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별 No.1

미운 정 고운 정

by 예나빠


참 좋은 인연이다. 갚아야 해. 행복하게 살아. 그게 갚는 거야.
- 드라마 <나의 아저씨>



"왕공감 상무님,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지금 잠깐 회의실에서 뵐 수 있을까요?"


사내 메신저로 그룹장에서 말을 걸었다. 그는 "지금? 괜찮아"라며 짧게 답변을 주었다. 나는 임원 좌석 옆에 위치한 소회의실에서 그를 기다렸다. 생애 처음하는 퇴사 통보라니 괜스레 떨렸다.


"그래.. 무슨 일이야?"


"상무님, 사실 저 이번에 미국 회사에서 오퍼를 받아서 퇴직하게 되었습니다"


"엉? 그래?"


왕공감 상무는 잠깐 놀라는 표정이었지만 곧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후일 들은 바로는 내가 면담을 요청하는 순간 그는 직감했다고 한다. '이 녀석 이직하는구나'라고. 그동안 그룹장으로 지내면서 일대일 면담을 요청하는 조직원들의 열의 아홉은 '퇴사 통보'였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근데 왜?"


"아, 리서치를 하고 싶어서요"


내가 S사에 밝힌 그럴싸한 퇴사 이유는 결국 '연구가 하고 싶어서'였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 경력의 '별의 순간'은 연구소에서 조그마한 연구팀을 이끌던 날들이었다. 팀원들과 밤새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실험하고, 논문 쓰고, 학회에 나가 발표하면서 나는 결국 연구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럼 지난번 너에게 리서치를 계속 시키려 할 때 왜 안 한다고 했어?"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괜찮습니다. 상무님. 여기까지 인가 봐요".


그랬다. 난 그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연구소에 있던 시절, 팀의 존재 의미가 다했을 때 위로부터의 지시가 내려왔다. 내가 맡고 있던 팀을 해체하라고. 팀원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는 별다른 이의 제기 없이 순순히 이를 받아들였다.


회사로써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몇 년 내 시장이 열릴 것 같지 않은 아이템을 무한정 붙들고 있을 수 없었다. 당시 랩의 간판 프로젝트는 계획한 스케줄에 한참 뒤처져 있었고, 단 한 명의 일손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래 준비'라는 파일럿 연구팀의 명분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팀을 5년 동안 끌고 온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대반전은 왕공감 상무가 윗선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내 팀을 지켜주려 했다는 것이다. 팀에 최소 인원 한 명은 남기고, 부족한 연구 인력은 다른 랩과의 협력을 통하는 방법까지 모색했다. 그는 내가 끝까지 연구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괜찮다"라고.


팀 해체 지시가 내려온 순간 이미 마음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에 대한 원망이 아니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끝내 시장은 열리지 않았고, 5년간 붙들었던 연구 주제로 더 이상 회사를 설득할 수 없었다. 결국 당사자인 내가 의욕을 보여주지 않고, 협력하려던 타 랩의 연구원들도 뜨끈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왕공감 상무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때부터였다. 상황과 처지에 대해 그 누구도 원망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은 조금씩 식어갔고 회사에서 좌표를 잃어버리고 표류하게 된 것이.

x.png 포기하면 편해져... 이미지 출처=인터넷 밈을 베낀 예나빠 태블릿




"아, 상무님. 그건..."


퇴사 통보를 할 때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 아무리 해묵은 감정이 있다 해도, 다시 볼일 없다고 생각해 남아 있을 사람을 자극할 그 어떤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업계는 좁고 언제고 다시 만날 사람들이다. 서운한, 유감스러웠던 기억 모두 접어두고, 좋은 기억만 갖고 가는 것이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제1의 필요조건이다.


그런데 내가 말을 너무 아꼈다 생각했다. 나는 "리서치를 하고 싶어서요"라며 너무 말을 함축시켜 버렸다. 내 본심은 "학계와 업계에 영향력이 있는 미국의 선진 연구 기관에서 리서치를 하고 싶어서요"였다. 하지만, 이 말을 했다가 '뭐시라? 우리 글로벌 S사를 뭐로 보는 거야?'는 말을 들을까 나는 말을 쳐내고 쳐냈다. 그러니 '연구하고 싶어 미국 간다'라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는 말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왕공감 상무는 내 의도를 잘 읽었다. 내가 사업부에서 연구를 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 유학파 출신이었기에 내 '미국병'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렇게 S에서의 아름다운 이별이 완성되는가 싶었는데 그는 갑작스럽게 마지막 필살기를 시전했다.


"우리 산호세에 미국 법인 있는 것 알지? 그쪽 랩에 전문 리서치 조직은 없지만, 그래도 거기서도 연구는 할 수 있을 거야. 미국으로 보내줄 수도 있으니 생각해 보고 알려줘"


"아니.. 상무님 그게.."


