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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Aug 31. 2023

우리는 왜 잡무가 많을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왜 하필 나냐고


미국 법인에 2주간 출장을 다녀온 W가 회사로 복귀했다. 출장 갔던 일이 잘 풀렸던 것일까. 아니면 한국에서 매일 야근만 하다가, 캘리포니아의 따사로운 햇살에 원기라도 회복한 것일까. 구내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아보였다.


"W수석, 출장 간 일이 잘 됐나 봐요?"


"뭐 그럭저럭요. 무엇보다 하루종일 일만 할 수 있어 좋았어요. 일단 페이퍼 워크(Paper Work)가 없잖아요"


출장지에서 본인 업무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던 W의 말에 왠지 쓴웃음이 났다. 당연한 일에 기쁨을 느껴야 하는 웃픈 현실 때문이었다. 본사에서 온갖 잡무에 시달렸던 W. 그가 출장지에서 미국식으로 일과를 보내다 보니 업무를 방해하는 어떤 요소도 없었다고 한다. 현지 엔지니어들과 미팅, 본사에서 들고 간 코딩거리가 전부였다. 당연히 야근도 없었다. 간간히 본사와 컨퍼런스콜도 했지만 예정된 일과 중 하나였다.



한국회사에서 잡무는 필수?


야근을 부르는 8할 이상의 원인이 잡무때문이다. 일단 전 직원은 주중엔 한 주를 정리하는 주간 보고를 쓴다. 팀장은 팀원의 주간 보고를 취합하여 팀 주간 보고를 쓰고, 팀 주간 보고가 모여 부서장의 주간 보고가 된다. 팀장들은 돌아가며 손 안 대고 코 풀기 좋아하는 부서장의 주간 보고를 대신 편집한다. 분기나 반기별로 부서에 중요한 보고(임원, 사장단 보고)가 잡히면, 부서장과 팀장들은 몇 주 전부터 합숙을 방불하는 발표자료 작성기간을 갖는다. PPT 분할 작성, 팀별 부서장 리뷰, 지적 사항 수정의 무한 반복이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피보고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 사장님이 차트나 그림을 선호하는지, 장황한 한국어 표현은 싫어하는지, 어떤 폰트 종류와 크기를 선호하는지. 부서 간 넘나들며 구전된 작성 지침을 숙지하는 것은 필수다. 이 전 과정에 참여하면 파워포인트의 숨겨진 모든 기능을 알게 되는 진정한 PPT 장인이 된다.


역시 직장인의 꽃은 기획서와 보고서다. 평소에 쓰는 주간 보고와는 결이 다른 프로젝트 보고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입안하거나 종결할 때, 기획서 보고서는 반드시 남겨야 한다. 기획서는 마케팅, 인사, 총무, 전략부서 인력들에게 중요하고, 보고서는 연구 개발 실무자들에게 중요하다. 한번 쓰게 되면 수십 페이지가 훌쩍 넘는다. 과제를 성공적으로 착수하거나 종료하려면 문서를 시스템에 등록해야 하는 것은 필수. 생략하면 결재 자체가 안된다. 설사 한 번도 열람되지 않더라도, 반드시 남겨야 하는 것이 바로 보고서. 팔만대장경과 조선왕조실록을 남긴 대한민국은 역시 위대한 기록의 국가.


