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을 요구받지만, 연습할 기회는 사라진 시대
이제 엔트리는 더 이상 ‘배우는 사람’이 아니다. 이미 작은 영역에서는 스스로 판단해 본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은 점점 "엔트리 중에서 이미 도메인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도메인’은 흔히 생각하는 특정 기술군이나 전공 분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프런트엔드냐, 백엔드냐, HW냐 SW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도메인이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능력'
을 뜻한다. 그리고 이 책임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도덕적 책임이나 "실수했으니 야근하고 뒤집어쓴다"는 의미가 아니다. 책임이란 훨씬 기술적인 개념이다. 왜 이 선택이 당시 조건에서 합리적이었는지 설명할 수 있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측했으며, 결과가 틀렸을 때, 어디서 가정이 어긋났는지 짚어낼 수 있는 능력. 이것이 바로 책임질 수 있는 판단이다. 그래서 도메인은 기술 스택을 줄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선택이 이 상황에서 최선이었는지를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나 역시 커리어 초반에는 이 ‘책임’의 의미를 잘 몰랐다. 대학원 시절, 성능만 보고 한 설계 선택이 있었다. 당시에는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었지만, 리뷰 자리에서 “왜 이 제약을 무시했는지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문제는 틀린 선택이 아니라, 선택의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데 있었다는 것을.
AI는 책임지지 않는다. 다만 책임지는 척만 하는 것이다.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로그를 남기고, 같은 입력에는 같은 출력을 내며, 무감각하게 오류를 수정한다. 조직은 이를 "AI가 책임 있는 선택을 했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AI가 제공하는 것은 책임이 아니라, 관리 가능성(manageability)이었을 뿐이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질 필요가 없고, 감정도 없으며, 같은 실수를 같은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 그런데 기업 입장에서 이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래서 앞으로 조직은 점점 더 명확해질 것이다.
'책임질 줄 아는 사람만 뽑겠다.'
이제 책임은 인성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훈련 가능한 기술이 된다. 과거에는 작은 모듈, 국소적인 기능, 실패해도 영향이 작은 영역이 있었다. 그리고 엔트리는 그 안에서 이런 경험을 쌓았다.
"아, 이 선택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구나."
이 작은 인과 관계의 체험들이 쌓여 판단력이 되었고, 그것이 결국 '책임질 수 있는 엔지니어'를 만들었다. 이 시대가 잔혹한 이유는 이러한 ‘책임의 기회’ 자체가 엔트리에게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주니어였던 시절에는 실패해도 괜찮은 작은 영역들이 분명히 있었다. 성능이 안 나오면 다시 돌려볼 수 있었고, 설계가 틀리면 왜 틀렸는지 토론할 시간이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비효율적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들이 내가 ‘판단해 본 사람’이 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비단 엔트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 주니어이지만, 의사결정을 해본 적 없는 사람
* 시니어이지만, 항상 누군가의 결정 아래에서만 일해온 사람
이들 역시 같은 위기에 놓여 있다. 그래서 AI 시대에 살아남는 기준은 연차도, 직급도 아니다. 판단해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판단의 결과를 설명하고, 예측하고, 복기할 수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모든 엔지니어는 다시 엔트리가 된다.
"아니, 주니어들에게는 선택권 자체가 없는데, 어떻게 판단과 책임을 배우라는 말이냐?"
제일 아프고 정확한 질문이며, 한국식 성장경로가 더 위험한 이유다. "책임을 질 준비가 안 됐다"라고 말하기 이전에, 현재 한국의 많은 주니어 엔지니어에게는 선택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걸 인정하지 않으면, 앞에서 했던 모든 ‘책임, 도메인, 판단’ 이야기가 공허한 헛소리처럼 들릴 수 있다.
거듭말하지만 이것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왜냐하면 한국의 기업 문화는 엔트리, 주니어의 선택을 ‘위험’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이렇게 인식한다.
“왜 굳이 바꿨지?”
“위에서 정한 대로 하면 되는데”
“문제 생기면 누가 책임질 건데?”
그래서 그들의 선택은 권한이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결과적으로 주니어에게 주어지는 건 정해진 방식, 정해진 도구, 정해진 답이다. 이건 보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판단 기회를 차단하는 구조다. 한국식 구조에서는 책임은 직급 위로 올라가고 결정은 이미 내려와 있다. 그래서 주니어는 판단, 선택하지 않아도 되고, 대신 "잘 수행했는가"로만 평가받는다.
이는 과거의 직급명(지금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만 봐도 알 수 있다. 사원-선임-책임-수석... 과장급 정도의 연차가 되어야 비로소 '책임자'로 불린다. 그런데 이건 역할 설명이 아니라 위계 선언이다. 특히 책임 연구원이라는 말은 굉장히 한국적이다.
