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텔 장기 근속자들의 비자발적 은퇴를 바라보며
"인텔에서의 25년 근무를 마감하고 은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링크드인에 누군가의 글이 올라왔다. 나와 1촌도 아니었던 그의 글이 내 피드에 올라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내 전 직장이 그의 현직장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보면 링크드인 알고리즘은 쓸데없이 친절하다. 누군가의 이직, 승진 소식을 1촌, 2촌, 3촌.. 거미줄처럼 엮여있는 관계망에 무차별로 뿌려댄다. 그 의도는 뻔하다.
"네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좋아요'로 축하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아?"
'그래. 알았다고. 그럼 내가 이직할 때 한번 보자.' 평소부터 벼르던 나는 그래서 이직이란 것을 하자마자 프로필부터 업데이트했다. '나도 좋아요 폭탄 좀 받아보자'라는 아주 유치한 발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소속을 바꾸고 이직을 알리는 게시물을 올리자, 1촌 뿐아니라 모르는 이들의 축하 댓글이 쇄도했다. 이후부터 나는 링크드인 알고리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알고리즘 덕에 읽게 된 이 시니어 엔지니어의 글에는 잔잔한 소회가 담겨있었다. 인텔의 초창기 CPU 설계에 참여하는 행운을 누렸고, 뛰어난 사람을 만나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이야기였고, 이런 성장의 기회를 준 회사에 감사하고 있었다. 첨부된 사진 속에는, 회사 로고 앞에서 한 노년의 엔지니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회사문을 나서는 마지막 모습 같았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아서, 비록 일면식 없는 이였지만, 마음으로 그 글에 '좋아요'를 백만 번이고 눌렀다.
다음 게시물들을 읽으려 아래로 스크롤을 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또 다른 이들의 은퇴 글이 계속 눈에 뜨였기 때문이다. 15년, 27년, 30년.. 모두 같은 회사의 또 다른 장기 근속자들이었다.
"아, 오래된 엔지니어들부터 내보내고 있구나.."
뉴스를 통해 전 직장의 사정을 알고는 있었다. 회사는 계속된 수익성 악화로 15% 감원을 선언했다. 대규모 레이오프를 단행한 지 채 2년도 안된 시점이었다. 매스컴은 '반도체 왕국의 몰락'이라며 연일 때려댔다. 재무통 CEO의 근시안, 트렌드를 못 읽는 의사 결정 구조, 혁신의 실종.. 마치 복붙을 한 듯 똑같은 이유를 댔다.
감원을 발표한 회사에서 같은 시기에 은퇴자가 속출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회사가 빠르게 비용 절감을 이뤄내기 위해 가장 먼저 취하는 행동이 바로 고임금 경력자를 내보내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가 아닌 '회사의 결정'에 의해 은퇴를 당한 것이다. 그나마 '은퇴'소식을 밝히며 사회 관계망에 소회를 밝힐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기 은퇴 보상(ERP: Early Retirement Package)을 두둑이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은퇴각을 재고 있던 이들이라면, '얼씨구나'하고 손들고 냅다 ERP를 챙겨 나왔을 것이다. 어차피 할 은퇴, 그 일정만 조금 당기면 생각지 못한 보상금이 생긴다. 평상시에 스스로 하는 은퇴였다면 받지 못했을 금액이다. ERP는 구조조정 시기에만 권고사직 형태로 지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은퇴 생각이 없던 누구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권고사직을 고사한다고 생존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다. ERP를 거절하면 회사에 남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2차로 불어오는 강제 해고 명단에 이름이 오른다면, ERP보다 훨씬 못한 조건의 해고 보상(Severance Package)만 손에 쥐게 된다. 그러니 명목상 '권고'지만 대부분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할 수밖에 없다. 거절 시 발생할 리스크 때문이다.