회의는 어떤가. 팀 주간, 부서 월간, 유관 부서와의 동기화와 같은 정기 회의부터 다양한 이유로 갑자기 소집되는 회의, 임원 공지 사항 전달, 브레인스토밍, TF 차출, 외부 협력사 미팅, 출장 보고회, 전파 교육, 세미나, 경쟁사 동향 분석, 특허 분석 등등 예측 불가한 회의도 수시로 발생한다. 직급이 오르면 오를수록 회의의 양과, 시간을 때우는 스킬도 높아진다. 회의들이 잡히면 주니어들은 덩달아 바빠진다. 참석자, 프로젝터 확인, 회의실 예약, 다과나 커피 준비, 회의 자료 복사 및 공유 등등 온갖 잡일을 해야 한다.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회의록을 작성, 전파하는 일도 이들의 몫. 하지만, 직급과 상관없이 많은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얻게 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바로 축생에 대한 공감능력.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IT 회사들은 특별히 해야 될 잡무들도 있다. 모니터, PC, 서버, 실험 장비를 교체하거나 새로 구입할 때 구매 프로세스에 따라 다양한 서류 작업을 진행한다. 서버나 장비가 입고되면 팀에서 전담 관리할 인력이 할당되고, 관리자는 사용자 계정 생성, 디스크 관리 등등 서버의 총체적인 관리를 맡는다. 관리자의 유일한 낙은 슈퍼유저 비밀번호 독점, 하지만 어느샌가 암암리에 팀 내에 공유된다. 사내의 모든 PC, 서버, 장비들은 일련번호, 소유자, 부여일 등등이 태그로 붙고, 전부 시스템으로 관리된다. 사무실을 이전하거나, 전사 재물조사 기간이 되면 여기저기 사무실을 뒤엎는 좀비들이 나타난다. 사라진 자신의 재물을 찾아 헤매는 슬픈 영혼들. 서버 관리자로 몇 년 일하게 되면 리눅스의 장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 한국 회사에서 단합은 생명이고, 단합은 곧 회식이다. 회식은 척박한 한국의 직장 문화 위에 곱게 핀 한 떨기 꽃. 주간에 시작된 업무는 야간의 회식으로 완성된다. 지금은 사어가 되었다지만, 베이붐 세대에 태어나셨던 어느 높으신 분께서 창제하신 유명한 문구 '회의는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은 오늘도 유효하다. 연장된 업무 중에 마시는 술 한잔. 의외로 달콤하다.


반기나 분기별로 가는 웍샵, 단합대회는 어떤가. 소속감을 고취하고, 결속력을 다지며, 애사심을 뿜뿜케 한다. 회사는 고맙게도 부서별로 예산을 편성한다. 안 쓰면 사라지는 예산. 분기가 끝나가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부서장은 ‘에이전트'라 불리는 부서 총무에게 급하게 일임한다. 에이전트는 업무를 하다 말고 갑자기 바빠진다. 단합대회 프로그램과 장소 섭외, 2차 부서 회식 자리 예약 등등으로.


기록의 국가답게 단합대회도 보고서로 남겨지고, 결과는 부서별로 발표된다. 해맑게 웃고 있는 우리 얼굴이 발표 PPT에 삽입된 것을 보면 왠지 뿌듯하다. 전국의 명승지, 맛집, 이벤트 프로그램 등 귀한 정보가 공유되는 뜻깊은 자리다. 에이전트는 경조사, 회식, 웍샵, 야유회 등 팀에서 크고 작은 이벤트가 발생하면 준비를 전담하는 고급 인력. 임기중엔 상위 고과는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점도 많다. 모든 팀원을 무조건 1:1로 만날 수 있다. 사인받으러, 의견 수렴하러 굽신굽신 굽신굽신. 에이전트에 선임되면 임기내내 진정 요원이 된 듯한 기분이 든다. 총 대신 펜과 종이를 들고 다니지만.


또한 한국 회사는 임직원의 의견을 항상 경청한다. 이를 위한 독특한 제도를 도입하는데 바로 설문조사다. 일종의 만족도 분석이다. 본인의 업무가 얼마나 중요하게 느껴집니까. 업무에 얼마나 도전감이 듭니까. 일상적인 업무 시 얼마나 자주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업무에 걸맞게 충분한 급여를 받고 있습니까. 본인의 의견이 동료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칩니까 등등. 아주 다양한 질문이 객관식 문항을 통해 제공된다. 평소 전혀 생각하지 않던 부분까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드는 아주 귀한 시간. '전혀 그렇지 않다'부터 '매우 그렇다'까지 5~7 단계로 매우 세분화되어 있다. 점수 집계에 도움을 주고 싶지 않았다던 동료 K는 전 문항 '보통'을 찍었다.


