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도메인 전문가의 시대

AI 이후, 엔지니어는 어떻게 살아남는가

by 예나빠


브런치 댓글로 멘토링을 하다 보면, 짧은 문장 하나가 오래 마음에 남을 때가 있다. 얼마 전 한 미국 유학생이 남긴 고민글이 그랬다. 긴 글도 아니었고, 과장된 표현도 없었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한 문장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이미 업계에서 시니어나 프린시펄급으로 커리어를 쌓으신 분들은 가치가 크겠지만, 이제 막 졸업하는 26–27년 학부생들은 전문성을 쌓기도 전에 취업 자체가 불확실합니다….”


그 문장을 읽고 한동안 화면을 넘기지 못했다. 비관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래서 더 현실처럼 느껴졌다. 이 문장이 마음에 걸렸던 이유는, 그 안에 어떤 '오해'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정확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고, 시대를 탓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냉정하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전문성을 쌓기도 전에"라는 말 속에는, 노력의 부족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허락되지 않는 구조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이렇게 답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다 그래요."
"들어가서 배우면 됩니다."
"첫 직장은 완벽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날은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더 이상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장은 '성장 가능성'을 보고 사람을 뽑지 않는다. 이미 증명된 역할, 즉시 투입 가능한 자리만을 찾는다. 문제는, 그 역할 대부분이 한때는 엔트리에게 주어졌던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요즘은 신입 뽑는 데가 없다.”

“엔트리 레벨이 거의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미국 현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처음에는 과장처럼 들렸다. 경기가 나쁘면 늘 나오는 말 같았고, 기술 업계는 늘 변화 속에서도 길을 찾아왔으니까. 하지만 몇 년 사이, 이 말은 더 이상 불평이나 푸념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는 문장이 되어버렸다.


이상한 점은, 사람들이 게을러진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요즘의 학생들과 주니어들은 이전 세대보다 훨씬 많은 것을 공부한다. 프로그래밍 언어는 기본이고, 프레임워크, 알고리즘, 시스템, AI까지 배워야 할 것은 끝이 없다. 그런데도 불안은 줄어들지 않는다. 공부하면 할수록, 준비하면 할수록 "그래서 이 다음은?"이라는 질문이 더 커진다.


대부분은 그 이유를 AI에서 찾는다. AI가 코드를 짜고, 설계를 돕고, 심지어 판단까지 하는 시대. 그래서 “AI 때문에 취업이 어려워졌다”는 말은 직관적으로 그럴듯하다. 하지만 나는 그 설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AI는 변화를 만든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진행되고 있던 변화를 가속시킨 존재에 가깝다. 엔트리 레벨은 AI가 등장하기 전부터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고, 기업은 오래전부터 사람을 '키우는 조직'이 아니라 '즉시 전력을 고르는 조직'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 역시 처음 커리어를 시작할 때, '배우면서 일하는' 것이 가능했던 세대였다. 대학원 선배들은 완성도를 요구하기보다 방향을 봐줬고, 동기들이 입사했던 회사는 실수를 전제로 사람을 뽑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에게 같은 말을 해줄 수 없게 되었다. "처음이니까 괜찮다"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가장 먼저 밀려난 것은 경험이 아니라 역할이었다. 단순 구현, 반복 작업, 보조 개발... 한때 엔트리의 몫이었던 일들은 자동화되기 가장 쉬운 영역이었고, AI가 정확히 그 자리를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문제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의 실력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허락되던 '시작의 역할'이 사라진 것이라고. 나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시작하고 싶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살아남는 사람은 누구인가? 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일까? 더 많은 스킬을 가진 사람일까?


미국 현지에서 수많은 이력서를 보며 느낀 점이 있다. 기술 스택이 늘어날수록, 설명은 오히려 얕아진다는 것이다. 무엇을 썼는지는 길게 적혀 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이 차이가 시간이 지날수록, 특히 AI 광풍이 들어닥치는 요즘과 같은 시기에, 더 크게 벌어진다.


이 질문에 대해 내가 내리는 결론은 단순하다. 이 시대에는 스킬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도메인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도메인은 특정 기술 이름이나 트렌드가 아니다. 도메인이란, 문제가 왜 그렇게 생겼는지 이해하고, 어떤 제약 속에서 어떤 선택이 가능한지 설명할 수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에 책임질 수 있는 구조적 이해를 말한다. 코드를 잘 짜는 사람과 문제를 정의하는 사람은 다르다. 기능을 구현하는 사람과 설계를 결정하는 사람은 다르다. AI는 점점 전자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지만, 후자의 역할은 오히려 더 중요해지고 있다.


나 역시 처음부터 도메인을 의식하며 커리어를 쌓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느 시점부터,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보다 같은 문제를 더 깊이 설명할 수 있을 때 내 일이 훨씬 단단해진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직무가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았다.


출간한 전작에서 공학도라면 '도메인 전문성'을 기르라고 역설했다. 하지만 그 목적은 달랐다. 한국에서 실리콘밸리로 진입하기 위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대체가 쉬운 스킬셋 전문성은 미국으로 향하는 무기가 되어주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빠르게 변했다. 도메인 전문성은 실리콘밸리에 가기 위한 전략만이 아니라, AI 시대에 엔지니어로 남기 위한 조건이 되어버렸다.


이 연재를 통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왜 기존의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지, 그리고 왜 도메인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다시 중요해졌는지를 설명하려 한다. 위로를 주기 위한 내용이 아니다. "괜찮다"거나 "기회는 있다"는 말을 쉽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지금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 개인의 능력 부족이 아니라 구조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임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구조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남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 연재는 엔트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현업에 있는 사람, 커리어의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사람, 그리고 "이 일을 계속해도 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모든 엔지니어를 위해 쓸 것이다.


AI 이후의 시대에도 사람은 여전히 필요하다. 다만, 그 사람은 더 이상 '무언가를 잘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을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향후 예상 목차 (변할 수 있습니다)


<프롤로그>

PART 1.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 엔트리 레벨이 사라진 진짜 이유

* 이번 변화가 유독 잔인한 이유


PART 2. 왜 기존의 ‘스킬셋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가

* 왜 열심히 공부해도 불안한가

* “코드를 잘 짜는 사람”의 시대는 끝났는가


PART 3. 도메인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 도메인 전문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도메인은 ‘지식’이 아니라 ‘구조 이해’다

* 설계자와 작업자의 결정적 차이


PART 4. AI는 HW도, SW도 바꾸고 있다

* SW 엔지니어의 자리는 정말 사라질까

“ 소프트웨어의 종말”이라는 오해


PART 5. 도메인 전문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왜 ‘기초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 위험해졌는가

* 엔트리가 없는 시대의 성장 경로


PART 6.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제

* 이전 세대와의 구조적 격차

* 경쟁이 아니라 입구가 사라진 시대

* 비난도 위로도 아닌, ‘해석’


PART 7. 도메인 전문가로 살아간다는 것

* 도메인 전문가는 어떤 커리어를 갖는가

* 이직이 쉬운 사람들의 비밀

* 평생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

* 그럼에도 엔지니어로 산다는 것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