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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Dec 06. 2023

궁극의 스킬셋 - 내려놓기

기억하자. 일은 밥벌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연말은 미국 회사들도 평가철이다. 현재 근무 중인 A사의 평가 절차는 본인 평가, 다면 평가, 매니저 최종 결정으로 진행되는데, 이는 한국에서 근무했던 S사의 평가 시스템과 상당히 유사하다. 연초에 KPI(Key Performance Index, 성과 지표)를 설정하고 연말에 달성도를 따져 고과를 결정하는 건 어딜 가나 대동소위하다. 사실 직원의 성과를 가늠하는 데 있어 목표 설정, 달성도 확인 외에는 딱히 별다른 방법이 없기도 하다.


실리콘 밸리의 빅테크들은 OKR(Objectives and Key Results)이니 뭐니 하며 선진화된 평가 시스템을 사용한다 하는데, 결국 큰 틀에서 전통적인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평가 주기나 방식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평가에서 가장 민감한 것은 각 등급별 강제 할당이 있는 상대 평가방식인가 정도인데, 그것도 그 부작용이 심해서 실리콘 밸리에서도 거의 사라졌고, 최근 한국도 절대 평가방식으로 바뀌어가는 추세다.



평가철에 맞춰 회사에서 '본인 평가 기간'이라며 공지 메일이 왔다. 주어진 기간 내에 1년간의 성과를 온라인 시스템에 기입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본인의 등급을 입력해야 한다 (어찌 한국에서 했던 방법과 이리도 똑같은지 모르겠다). 


그런데 한국에서든 미국에서든 '본인 평가'라는 것을 할 때면 참 계면쩍기만 하다. 기억을 쥐어짜고 영혼을 끌어 모아 성과를 포장한다. 본인 등급은 무조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높게 책정한다. 겸양의 미덕 따윈 사치다. '아, 내가 생각해도 내 성과가 Outstanding까지는 아니니, 그 다음인 Very Satisfactory로 입력해야겠다. 매니저 보기에 내가 더 잘했다 생각하면 올려주겠지'라는 생각은 그저 희망 회로를 돌리는 것이다.


매니저는 팀원이 기입한 평가 등급 이하로 주면 줬지 그 이상은 절대로 주지 않는다. 내가 나를 B급으로 생각하는데 남이 A급으로 생각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인 평가는 무조건 셀프 올려치기다. 그런데 올려치기도 적성이 맞아야 하는 법인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할 때마다 늘 계면쩍었다. 충분히 뻔뻔해질 만한 때도 되었건만 말이다.



그런데 미국에 온 뒤 어느 때부턴가 이 인사 고과라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본인 평가에서 아무리 셀프 올려치기를 해도 결국 최종 고과는 내가 최초에 생각한 내 적정 등급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그래서 눈을 부라리며 쓸데없이 힘을 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연차가 쌓이며 요령만 알게 된 것인지, 평균 정도의 성과는 어찌어찌 계속 내고 있다. 저성과자로 분류되지 않을 만큼은. 


미국에서 두 회사를 다니며 몇몇 팀을 거쳤지만 일 못하는 팀원들을 본 적이 없다. 실리콘 밸리, 전 세계에서 온 탑티어 엔지니어들이 득실대는 곳이다. 정글과 같은 이곳에서 최상위는 아니어도 평균 이상이면 이 아니 훌륭하지 않은가. 


언어 장벽, 유리 천장에 막혀 야망을 버리고 조직에 묻어가는 듯 태세전환으로 비칠 수 있지만, 사실 어느 시점이 되면 이렇게 내려놓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일'이라는 것이 생계를 위한 밥벌이 수단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11년간 근무하면서 눈앞에 닥친 미션을 달성하고자 미친 듯이 내달린 적도 있었다. 상하반기 모두 최상위 고과를 쟁취하고 이듬해 큰 폭의 연봉 상승도 맛봤다. 회사가 주는 당근에 더욱 일에 매진했고 나와 가족의 시간은 점차 사라져 갔다. 


사람은 멀리 내다볼 수 없기 마련이다. 지금 내 눈앞에 닥친 일에 데드라인에 걸리게 되면, 일이 내 삶의 최우선 순위로 자리 잡는다. 놀아달라는 아이를 '미안, 나중에. 아빠 바빠..'라며 돌려보내고, 육아, 가사는 모두 아내에게 미룬다. 주말에 출근하느라 집안 대소사에 불참하고, 건강 관리를 소홀히 하다 온갖 성인병에 잠식된다. 그 순간만큼은 그놈의 일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니, 중요하다고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 되돌아보면, 그때는 그렇게 위급하고, 중요해 보였던 '일'이 정말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가족, 건강, 시간, 믿음, 신념, 사랑 절대적인 내 인생의 중요한 가치보다 앞에 둘만큼은 아니었다. 뒤늦게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그랬나...'라며 자조 섞인 푸념을 일삼아도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미국에서 현재 직장으로 이직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 전 직장에서 하던 업과 다르고, 조직 문화도 상이해서인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러닝 커브(Learning Curve)가 끝나가자, 매니저는 하나둘씩 내게 일을 맡겼고 그 일은 꽉찬 스케줄로 잡혔다. 


두 번 정도의 크런치 모드(Crunch Mode, 비상 업무 시간)에서 나는 하드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미국엔 야근이 없다는 것은 쌩구라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유럽의 팀원들은 시차 따위는 무시하며 마치 같은 시간대에 있는 듯 끊임없이 소통하며 일했다. 


나는 또다시 착시에 빠졌던 것이다. 일이 몰려들 때면 어떻게든 이를 수습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러나 크런치 모드에 희생된 나와 내 가족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 하루 8시간 근무시간을 지키고 퇴근 후 철저히 일에서 멀어지기로 했다. 이런 내려놓기를 잘하기 위해서는 끝내지 못한 일에 대한 걱정, 불안함과 싸울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용기는 '내 한계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일과 삶을 분리해내는 연습. 내 삶의 더 중요한 가치를 지켜내는 연습. 어쩌면 그 외줄타기가 엔지니어에게 가장 필요한 궁극의 스킬셋일지 모른다. 하완 작가의 책제목이 생각나는 밤이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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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오덕 엔지니어 성장 로드맵 - 한국의 공학도/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연재중)

미국 오기 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 엔지니어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원/엔지니어에 대한 정보 전달


에세이

내일은 실리콘 밸리 - 어느 중년 엔지니어의 곤궁한 실리콘 밸리 이직담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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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작은 메세지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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