그나마 ERP를 챙겨주는 것은 주로 '장기 근속자'들에 국한한다. 평균 근속이 짧은 실리콘밸리에서,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한 이들의 공로를 높이 사주는 것이다. 생각이 있었던, 없었든 간에 자신의 은퇴 나이 즈음에 회사가 구조 조정을 실시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평소라면 못 보던 ERP를 제안받으니 말이다.
성실히 장기간 근속하던 실무 엔지니어의 끝이 '보상금 받는 조기 은퇴'라는 생각에 만감이 교차했다. 식상하리만치 잘 알고 있다. 회사는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 곳이다. 게다가 여기는 실리콘밸리, 노동 유연성이 극한까지 치솟아 있다. 회사는 직원의 노동력만, 개인은 자신의 커리어만 생각한다. 회사에 충성할, 감정을 이입할 이유도 방법도 없다. 철저히 자본주의 가치만 남는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삭막한 고용 현장임에도, 20~30년간 한 회사에서 근속한 이들은 특이, 아니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직이 잦은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이들이니까. 애사심에, 사내에서 인정받아서, 지금 하는 일이 좋아서, 딱히 불만이 없어서, 귀찮아서, 그 이유야 어쨌든 그들은 그 오랜 기간 동안 회사를 떠나지 않았다. 수십 년 커리어 동안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말 그대로 회사와 함께 역사를 써 내려간 것이다.
장기 근속자들의 은퇴에 감정을 이입하는 것은, 나 또한 그리 멀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준비라곤 하나도 되어있지 않다. 벽에 X칠할 때까지 일하는 것이 목표, 아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이미 커리어의 정점을 지나온 나로서는 누군가의 '은퇴'가 남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국은 법정 은퇴 나이가 없어, 건강이 허락하는 한, 원할 때까지 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참 순진한 생각이었음을 깨닫는다. 이곳에서 원할 때까지 일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손에 꼽는다. 만일 자신의 은퇴 시점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은퇴를 향해가는 여정에서, 수십 번을 맞닥뜨릴 정리 해고의 칼날을 피해야 한다. 무엇보다 육체적, 정신적 능력이 쇠락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자신이 쌓아온 경험치가 생산성 하락을 상쇄하지 못한다면 버텨내지 못한다. 그러니 한 회사에서 수십 년간 자신의 자리를 지켜온 엔지니어들을 '성공한 삶'이라 불러 마땅하다. 조직의 정점을 찍는 경영진이 되는 것만큼이나 난도 높은 커리어 완성을 이뤄냈으니까 말이다.
그의 은퇴 알림글에 '좋아요'를 끝내 누르지 못했다. 그의 은퇴가 축하를 받을 일인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진 속의 그는 웃고 있지만, 그 웃음의 뒤에는 씁쓸함이 남아있을지 모른다. '그동안 우리 회사에 보여준 당신의 헌신을 치하합니다. 그 공로로 저희가 특별한 패키지를 제공할 예정입니다. 단, 자발적으로 은퇴만 해주신다면.' 자발적인지, 비자발적인지 구분하기 힘든 그의 은퇴 선언은 이러한 권고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이 노년의 엔지니어에게 남은 마지막 불꽃이 꺼지는 것이 그에게 과연 '축복'이었을까?
"그동안 일만 하느라 바쁘게 지냈습니다. 이 기회에 조금 쉴 생각입니다. 하지만 내 은퇴는 '인텔'에서만 유효합니다. 내 경력이 끝난 것은 아니에요.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새로운 커리어 챕터를 찾아 나설 예정입니다."
두 번째로 읽은 다른 이의 은퇴 글에는 사뭇 비장함이 엿보였다. 외력에 의해 은퇴를 당했지만, 그렇다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마음가짐. 그가 불꽃을 다시 피워내길 마음으로 축복했다. 노공(老工)은 죽지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engineers neve die. They just fade away).
-예나빠
표지 이미지 출처: Nick Youngson CC BY-SA 3.0 Pix4fre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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