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도 실리콘 밸리

욕망의 발자취

by 예나빠



'미국 이직 시장의, 미국 이직의 희망 고문'이라는 제목을 걸고 영양가 없는 글들을 계속 써 내려간 이유는 순전히 자기만족이었다. 방문자가 별로 없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방치한 이곳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어느 날부터 다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작곡가에게 떠오른 악상, 시인에게 떠오른 시상처럼 글감은 샘솟았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춤을 췄다.


처음에 내가 늘어놨던 이야기는 미국에서 벌어진 내 이직에 관한 썰이었다. 내가 이곳을 멀리한 이유가 내 신상에 벌어졌던 큰 변화 때문이라는 얄팍한 핑계를 대기 위해서였다. 그 신상의 변화라는 것도 개인의 안위를 위해 그저 조금 더 나은 밥벌이 수단을 찾아 나선 일에 불과했고, 그래서 거창한 명분과 목적 없이 그저 근자에 일어났던 일을 시간순으로 가감 없이 쏟아냈다.


그런데 왠 걸, 머리를 비운채 의식의 흐름에 따라 써 내려가 한 편 두 편 시리즈로 글을 발행하면서 설명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재미와 자기만족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그동안 일상에서 이 정도의 만족감도 느낄 일도 없었나라는 씁쓸함이 밀려들었다.


모 회사 유제품 카피처럼 엔지니어로서의 '생명 연장을 꿈'을 위해 건너온 미국에서 난 그저 하루하루를 충실히 때워가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비는 찾아오고 이를 어떻게든 수습하며 주어진 과업을 간신히 틀어막는 삶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미국병에 빠져 허우적대던 한국에서의 일상과 판박이였다. '천조국에 가면 다를 것'이라며 미국행 비행기에서 가졌던 자기 확신이 무색할 만큼.


미국이라고 다를 것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차피 사람들 사는데, 밥벌이하는 데는 다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문화가 다르다지만 한 조직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결국 니 거 내 거 밥그릇 싸움하고, 아웅다웅 지지고 볶게 되어있다. 국적 불문하고 인간의 DNA를 가졌다면 누구나 충실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남긴 글들은 과거에 가졌던 내 욕망의 발자취라고 할 수 있다. 생명 연장의 꿈, 더 하고 싶은 일, 더 나은 연봉, 더 그럴듯한 경력, 그 원색적인 욕구를 쫓아 국경을 넘었던 기억을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별다른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런데 그 솔직한 글쓰기가 내게 선물한 것이 바로 소소한 재미와 자기만족이었다. 심지어 과거의 나를 잠시 다시 대면하자 나는 일종의 위안까지 얻게 되었고, 내친김에 더 오래 전의 나의 모습까지 소환하게 되었다.


사실 그전까지 난 그동안 뭐라도 된 양 이곳에 자기 계발 글을 써 올렸다. 그 글들이 혹여 누군가에게는 '정보'로서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 글의 기저에 깔린 것은 내가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는 자기 과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엔지니어라면 한 번쯤 꿈꾼다는 그 실리콘 밸리에 그저 강력한 운을 타고 입성한 주제에 나를 마치 만렙의 능력자인양 포장했던 글들을 다시 읽으며 한없이 낯 뜨거워졌다.


'내일은 실리콘 밸리'로 묶은 내 과거로의 여행담은 그래서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는 글이 아니다. 미국 이직을 위한 정보로서의 가치도 없고, 자기 계발을 위한 동기 부여도 하지 않는다. 애초에 나는 이래라저래라 훈장질할 위치도 아니었다.


다만, 내 이 글들을 읽을 누군가에게 재미와 위안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평범한 아재 엔지니어의 철딱서니 없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잠시의 휴식이 되어주면 좋겠다. 혹여나 같은 시기를 살아가는 많은 직장인들에게 공감이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또 다시 걱정이다. 내일부터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면 어제까지 끝내지 못한 업무가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킬테고, 어떻게든 스케줄을 맞추려 아둥바둥거릴 모습이 벌써부터 눈에 훤하다. 아직도 익숙치 못한 영어로 누군가에게 면피성 변명을 늘어놓고, 어떻게든 수습되면 '이번주는 넘겼네'라며 한숨을 길게 쉬어댈테지.


엔지니어라면 한번 쯤 꿈꾼다는 실리콘 밸리라지만, 월급쟁이의 삶은 국적을 불문하고 도찐개찐이다. 월화수목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몸과 정신을 일터에 몰아넣지만, 때로는 끝나지 않는 과업으로 주말도 반납하길 일쑤니까. 그래서 가끔씩 '이러려 미국왔나'는 자조섞인 신세한탄이 절로 나오지만, 적어도 내가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니 이 동네에 온 것이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나보다. 아직까지는.




내일은 실리콘 밸리 (에필로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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