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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Dec 12. 2023

실리콘 밸리의 N잡러들

부업이 아닙니다. 본업이 N개


잡 저글러(Job Juggler: 동시에 N개의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는 사람들). 이 용어가 등장한 지는 꽤 되었지만, 최근 특히 이에 대한 기사가 많이 보이는군요. 판데믹 이후 미국 테크 업계에서 원격 근무가 일상화되다 보니, 집에서 멀티 잡 뛰는 게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지켜보는 상사나 동료가 없으니 말이죠.


그런데 주말이나 퇴근 후 부업을 하는 전통적인 N잡과는 좀 다릅니다. 2개 이상의 회사에 정규직으로 고용되어 정규 업무 시간에 복수의 회사일을 동시에 한다는 이야기죠. 다른 회사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비밀입니다.


잡 저글러들의 커뮤니티에서는 슬기로운 N잡생활의 노하우까지 공유하며 서로를 독려한다는군요. 이들은 자신이 고용된 회사들에 순번을 매겨 J1, J2, J3...라고 부른다 합니다. J6까지 가진 회원도 있다는군요 (헉). 커뮤니티에는 잡 저글링으로 연 1M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자랑글도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들의 홈 오피스에는 4~5개의 노트북에 연결된 각각의 모니터들이 책상 가득하게 펼쳐집니다. 키보드를 넘나들며 시분할 프로세싱을 하죠. 멀티 태스킹을 수행하는 운영체제의 사람 버전입니다. 이들에게 마우스 지글러(Mouse Jiggler, 자동으로 마우스 클릭해 주는 장치)는 필수품입니다. 어떤 노트북 메신저에도 '자리비움'으로 뜨면 안 되니까요. 


J6를 가진 회원의 홈 오피스. 연간 120만 불을 번다고...


복수 회사의 일을 동시에 하다 보면 당연히 애로 사항이 발생하는데요. 가장 흔한 것은 회의 시간이 충돌하는 것이죠.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댈 수도 있지만, 숙련된 잡 저글러들은 이어폰 두 개로 해결한다고 합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 두 개를 준비해 각각 왼쪽, 오른쪽 귀에 하나씩 꼽고 동시에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죠. 집중해서 자신이 이름이 언급되는 때만 잘 들으면 된다나요. 와. 신박합니다. 


두 번째는 회사에서 일주일에 며칠씩 회의나 대면 근무를 요구하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전일 나가있을 수는 없고, 회의 시간에 맞춰 출근해 몇 시간씩 일하다 돌아오는 거죠. 이때 중요한 것은 가방을 메지 않고 노트북만 손에 들고 회의실에 나타나는 것이죠. 동료들은 출근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그저 회의에 들어왔다 나가는 걸로만 안다는군요.


다만, 이런 꼼수가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잡 저글링을 하던 A군은 최근 회사들 중 하나가 자신의 LinkedIn에 회사 이름을 태그 하길 요청했다 합니다. 당연히 함께 일하고 있는 다른 회사에 발각될 위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LinkedIn 계정을 휴면으로 돌렸다고 하죠. 


더 심각한 경우가 있습니다. J1, J2, J3의 일을 동시에 하며 짭짤하게 수입을 올리고 있던 B군은 최근 큰 고민이 생겼다고 합니다. B군의 J1사 직장 동료 C군이, 최근 J2사로 이직을 한다며 퇴직인사를 했다 합니다. C군은 J2사로 출근을 하면 전 직장 동료 B군을 또 만나게 될 것 아니겠어요? J2사의 일이 가장 짭짤했다는 B군은 J2를 어쩔 수 없이 퇴사해야 하는 상황이 너무 억울하다고..



잡 저글러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약속된 진급도 안되고, 보상은 적다. 인플레이션으로 물가는 치솓았는데 월급은 제자리. 여러 회사에 걸쳐두면 레이 오프시 리스크 헷지도 된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하고, 집도 사야 하고, 애들 학비도 벌어야 하고... 등등등. 


한편으로 이해는 갑니다. 회사에 충성해도 돌아오는 것은 없고, 회사에 이용당하느니 내 시간을 활용해 더 많은 '돈'이라도 챙기자는 것이죠. 자신의 성과에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생각하면, 워크 에씩(Work Ethic, 직업윤리)이 생길 리 만무하겠죠. 내가 시간을 잘 활용하거나, 더 시간을 투입해서 멀티 잡을 뛰어도 싱글 잡 직원들 못지않게 결과만 내주면 되지 않겠어요? 


하긴 한국에서의 경험을 보면 주 40시간이 아니라 80시간씩 일하던 때도 있었는데 (심지어 주 100시간을 강조하던 임원도 봤습니다), 당시 일하던 절대 시간만 보면 여기서 J2는 너끈히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은 시켜준다고 해도 못합니다. J1도 제때 끝내면 다행인걸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미국으로 건너온 이유는 일을 가능한 적게하고, 나와 가족과의 시간을 사수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죠. 



잡 저글링에 법적인 문제는 없을까요. 한 회사와 고용 계약을 체결 시 고용주 입장에서는 당연히 주 40시간 근무 시간은 온전히 자신의 회사 업무에 집중하는 것을 가정하죠. 다만, 우리나라처럼 겸직금지 조항이 명문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있다고는 합니다. 


명문화되어있지 않다 해도 회사가 판단컨대 고용 계약을 파기시킬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한 클라우드 회사는 최근 이직한 직원이 전 직장을 퇴사하지 않은 채 멀티 잡을 뛰고 있었다는 이유로 해고했다고 합니다. 직업윤리 훼손이라는 이유로 말이죠. 계약서의 "At Will"이라는 문구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무서운 조항이니까요.


정보 보안 측면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J6까지 동시에 뛰다 보면 필시 경쟁사 회사들이 포함되겠죠. (예를 들어 삼성과 SK 메모리 사업부 일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생각해 봐요). 아무리 본인이 엄격히 관리한다고 해도, 각사 기밀이 자신이 짜오던 코드나 자신의 입을 통해 상대 회사에 은연중에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아니, 본인이 엄격히 관리한다고 해도 두 경쟁사에 걸쳐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 사유가 될 겁니다. 한국처럼 경쟁사 이직금지 방지 같은 제도는 없어도, 미국에서는 한 회사를 퇴사하고 다른 회사로 이직할 때는 철저히 비밀유지를 지키니까요.


꼭 제도나 법이 아니더라도 '직업윤리' 측면에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겠죠. 회사의 처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나은 조건을 찾아 깔끔하게 이직하면 됩니다. 이곳에서는 이직은 자유롭고, 잡 저글링을 할 정도로 능력자면 갈 곳은 많습니다. 한탕심리에 편법으로 욕심부리다 발각돼서, 한번 업계 평판에 금이 가면 바로 퇴출각이니까요. 실제로 많은 잡 저글러들은 통장에 꽂히는 돈만큼이나 비례해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뭐, 겸직금지 조항이 엄격한 우리나라에서는 절대 벌어질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일단 그렇게 멀티 잡을 뛰며 일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지만서도. 



- 예나빠.



표지 이미지 출처: https://tech.co/news/overemployment-working-two-jobs-at-o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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