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빠 Jul 17. 2022

미국에서 찾아온 두 번째 커리어 고민

알고 보면 한국에서 보낸 시간은 사실은 내게 참 소중했다


미국에 오기 전 11년 동안 한국의 대기업 연구소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 마지막 직급은 수석 연구원(Principal Research Scientist, 부장급), 보직은 AL(Activity Leader)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삼성 종합 기술원의 조직 체계는 공식적으로 기술원(원장, 사장급) > 연구소(소장, 부사장급) > 랩(랩장, 전/상무급) > 그룹(그룹장, 상무/부장급)으로 계층이 존재했다. 그룹에는 4~5개의 연구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곤 했다. 편의상 그룹은 각 프로젝트별로 책임자를 비공식적으로 두었다. 사실상 그룹장이 각 프로젝트를 세세히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내가 맡았던 AL이었다. 


AL은 사실 좀 애매한 위치였다. 실무자와 관리자의 경계쯤에 있었기 때문이다. 늘 인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팀 관리에 필요한 관리업무를 모두 맡으면서도 프로젝트의 실무도 일정 부분 병행해야만 했다. 공식적인 보직이 아니기 때문에 관리자로서의 권한도 크지 않았다. 팀원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권, 새로운 인력을 뽑을 수 있는 인사권도 없었다. 주간에는 발표자료, 보고서 작성, 유관 부서와의 많은 회의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석식 후 야간이 되어야만 실무를 할 시간이 주어졌다. 야근이 많을 수밖에 없던 자리였다. 


그리운 삼성 종합 기술원


상황이 그러하면 스스로 직을 내려놓고 실무만 하는 자리로 돌아올 법도 하지만 그것도 어려웠다. 보직이 없어지는 순간 조직에서 위치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담당하는 '부'가 없는 부장님을 생각해보라). 조직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 그룹장 > 임원의 테크트리를 타기 위해서라도, AL은 반드시 거쳐야 했던 자리였다. 그래서, 모든 AL들은 쌍코피를 터트려가며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관리자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대인 관계는 서투르고, 화려한 언변, 발표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정치질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관리업무에 필히 수반되는 페이퍼 워크를 해야 할 때는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나마 남들보다 잘했던 것은 업계 트렌드를 조기에 파악해서 연구 주제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그것으로 새로운 과제를 제안해 AL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AL로 5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팀원들은 모두 똑똑한 능력자들이었다. 덕분에 프로젝트 실적은 잘 나왔고, 기술이전도 수차례 할 수 있었다. 팀은 해마다 연구 결과를 잘 냈지만, 늘 그렇듯, '연구'와 '제품화'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연구 결과가 빛을 보기 위해서는 시장보다 느려서는 안 되지만, 결코 빨라서도 안된다. 당시 시장은 우리가 개발했던 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시장성 부족'이라는 이유로 내가 5년간 이끌어 온 연구팀은 조직개편과 함께 자연스럽게 정리 수순을 밟았다. 


첫번째 고민. 관리자 vs 실무자. (사진출처: unsplash)


그즈음이었다. 커리어에 대한 첫 번째 고민이 찾아온 때가. 결국 은퇴까지의 남은 커리어를 실무자로 살기로 결심했다. 단, 나는 그때 한국이 아닌 미국을 택했다. 아니, 정확히는 한국은 그 선택지에 존재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겪은 한국의 조직 문화에서는 그랬다. 자의든 타의든 관리자에서 실무자로 돌아가는 순간 다음 기회란 존재하기 않을 것이니까. 나는 그렇게 완전한 실무자로 돌아가기 위해 미국으로 이직을 시도했다. 다행히 그때까지 난 실무를 놓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이직을 위한 경력을 살릴 수 있었다. 


그 시점이 내 인생에서 미국행 티켓을 끊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만일 내가 실무형 관리자에서 성공해 그룹장 레벨로 올라갔다면, 이후부터는 실무를 놓고 완전한 관리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다음 단계인 임원을 바라보는 조직에 최적화된 삶. 1%도 안 되는 확률에 남은 생을 걸어야 하는 바로 그 삶 말이다. 만일 그룹장이 안되었다면 (그 확률이 훨씬 높지만) 상황은 더 안 좋았을 것이다. 은퇴까지 어떻게든 버텨내야 하는 삶이었을 데니 말이다.




