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세 희망회로

면접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

by 예나빠


망상을 품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0% 이지만,
동시에 기적이 일어날 확률도 0%다.
-차동엽 신부



"손님 여러분 저희는 지금 산호세 국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가 완전히 멈춘 후..."


낭랑한 일본어로 들려오는 도착 방송이 들렸다. 비행기 좌석에 구겨졌던 몸을 곧추 세우고 눈을 떴다. 잠자리가 바뀌면 좀처럼 잠들기 어려워하는 나에게 비행기 좌석은 언제나 바늘방석이다.


'드디어 산호세인가..'


인천에서 도쿄를 경유해 산호세로 오는 비행기는 일본항공사였다. 도쿄와 산호세 간 직항이 있다니, 항공편을 예약할 때 조금은 놀랐다. 항공사에서 직항 편을 개설하려면 수지 타산이 맞아야 할 텐데, 한국에서 산호세로 여행하는 사람이 일본만큼은 없나 보다. 산호세는 관광지가 아니다 보니 승객은 출장자나 교포가 대부분일 것이다. 산호세 현지 산업 규모나 교민의 수가 한국보다 일본이 더 월등한 것일까.


캘리포니아, 특히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를 통칭하는 베이 지역(Bay Area)은 미국에서 아시아인들 비중이 가장 높기로 유명하다. 30%에 육박하다고 한다. 그중 대부분은 중국인과 인도인이며 그 뒤를 필리핀, 베트남, 그리고 한국과 일본인이 뒤따른다.


한국인들은 아시아인들 중 산호세 진출이 비교적 늦은 편에 속한다. 출발은 중국인들이 끊었다. 1850년대 캘리포니아에 금싸라기가 발견된다는 소문이 돌면서,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일명 '골드 러시'. 골드 러시는 바다 건너 중국까지 전해져, 샌프란시스코 항을 통해 많은 중국인들이 유입되었다.


그러다 미국 전역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급기야 1880년대 미 의회는 중국인을 이민에서 배제시키는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빠르게 경제 회복을 일궈낸 일본은 20세기 초 떠오르는 신흥 강국이었다. 그 힘을 바탕으로 미국과 신사협정을 맺었고 이후 합법적으로 미국에 체류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났다.


일본과 미국의 협정에 편승한 사람들이 바로 한국인들이었다. 20세기 초 한국인들은 한 명 두 명 캘리포니아의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미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않았는데, 10년 뒤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도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그 빈틈을 대체한 것은 동남아인들이었다.


1965년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어서야 한국인들의 합법적인 이민이 가능해졌다. 초기엔 병원에서 일할 간호사들이 한국에서 대거 넘어왔고, 90년대부터 취업 비자를 통해 기술자들이 입국하기 시작한다. 실리콘밸리의 탄생과 더불어 말이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건너왔던 우리 부모 아니 조부모들처럼, 나도 그 '외노자'의 길을 향한 첫발을 딛게 되었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자식에게 더 많은 기회를 물려주기 위해'라는 염원을 가지고.


100년 전 그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산호세 미국 법인에서 열리는 서밋 참석차 출장 중'


S사의 상사나 동료들은 자주 산호세 출장을 다녔다. 미국 법인의 랩과 프로젝트를 함께하던 우리 팀이 주기적으로 크고 작은 오프라인 행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팀과 공유되는 그들의 개인 일정에 '산호세 출장 중'이라는 여섯 글자가 찍혀있을 때, 부러움인지 시기심인지 모를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질투는 나의 힘.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나는 산호세 출장과 인연이 없나...'


내 업무와 접점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제된 듯한 소외감을 늘 느껴야 했다. 보상심리였을까. 나는 논문 작성에 열을 올렸다. 자력으로 출장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나는 학회가 열리는 북미와 유럽 대도시들로 출장을 다녔다. 그깟 출장이 뭐라고 그땐 왜 그랬을까. 아이러니했다. 지금 산호세에 입성한 것은 내가 발표했던 그 논문들 때문이었다.