그는 내가 바로 그 자리에서 고사할 것을 알았는지, 내 다음 말을 듣지도 않고 바로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난 3일 뒤 왕공감 상무와 같은 회의실에서 만나 "제안 감사합니다만, 카운터 오퍼를 요구할 의도는 없었습니다"라고 정중히 고사했다. 그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지 순순히 받아들였다. 사실 그의 제안에 대해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그럼에도 내가 3일이라는 뜸을 들인 것은 '장고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정'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생각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누가 봐도 명확했다. 미국까지 가서 본 인터뷰, 비자 발급을 위한 노력을 다 되돌리면서까지 결정을 번복할 이유는 없었다. 왕공감 상무는 믿을만한 사람이지만, 그가 한 약속이 회사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온전히 살아있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퇴사'를 입 밖으로 낸 순간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역시나 '아름다운 이별뿐'이었다.


이후 퇴사 절차는 더 윗 임원에게까지 올라가 결재를 받는 것이었고, 엄청난 회피기술을 펼치던 모 전무님과의 숨바꼭질을 끝으로 퇴사에 필요한 서류를 완성했다. 마지막 단계는 인사과 직원과의 면담이었다.


사실 내가 퇴사를 가장 먼저 통보한 곳은 인사과였다. 퇴사를 하게 되었는데,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문의였다. "그룹장, 팀장님께 결재를 먼저 받으시고, 이후 저희와 면담하시면 됩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퇴사자는 바쁘다. 회피기술을 펼치는 고위 임원들을 만나러 다녀야 하기에.



"이 수석님, 미리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어요. 저희도 미국 보내드릴 수 있는데.."


마지막으로 인사과와 면담을 가졌을 때, 인사과 직원 쿨쿨이는 '우리도 미국에 법인 있다'라는 말로 면담을 시작했다. 왕공감 상무의 말과 같았다. 그리고 그는 내가 그간의 사정을 가감 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묵묵히 듣고 있었고, 혹시나 내 퇴사가 조직 문화 때문인지 확인했다.


없었다. 사업부로 전배 온 지 몇 달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사업부에 어떤 유감도 없었다. 내 퇴사의 이유는 어쩌면 연구소 시절에 있던 일 때문이었다. 면담을 마친 그는 친절히 이후의 서류절차 대해 알려주었다.




'이 수석이 지금까지 한 일은 회사에 큰 기여였다고 생각합니다'


S사 퇴사 며칠 전, 왕공감 상무는 그룹 전체 메일을 통해 나의 퇴사를 공식적으로 알렸다. 그리고 사내에서 조촐하게 준비한 송별식을 예고했다. 그리고 그 메일에 그렇게 한마디를 첨부했다. 내가 S사에 큰 기여를 했다고. 그가 정말 그렇게 생각했는지, 아니면 퇴사자에게 남기는 형식적 덕담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이라고 뭐 특별할 것 같니?' '거기 간다고 네가 성공할 것 같아?'라며 퇴사자들에게 빈정대는 임원들이 즐비한 회사에서, 그는 퇴사자의 앞길을 기쁘게 축하해 주는 보기 드문 임원이었다. 덕분에 나는 좋은 감정만 남길 수 있었다.


사업부 전배 이후 보냈던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사실 그룹의 반 이상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사람들. 송별회 때야 비로소 접점이 생겨 처음으로 인사를 했다. 어색한 인사와 동시에 '축하드립니다'라며 말을 들을 때 괜스레 미안해졌다. 몇 달이라는 시간 동안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사업부로 흩어진 연구소 동료들, S사에 근무 중인 학교 선후배들, 기술 이전을 통해 알게 된 사업부 엔지니어들, 아직도 연구소에 남아있는 옛 전우들까지, 사내 지인들에게 인사하러 다니느라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퇴사 당일이 되자, 사내 지인 모두에게 퇴사의 변을 알리는 메일을 보냈다. 축하와 격려의 답장이 밀려들었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지만, 모두 소중한 인연들이었다.


그룹원들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랩을 빠져나왔고, 1층에서 마지막으로 갖고 있던 사원증을 반납했다. 11년이라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S사에서의 내 정체성이었다. 나는 지금 비록 새로운 기회를 찾아 이곳을 떠나지만, 여기서 보냈던 시간은 앞으로 쉽사리 잊힐 것 같지 않았다. 'S사라 자랑스럽다'라는 낯간지러운 말까지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내 생애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이고, 결국 천조국에게도 통할 수 있는 경력을 만들어 준 곳이니 말이다.


지하에 있는 사내 주차장을 걸으며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나 엄마, S사에서의 마지막 퇴근을 지금 막 했어. 정말 이곳과 이별이야.."

"대박! 기분이 어때?"


"응, 시원할 줄 알았는데, 섭섭한 게 훨씬 많네.."

"그래, 미우니 고우니 해도 어느새 자기 거기서 정이 많이 들었던 거야. 그런데 알아? 그거 앞으로 미국에서는 다시는 못 느낄 찐 감정일 거야"


"그러게..."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나는 그렇게 차를 몰고 S사의 건물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살짝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미국 이직의 희망 고문 (프리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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