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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Aug 27. 2020

아디오스.  K.

실리콘밸리의 인연


얼마 전 팀원 K가 퇴사를 했다. 산호세야 원래 고용 탄력성이 좋은 동네라, 직원의 입퇴사는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다. 그다지 특별할 것은 없다. 미국에 있던 3년 동안 팀에 합류한 새로운 친구들만큼이나, 팀을 떠난 많은 친구들을 보아왔다. 더 좋은 조건에서 새롭게 커리어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축하하며 보내주곤 했다. 인텔을 떠났지만, 그 친구들과는 언제든 연락이 되었고 가끔씩 퇴근 후 만나 맥주라도 한잔 할 수 있었다. 어차피 산호세 내의 다른 회사로의 이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떠나는 K를 보며 전에 없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약간의 먹먹함까지도. K는 오래전부터 학회에서 만나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친구였다. 그 인연으로 매니저에게 K를 추천했고, K는 이미 학술적 업적이 뛰어나 문제없이 인터뷰를 통과해 작년에 새롭게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인텔에 온 지 1년도 채 안되어 다시 본국인 일본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작년 가을 K는 먼저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해 겨울 미국에 온 가족과 함께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살 집을 구하고, 병원 주치의를 정하고, 두 딸아이를 학교에 편입시키며, 갖 이민 온 엔지니어들이 의례히 겪는 '정착'이라는 것을 조금씩 해냈다. 영어 한마디 못해 이민의 두려움이 컸던 K의 아내도, 어렵사리 두 딸을 키우며 새로운 환경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자상한 남편의 도움을 받으면서. 


불과 2년 전의 내 모습이었기에 마냥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그래서 가능한 도움을 주려고 했고, K의 가족을 집에 초대해 식사를 함께 하며 조그만 추억도 쌓았다. 이민자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언어는 달랐지만 엄마들끼리도 또래 아이를 키우는 동질감으로 마음을 쉬이 나누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던 어느 연말 저녁이었다. 


K도 회사에 나름대로 잘 적응했다. 실적도 좋고 아이디어도 많아 스스로 주제를 정해 연구를 잘 진행해 갔다. 다만, 아직 언어장벽이 남아 있어서인지 주로 혼자 일을 하곤 했다. 하지만, K는 틈틈이 ESL을 수강하며 그 장벽을 허물어 갔고, 조금씩 팀원들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팀에 녹아들었다. K의 아내도 남편을 도움을 받으며 운전을 다시 시작했고 일본인 엄마들을 한 명 두 명 사귀기 시작했다. 



그즈음. 코비드 19 판데믹이 발발했다. 샌프란시스코, 산호세, 캘리포니아 전역까지 단계별로 임시 폐쇄령이 떨어졌다. 여느 산호세 주민처럼 K나 K의 가족도 집에 묶이게 되었다. K는 더 이상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았고, K의 아내는 학교에 가지 못하는 두 딸과 하루 종일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국에 온 지 두 달만이었다. K가 팀원들과 유대감(rapport)을 쌓기에, K의 아내가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급기야 K가족들은 돌아가며 지독한 독감에 걸렸다. 컨퍼런스콜에서 K의 목소리는 단단히 잠겨있었고, 대화중 간간히 거친 기침을 하곤 했다. 팀원들을 모두 K를 걱정했다. 다행이 코비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의지할 친지 하나 없는 타국에서 겪는 육신의 아픔이란, 쉽게 마음으로 전이되기 마렸이었다. 



그 뒤 7-8개월 동안 누구보다 힘겨운 코비드 시기를 보낸 K는 짧았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큰 꿈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왔지만, 자신의 커리어보다는 가족이 우선이었다. 일본도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미국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부모님, 친지, 친구들이 있는 고국이니까. 


인텔에서의 마지막 날, K는 컨퍼런스콜로 자신의 그간 연구를 발표하고 팀원들과 짧은 인사를 나눴다. 코비드는 헤어지는 날까지 우리에게 대면을 허락지 않았지만, 팀원들이나 K나 목소리는 밝았다. 소속은 달라도 각자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다 보면 곧 또 만나게 될 것임을 알았기에. 아디오스 K. See you again at the conference!



고국으로 돌아하는 K를 보며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정착하기 전에 판데믹같은 상황이 터지면, 마찬가지로 아내나 아이들은 힘들어했을 것이다. 가족의 고통과 내 경력개발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 같다. 힘들게 한국에서의 터전을 정리하고, 미국에 뿌리내리겠다는 큰 결심을 하고 건너왔음에도 가족의 아픔을 외면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조금더 가족을 도우면서 이해를 바랬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조금이나마 일찍 미국에 온 것이 다행일 뿐이다.


산호세에서는 오늘도 여러가지의 만남과 이별을 마주한다. 이직하는 팀원, 그 빈자리를 채우는 신규 입사자, 조직 개편으로 새롭게 합류한 연구원, 여름방학동안 짧게 왔다가 학교로 돌아가는 인턴, 이제 막 이민 온 이웃, 주재원 체류기간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옆집 가족. 그렇게 떠내보내야 할 사람을 아쉬워하며 또 새 얼굴을 맞이한다. 각자의 사정으로 서로에게 오랜 인연을 허락하지 않지만 오늘도 우리는 살아간다. 스치는 인연도 소중히 생각하며.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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