"그토록 원 없이 실무만 하고 지내니 행복했나요?"


40대 중반에 미국에 건너와 5년간 실무자로 살았다. 지금 내게 누군가 '행복하냐'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일단 지금까지는..'이라고 대답할 것 같다. 기술 변화에 대응만 잘하면 은퇴까지 실무자 커리어를 지켜내는 것도 불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한국에서 처럼 젖은 낙엽과 같은 삶을 살 필요도 없다. 연봉에 대해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터미널 레벨 (terminal level, 진급에 대한 압박도 없으며 해고될 걱정이 없는 직급 단계)에 머물며 직장생활을 (즐기며)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떨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은퇴까지 실무자로 살겠다는 결심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개별 기여자(IC, Individual Contributor)의 커리어에도 두 가지 길이 존재한다: 1) 현재에 만족하며 일에 욕심부리지 않는 삶, 2) 일의 범위를 확장해 리더급으로 성장하는 삶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만 해도 첫 번째 길을 가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동안 워낙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서 실무자로 근무하고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두 번째 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 실무자 조합이라 갖게 되는 고민인지 모른다. 한국이었다면 불필요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무조건 관리자나 리더의 삶을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내 인생 두 번째로 찾아온 커리어 고민의 시기다. 


두번째 고민. 어떤 실무자로 살 것인가. (사진출처: unsplash)


오랜만에 내 CV(Curriculum Vitae,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그동안 난 이력서에 개별 기여자로서의 발자취만 남겨 두었다. 지원해왔던 직무가 프로젝트 실무 경력만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걸까? 관리자나 리더 직무로 전환하거나 지원한다는 가정하에, 한국에서 했었던 실무형 관리자로서의 이력을 함께 추가하기 시작했다.


기억을 더듬어 한 줄 한 줄을 채워가다 보니 경력 사항이 두배로 늘어났다. 연구 팀을 처음(scratch)부터 꾸리고, 팀원을 모으고, 프로젝트를 셋업 하고, 로드맵을 설정하며, 사내 사업부 고객을 유치했던 이력들. 국내/해외 대학 연구실과 협력 과제를 진행하고, 해외 연구소 리더들과 차기 제품 로드맵에 대해 소통하던 이력들. 연구소의 타 랩 리더들과 차기 과제 발굴하고, 회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전사 T/F, 새로운 사업화 아이템 발굴을 위한 W/G에도 참여했던 세세한 이력들. 


기억들을 돌아보며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생애 경력 경로에서 가장 꽃을 피워내는 그 시기에, 난 한국에서 실무형 리더로 시간을 보낸 것을 상기하게 되었다. 팀원들을 독려하고, 함께 논문을 쓰고, 사업부에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기술을 세일즈 하던 그 시간. 그동안 난 미국에서 실무자로서 살면서, 한국에서 관리자로 보냈던 그 시간이 의미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어쩌면 그 관리자로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향후 내 인생, 내 커리어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에서 내 인생 두 번째 도전을 꿈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토록 벗어나길 원했던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들 덕분이다. 내 인생, 참으로 기구하고 드라마틱하다. 



- 예나빠



예나빠 브런치 매거진 소개


미국 연구원의 길 - 미국 기업 연구소, 연구원에 대한 정보 전달 잡지

미국 오기전에 알았으면 좋았을 것들 - 미국 진출을 원하는 한국 경력자들을 위한 자기 계발서

미국에서 일하니 여전히 행복한가요 - 미국 테크 회사 직장 에세이

산호세에서 보내는 편지 - 실리콘 밸리에서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보내는 메세지

어쩌다 실리콘 밸리 - 팩션 형식으로 작성될 실리콘 밸리 입성기 (예정). 


미술관에 또 가고 싶은 아빠 - 미술 + 육아 에세이

그래픽스로 읽는 서양 미술사 - 그래픽스 전공자 시선으로 바라본 미술사. 교양서.


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스탠퍼드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