"부앙-"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마친 뒤 예약한 렌터카를 몰고 호텔로 향하며 비로소 실감했다. 이곳에 산호세라는 것을. 창밖으로 고즈넉한 풍광들이 휙휙 지나갈 때면 왠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고층 건물 따위는 없는 미국 소도시. 덕분에 하늘이 한눈에 들어왔다. 캘리포니아 특유의 끝없이 맑고 파란 하늘이었다.


'한 번쯤 출장으로 오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결국 인터뷰를 보러 오게 되는구나'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고 정신없이 잠에 빠져들었다. 낯선 동네라 긴장감이 들었겠지만, 비행으로 쌓인 피곤함을 이기지 못했다.




"안녕. 척척아. 반가워. 내가 예나빠야"


"오우. 만나서 반가워. 미국 오는데 불편함은 없었어?"


"전혀. 호텔에서 어제 하루 푹 쉬어서 컨디션도 아주 좋아"


I사의 건물 로비에서 만난 매니저 척척이는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밝고 인자하게 짓던 미소, 그는 예의 그 미소를 통해 미국인 특유의 친절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눈꼬리와 입꼬리가 서로 닿을 듯 환한 그의 웃음에서 아침부터 가졌던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그의 안내에 따라 인터뷰가 예정된 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길 때 사무실 인테리어 이곳저곳이 눈에 들어왔다. 널찍한 공간에 잘 정돈된 큐비클. 사무공간과 휴게실을 가르는 통유리를 통해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문득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가 예정된 회의실은 작고 단출했다. 화이트보드, 대형 TV, 콘퍼런스 콜 장비, 원탁, 의자, S사에서도 익숙히 보던 여느 회의실의 모습 그대로였다. 면접이 시작되기 전 척척이와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오늘 일정에 대해 알려주었는데, 오전에 두 세션이 있고 점심 식사 후 한 번의 세션이 더 있을 거라 했다.


인터넷 형님들의 말로는 실리콘 밸리 회사들의 면접은 기본이 5~6 세션이라 했다. 하루 꼬박 걸리는 면접을 끝내면 다들 탈진한다고 했다. 그런데 세 번의 만남으로 면접이 끝난다니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뷰 시간이 짧으면 진짜 이득일까? 내 실력을 다 발휘했다면 미련이 없을 것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짧은 시간이 더 아쉬울 지도 모른다.


"똑똑"


척척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노크와 함께 첫 번째 면접관이 들어왔다. 키는 작았지만 다부진 몸매를 가진 중년 남자였다. 러시아계 백인이었던 그는 I사랩 소속의 수석 연구원이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매는 매우 번뜩이고 있었다.




I사 본사의 건물을 빠져나올 때 해는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쌀쌀한 바람이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스산한 기운이 올라왔다. 늦가을 같은 겨울 날씨였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은 캘리포니아였다. 아무리 겨울이라도 절대 영하로 떨어지지 않는 지중해성 기후 지역.


방문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렌터카에 올라타자 비로소 안도감이 몰려왔다. 단 세 번의 세션이었지만, 30만년의 시간 같았다. 특히 두 번째 세션이 고비였다. 척척이의 연구팀원 3인이 동시에 들어왔고, 그 세명은 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심지어 본인들끼리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난상토론. 어느샌가 나는 그 토론의 중심에 있었고, 화이트보드에는 내가 그리고 그들이 써 내려간 글씨들로 빽빽하게 채워졌다.


방언 터지듯 쏟아져 나온 천조국 언어. 그것은 드래곤 J덕분이었다.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홀가분함이 밀려왔다. 적어도 후회는 없었다. 방언 터지듯 내 입에서 영어가 터져 나왔고, 킬러 문항 같은 질문을 받을 때면 전광석화같이 머리에 대답이 떠올랐다. 모두 다 평소의 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뭔가에 홀린 것만 같았다.