설문조사를 통해 평소에 하고 싶은 의견을 마음껏 개진할 수 있다. 기타 의견 주관식 문항을 통해서다. 익명성은 당연히 보장된다. 전 직원들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걱정 없이 불만을 쏟아낸다. 물론 온라인 설문 시스템 접속해 답을 작성하는 내 PC가 고유의 IP 주소를 갖고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 한국 회사가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에 뛰어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맞다. 한국에서 회사는 조직이고 조직은 위계와 질서다. 위계와 질서는 규칙을 부른다. 규칙은 곧 룰이고, 룰은 곧 매뉴얼. 매뉴얼은 시스템이자 문서다. 따라서 회사는 태생적으로 전방위적으로 문서화를 한다. 그리고, 문서화는 필히 인력 동원을 부른다. 그 과정에서 형식이 강조되고, 회의가 늘어나며, 잡무가 파생되면서, 누군가에게 차곡차곡 쌓이는 일거리가 된다. 오랫 기간 동안 정착된 한국의 조직문화, 강조된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이러한 문서 작업과 잡무를 늘려온 것이다.


동료였던 W가 미소 지었던 이유는 이러한 잡무로부터 2주간 완벽하게 격리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업인 연구 개발만 집중할 수 있었다. 내가 미국으로 이직한 후 한동안 느꼈던 '해방감'도 W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잡무가 없다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 이젠 그 상대적 '해방감'도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잡무는 전문가에게


똑같이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회사고, 조직인데 왜 미국은 잡무가 없을까. 흔히들 말하는 조직 문화 때문이다. 미국은 위계보다 역할, 형식보다 내용을 강조한다. 이것이 결정적 차이를 부른다. 우리에게는 누군가 부수적으로 해야 할 '잡무'지만, 여기선 그 일을 '본업'으로 하는 누군가가 있다. 즉, 회사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전담 인력이 있는 셈. 따라서 '이 일을 내가 왜?'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모두 자신의 본업을 하기 때문이다. 서버, 슈퍼컴퓨터, PC 모두 전담 인력이 담당한다.


매니저, 테크 리더, 실무 엔지니어의 역할은 공식적으로 구분되어 있다. 높으신 분께 드리는 중요한 발표가 잡혀도 발표자가 자료를 만드는 것은 국룰이다. PPT에는 전달하려는 내용만 담는다. 표현이나 양식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미국도 당연히 기록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기록 자체도 자신의 업인 누군가가 있다. 제품 사양 스펙이나 매뉴얼을 쓰는 것은 아키텍트라 불리는 전담 엔지니어가 담당한다. 정보는 필요시 수시로 갖는 1:1 미팅을 통해 사람과 사람사이를 흐른다. 필요하면 누구나 기록하고 공유하고 전파한다.


팀워크 향상을 위한 회식, 웍샵, 단합대회? 없다. 간혹 교류회, 다과회 등이 있지만 사내 라운지에서 이뤄지고, 행사도 총무 부서에서 주관한다. 회의는 있다. 아니 많다. 다만 팀 주간 회의, 실무자들 간 화이트보드, 매니저와의 1:1, 기술 발표 등 순수히 업무에 관련된 미팅들 뿐이다. 대규모로 불려 다니는 큰 사내 행사가 있다. 바로 올핸즈미팅(All Hands Meeting). 분기별로 사업 실적이 외부에 발표되면, 경영진이 회사의 방향, 비전을 설명하고 직원과 Q/A를 갖는다.. 직원이 회사를 이해하는 유익한 자리다. 위계나 형식이 사라진 조직에서는 잡무는 최소화되고, 남은 잡무조차도 전담 인력이 담당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잡무가 없어(보여)도 회사는 잘만 굴러간다.


"잡무에 혼을 담아라"라는 어느 임원의 말은 그래서 허망하다. 아무리 낮은 직급이라도 누군가의 고귀한 혼을 담는 그릇이 되어줄 잡무는 없다. 정 그러시다면, 회식, 단합대회, 행사에 들어가는 예산을 모아 혼을 담아줄 잡무 전문가를 채용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길이 아닐까.


잡무에 혼을 담는 나를 쓰라고. 이미지 출처=드라마 <직장의 신>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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