)라는 생각마저 든다. 한국에 돌아가면 현실로 복귀해 그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를 것만 같다.
이 이세계의 문을 열기 위해 애초부터 원대한 포부나 목표를 가졌던 것도, 무언가 착실히 준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일과를 때우던 평범한 연구직 회사원이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절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던 시기를 지나, 조직의 고인물로 변모하던 그즈음의 어느 날 나는 뜬금없이 철학자가 되었다.
'10년 뒤 아니 5년 뒤 이 회사를 나가야 하면 뭐 해 먹고살지?'
한국 대기업 조직 생활 10년 차의 연륜이 나를 아주 근원적이며 범우주적인 사유로 몰고 갔다. 그날 이후 난 그 해답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우선 인문학 책 100권을 주문했다. 대학문에 들어선 이후 수식과 코딩 외에 존재하지 않던 내 머릿속을 문사철(文史哲)로 때려 박았다.
머리는 뒤죽박죽이 되었다. 회사에서 코딩을 할 때면 온갖 버그가 튀어나왔다. 인생 2막을 작가로 살겠다며, 속성으로 되지도 않는 교양을 쌓다가 급기야 난 호문쿨루스(돌연변이)가 된 것이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길로 인문학 탐색을 중단했다.
그리고 시도한 일은 미술사 완전정복이었다. 생뚱맞게 엔지니어가 웬 미술. 지금의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난 그녀에게 교양과 지적허세를 뽐내기 위해 미술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미술 서적을 탐독했고, 데이트를 핑계 삼아 미술에 관심도 없는 아내를 미술관에 끌고 다녔다. 급기야 미술에 대한 허영인지 진심인지 모를 애정이 생겼고, 연말이면 휴가를 내 유럽까지 건너가 미술관을 싸돌아 다녔다.
취미로 생각한 미술을 인생 이모작을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난 미술 전공자도 아니었고 전업으로 할 만큼 예술적 안목도 뛰어나지 못했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역시 예술은 취미로 남아야 아름다웠다.
이후 비자발적 은퇴 후의 삶에 대해 더 고민했지만 뾰족한 답을 찾지 못했다. 수많은 자기 계발 서적을 뒤적였다.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당신의 연봉이 현재의 몸값이 아니다. 회사라는 브랜드를 걷어냈을 때 벌어들일 수 있는 돈이 진정한 당신의 몸값이다. 회사를 나오기 전 자신만의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무릎을 탁 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슴을 울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는 자신만의 기술'이라면 결국 프리랜서, 창업, 자영업을 하라는 말 아닌가. 듣기에 멋진 말이지만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난 나를 포장하는 마케팅 능력 따위는 없는 일개 공돌이였다. 리스크를 점차 줄여야 나가야 할 인생의 후반전에, 가족의 생계와 은퇴 이후의 삶을 걸고 무모한 모험을 벌일 만큼 나는 간이 크지 않았다.
결국 나만의 결론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회사에 붙어있는 것이었다. 키보드를 못칠정도로 기력이 쇠하거나, 더 이상 코드 한 줄 써 내려가지 못할 정도로 머리 회전이 안될 때 비로소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즉 은퇴를 하게 되는 유일한 이유가 '생물학적 나이'가 될 때까지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 또한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회사는 직원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도 일을 주기는커녕, 팔팔한 4-50대까지도 기다려주지 않을 것 같았다. 4-50은 '생물학적 나이'로 한창 일할 수 있는 시기지만, 회사라는 세계 안에서는 이미 황혼기다. 시간이 가며 쌓이는 경험과 연륜은 조직에서의 쓸모와 반비례하게 된다.
이 사실을 발 빠르게 파악한 누군가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직을 시도하고, 때를 놓친 고인물들은 젖은 낙엽처럼 복지부동 모드에 접어든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점가를 강타했던 퇴사 광풍은, 고민하던 많은 한국의 직장인들에게 퇴사를 종용했지만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던 차 어렴풋이 알고 있던 이세계(異世界), 천조국을 알게 되었다. 그 이세계에는 세 종족이 있는데, 엘프와 드래곤 그리고 엔지니어라 했다. 그리고 엔지니어 종족은 낮에는 죽어라 일하지만 오후 6시가 되면,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모두가 킹덤의 좀비처럼 집으로 달려간다 했다. 그리고 이 생활을 벽에 똥칠할 나이가 될 때까지 무한히 반복한다고 했다.
천조국에서 모험을 끝내고 온 이들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믿지 못했다. '오후 6시에 일과를 마치는 세계가 있다니 그러고도 생계가 가능한가?' '저녁때 회사는 누가 지키지? 아, 그래서 진정 이세계인가'. 이후 알음알음 천조국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어떻게 하면 그곳에 갈 수 있을지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다가 결정적 문제를 알게 되었는데, 바로 천조국을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아무도 쉽게 허물지 못한다는 통곡의 벽. '언어 장벽'이었다. 그리고 이 벽을 넘으려면 이세계의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야 한다고 했다. 좌절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평소에 익혀 둘걸'. 후회가 몰려왔다.
그즈음 집 근처에 이세계 언어를 가르쳐주는 견습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원'이라 불리는 견습소에는 엘프나 드래곤 종족들이 득실댔다. 잠시 인간계에 방문한 이들이 이세계 진입을 꿈꾸는 나 같은 인간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견습소에서는 엘프나 드래곤이 주 3회 1시간씩 견습생들을 일대일로 만나 이세계 언어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신 견습비가 상당히 고액이었다. 큰 마음을 먹었다. 이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결심을 되새기고, 웬만한 대학의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 자리에 결재했다. 그리고 드래곤 '제이'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매일 새벽 제이에게 이세계의 언어뿐 아니라 천조국의 다양한 문화를 배웠다. 어느 날 그에게 물었다.
"제이. 천조국에서는 엔지니어 종족의 삶은 어때?"
"고급지지. 벌이로만 봤을 때 여기로 따지면 의사나 변호사쯤 될걸?"
순간 내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매일 아침 7시마다 하는 이세계 언어 견습을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회식이나 야근으로 전날밤 아무리 무리를 했어도, 다음날 아침 6시 30분에는 반드시 일어나 견습소를 찾았다. 고급지고 풍요로운 엔지니어 종족의 삶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이세계 언어를 연습하기를 어언 1년, 어느 날 갑작스러운 기회가 찾아왔다.
천조국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갑자기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