"예나 엄마, 나야. 면접 잘 봤어. 분위기 아주 좋았어. 될 것 같아"



호텔에 돌아와 척척이에게 감사 메일을 보낸 뒤,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아내에게 여전히 우쭐함을 숨기지 못했다. '인터뷰 내내 좋았던 분위기, 점심시간에 보여줬던 그들의 호의로운 모습, 면접을 마치고 매니저 척척이와 따로 가졌던 대화'로 '인터뷰 통과가 확실'하다고 나만의 망상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내는 여전히 '자만하지 말라'는 식의 반응이었지만, 남편의 들뜬 목소리에 적어도 같이 기뻐해주었다.


"수고했어요"


뒤늦게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곤 갑자기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이제 이민을 준비해야 하나. 그전에 S사에 퇴사 통보를 해야겠지. 비자는 I사가 지원해 준다는데 어떻게 진행할까. 미국 회사는 연봉 협상이 중요하다는데 그 방법을 또 조사해야겠네. 그렇게 행복회로를 미친 듯이 돌리느라 밤늦게 잠에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 하루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차에 앉아 어디를 갈까 잠시 고민하다 스탠퍼드 대학 교정으로 핸들을 돌렸다. 면접 결과에 따라 어쩌면 다시는 올일 없을지 모르는 산호세였다. 그래서 실리콘 밸리의 상징과 같은 곳에 발도장을 찍고 싶었다.


스탠퍼드 대학은 실리콘 밸리가 성장하게 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곳이라 했다. 1890년대 대학이 설립된 시절 학교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일자리를 찾아 동부로 떠나버렸다. 그래서 학교는 졸업생들을 인근에 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연구 단지를 세우고, 졸업생들의 창업을 장려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이 세운 회사가 현재까지 18,000개가 넘는다. 이 회사들이 해마다 벌어들이는 매출이 2.7조 달러에 달하고 지금까지 500만 개 이상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이 수치로만 따지면 세계 7위의 경제 규모. 그런데 이 전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많은 스타트업들은 스탠퍼드 대학이 VC(벤처 캐피털)들과 함께 투자한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교정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할수록 어떻게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1년 가까이 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갈고닦긴 했지만, 그건 뭔가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딱히 목표지향적으로 실리콘 밸리를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운명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일까.


생각에 잠기며 교정을 걷다 문득 한 건물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현재 미국 고교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대학 전공은 바로 CS(Computer Science), 즉 '컴퓨터 과학과'라고 한다. 인공 지능 붐을 타고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인기 직종이 된 지금, 미국 모든 대학의 CS 경쟁률은 하늘을 치솟는다. 바로 그 컴퓨터 과학과의 여러 랩들이 있는 스탠퍼드의 건물이었다.


대학원생 시절 이곳에서 쓰고 발표된 논문을 읽으며 연구원의 꿈을 키우곤 했다. 그 논문의 기술은 몇 년 뒤에 업계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곧 실리콘 밸리 대기업의 제품에 탑재되어 세계의 많은 이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연구원의 길에 들어서면서부터 늘 일종의 경외감으로 바라보던 곳이었다.


복도에 걸려있는 이들의 지난 프로젝트 사진들을 보며 향수에 잠겼다. 이들이 벽에 박제한 것은 과거의 영광이었겠지만 내게는 초심을 비춰주는 마음의 거울이었다. 짧은 영어로 논문을 뜨문뜨문 읽어 내려가던 스물아홉의 나의 모습, 그때의 난 십수 년 후 미국에서 연구원 자리에 도전할지 상상하지 못했다.


스탠퍼드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주제에 향수를 느낀다니 왠지 우습기 짝이 없었다. 마치 오랜 세월 누군가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어느 날 그 사람을 직접 대면을 한 그런 느낌이랄까.

그래도 아는 척 좀 해줘요. 이미지 출처=예나빠 태블릿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산호세에서의 하루를 마치고 나는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면접 분위기는 좋았기에 진심으로 인터뷰 통과를 믿고 있었다. 아내에게 전화로 부렸던 것은 호기로움도 허세도 아니었다. 산호세 희망회로에 의해 동작하는 믿음이었다. 연말연시 분위기와 겹쳐 나는 행복감에 빠졌다. 미국 엔지니어의 풍요로운 삶이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행복감이 뇌내망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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