한국식 조직에서 책임은 보통 이런 의미로 쓰인다. 결정권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이름이 불린다는 뜻이다. 결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감정 노동과 보고 의무를 포함한 책임이다. 그래서 한국 조직에서의 책임은 종종 이렇게 변질되곤 한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설명하라”가 아닌 “왜 사고가 났는지 소명하라”라고.
그래서 직급이 ‘책임’이 된다. 한국 조직에서는 책임은 역할이 아니라 직급이고, 판단 능력의 문제라기보다 연차와 나이를 통과한 자격증처럼 취급된다. 그래서 책임 연구원이 된다고 갑자기 구조를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의사결정을 잘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네가 맞다”가 아니라 “이제 네 차례다”가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책임을 배울 수 없다. 책임은 강의로 배우는 게 아니라, 선택과 결과 사이에서만 생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한국의 주니어는 ‘도메인’을 가질 수 없다. 도메인은 기술을 많이 알아서 생기는 게 아니라 선택의 흔적이 쌓여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택을 못 하고 이유를 묻지 말라고 배우고 "시키는 대로"가 미덕인 환경에서는 도메인이 생길 수가 없다.
반대로 지금 AI 시대의 ‘책임’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즉, 책임은 판단의 설명 가능성이며, 이건 직급이 아니라 도메인에서 나온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직급은 낮아도 연차는 짧아도 나이는 어려도 작은 영역에서 책임을 져본 사람이 AI 시대에는 더 강해진다. AI 시대의 조직은 이렇게 묻는다.
"이 선택의 이유는?"
"다른 선택지는?"
"왜 이 트레이드오프를 감수했나?"
하지만 한국 주니어는 그런 질문을 해본 적도 없고 그런 답을 요구받아본 적도 없다. 그래서 갑자기 이 시장에 던져지면 '무능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실제로는 무능이 아니라, 훈련받지 않은 능력,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미국식 기업문화가 조금은 낫다고 볼 수 있다. 지금 시대의 위험을 덜 증폭시키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 글에서 말했듯 미국도 AI는 엔트리, 주니어에게 악몽과도 같다. 하지만 미국은 책임을 직급이 아니라 역할로 주고, 작은 범위라도 판단을 해보게 만들고, 설명 가능하면 저연차라도 인정해 준다. 이러한 조직문화가 엔지니어들에게 AI 트랜스포메이션(AI Transformation, AX)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는 것이다.
미뽕에 차서 하는 말이 아니다. 미국 찬양도, 한국 비난도 아니다. 한국식 성장 경로가 더 위험해졌다는 말이다. 이는 미국이 더 낫다는 말이 아니라, 책임의 의미가 바뀐 시대에, 지금 구조가 덜 어긋나 있다는 뜻에 가깝다. 그래서 “책임질 줄 아는 인력”의 이야기가 한국의 엔지니어에게 더욱 잔인하게 들릴 것이다. 주니어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질 수 있다.
"책임지라면서 선택할 기회는 준 적이 없잖아."
이 말의 핵심은 하나다. 요구되는 능력은 바뀌었는데, 그 능력을 연습할 기회는 사라졌다. 이 감정은 정당하다. 그래서 나 같은 시니어가 주니어에게 해야 할 말은 "더 노력해라"가 아니라 "이 구조에서는 네가 잘못된 게 아니다."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현실은 이렇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권이 없는 구조에 머무를수록, 선택을 요구하는 시대와 더 멀어진다. 이게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향후 예상 목차 (변할 수 있습니다)
PART 1.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 이번 변화가 유독 잔인한 이유
PART 2. 왜 기존의 ‘스킬셋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가
* 왜 열심히 공부해도 불안한가
* “코드를 잘 짜는 사람”의 시대는 끝났는가
PART 3. 도메인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 도메인 전문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도메인은 ‘지식’이 아니라 ‘구조 이해’다
* 설계자와 작업자의 결정적 차이
PART 4. AI는 HW도, SW도 바꾸고 있다
* SW 엔지니어의 자리는 정말 사라질까
“ 소프트웨어의 종말”이라는 오해
PART 5. 도메인 전문성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왜 ‘기초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 위험해졌는가
* 엔트리가 없는 시대의 성장 경로
PART 6.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문제
* 이전 세대와의 구조적 격차
* 경쟁이 아니라 입구가 사라진 시대
* 비난도 위로도 아닌, ‘해석’
PART 7. 도메인 전문가로 살아간다는 것
* 도메인 전문가는 어떤 커리어를 갖는가
* 이직이 쉬운 사람들의 비밀
* 평생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조건
<에필로그> 그럼에도 엔지니어로 산다는 것
- 예나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