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과 인텔에서의 출장 보고 문화의 차이
"그런 발표는 처음 들어봐. 그거 삼성 스타일이야?"
몇 년 전 회사에서 학회 출장을 다녀온 뒤 내용을 요약해 발표를 하게 되었는데, 발표 뒤 동료에게 들었던 질문이다. 칭찬인 듯 아닌듯한 그 친구의 말에 왠지 겸연쩍었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이건 강남... 아니 내 스타일"
이 질문을 했던 동료의 의도는 내 발표가 아주 인상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 발표 자료가 기존 그들의 스타일과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발표 자료를 만들 때 이미지나 동영상 등 시각 자료를 많이 활용하는 편인데, 텍스트 일변도의 PPT를 보아오던 그들의 눈에는 내 자료가 꽤나 생소해 보였던 것이다.
사실 내 이러한 발표 스타일은 한국에서 근무하던 시절 형성된 것이 맞긴 하다. 물론 계기는 있었다. 삼성 입사 이듬해 해외 학회에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회사 첫 출장이라 많은 기대와 흥분에 사로잡혔다. 중요한 계약, 거래처 미팅이 아닌 동향 파악에 불과했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잘해야겠다는 의욕만 불타게 되었다.
당시 삼성에서도 출장자가 학회 출장에서 복귀하면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룹원들 앞에서 출장 보고회를 가지곤 했다. 팀 선배들의 발표에 몇 번 참석하곤 했는데 대부분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어떤 학교나 회사에서 이런저런 논문을 발표했고, 전시회에는 어떤 기술이 전시 중이었다'와 같은 평이한 사실이 나열된 요약본이었다. 이러한 선배들의 발표에 당시의 나는 꽤나 오만방자한 생각까지 했다.
'아니 회삿돈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으면서 출장 발표를 저 정도밖에 못해? 저런 내용은 굳이 출장을 안 가도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알 수 있는 거잖아?'
사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출장 보고서나 발표 자료 작성은 꽤 성가신 일이긴 하다. 출장을 준비할 때야 해외여행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의욕에 불타지만, 막상 복귀하고 나면 '출장 보고'는 일상 업무에 새롭게 추가되는, 그저 귀찮은 서류 작업의 하나일 뿐이었다. 자신의 고과에 도움이 되는 것도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기에 선배들도 그다지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은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소위 '회사 뽕'이 빠지기 전이었다. 그래서인지 남들보다 좀 다른 출장 보고를 하겠다는 호들갑스러운 결심까지 하게 된다. '출장지에서만 알 수 있는 고급 정보(?)'를 담아와 팀원들에게 의미 있는 전파교육을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출장 준비를 (쓸데없이) 철저하게 했다. 학회에서 만날 수 있는 인사들의 목록을 사전에 정리하고 그들에게 메일을 보내 짧은 인사를 나눴다. 또한 그들과 현장에서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기 위해 그들의 관련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사전에 조사했고, 과거 논문들도 꼼꼼히 찾아 읽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준비해 출장을 떠났지만 현장에서는 막상 생각만큼 정보수집이 쉽지 않았다. 기존 형성되어 있는 학계 네트워크에 학회 첫 참가자가 얼굴을 들이미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쉬는 시간, 식사, 만찬 시간을 이용해 짧은 영어를 구사하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친목을 도모했다. 그리고, 매일 일정이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 그날 만난 이들과 나눴던 대화들 중 유용한 정보들을 잊기 전에 정리해 모두 기록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나는 애초의 다짐대로 보고서와 발표자료 작성에 정성을 쏟았다. 출장 목적, 출장지 정보, 학회 개요를 시작으로, 발표된 논문을 바탕으로 관련 학/업계의 기술 동향을 작성했다. 그리고, 학회에서 누구를 만났고,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를 자세히 정리했다.
사실, 학회장에서 수집하는 정보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에서 연구원들이 자신이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나 회사의 핵심 연구 기밀을 알려줄 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그것은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기술적인 대화를 나누며 공유했던 관련 연구나 관심분야를 바탕으로, 경쟁사들의 연구 동향을 최대한 유추해 정리했다. 해당 인사들의 인적사항이나 그들의 회사, 연구소에 대한 정보들은 웹 사이트들에서 추가로 수집해 자료에 포함시켰다.
보고서를 자세히 작성한 후, 발표 슬라이드에는 보고서 내용을 한차례 더 요약했다. 발표를 듣게 될 동료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현장에서 찍어온 사진들, 발표된 논문에서 발췌한 주요 그림, 웹사이트들에서 수집한 그들의 데모 동영상들을 슬라이드에 추가로 포함시켰다. 학회장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 사진까지 웹사이트에서 캡처해 자료에 삽입했다. 발표의 말미에는 정리된 경쟁사나 학계의 연구 동향을 바탕으로 향후 예상되는 관련 시장과 당사의 대응 방안을 그래프와 로드맵으로 나름대로 시각화시켜 결론을 맺었다.
출장 발표를 가졌다. 그리고, 발표는 작은 반향을 일으켰다. "발표만 들어도 함께 출장을 다녀온 것 같다", "이런 출장 보고는 처음이다", "유용했다" 등 대체로 신선하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말은 안 했지만 '기껏 학회 출장에서 뭘 이렇게 까지 하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출장 발표 후 내게 가장 중요했던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부서장이 내 발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출장지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 정보들을 수집해 왔던 내 노력을 높이 샀다. 그래서, 그는 그 이듬해부터 나를 해당 학회에 매해 출장을 보내기로 결정하게 된다. 사실 그는 출장자로부터 단순 동향 파악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장기적으로 회사가 해당 학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해당 학회에 해마다 꾸준히 참석할 수 있었고, 몇 년 뒤에는 당시 삼성에서 진행하던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포스터나 논문을 제출해 직접 발표도 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학회에 계속 참석하게 되면서 회사를 대표해 주요 인사들과 친분도 쌓았고, 학회 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학회 준비에 직접 참여도 하게 되었다. 이후 회사가 학회에 후원(sponsorship)을 하는 일에도 기여하고, 학회에서 만난 해외 석학들을 회사 연구소에 소개해 협력 연구도 착수할 수 있었다. 논문 발표 이듬해부터는 논문 리뷰어로 학회에 또 다른 기여도 했다. 그리고, 학회 활동을 통해 학계에 인지도가 조금 쌓이면서 결국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에까지 입사하는 계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이 첫 출장 보고에 쏟았던 내 작은 노력에서 시작된 것 같다. 자료 작성에만 일주일이 걸렸던, 지금 생각해보면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였을 수도 있었던 그 노력이, 나로 하여금 학계에서의 경력을 시작할 수 있게,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것이다. 당시의 내가 10년 후 이런 결과를 기대하며 출장 발표에 심혈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최소한 회사가 내 출장에 들였던 비용만큼은 합당한 역할을 하자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을 때 생각지 않은 기회들이 결과로 다가오게 된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와 인텔에 입사한 뒤 같은 학회에 오랜만에 참석을 하게 되었다. 삼성에서 조직개편으로 부서도 바뀌고 이끌던 팀도 타 과제에 흡수 통합되면서 한동안 학회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삼성이 아닌 인텔로 소속이 바뀐 배지를 목에 걸고, 오랜만에 반가운 학회 인사들을 만나 교류를 가졌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호텔로 돌아오면 삼성 시절처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록했다. 어디나 똑같다. 국적 불문하고 어느 회사나 출장을 다녀오면 출장 보고서를 작성하게 마련이니 말이다.
출장에서 복귀한 뒤 가졌던 출장 보고 발표에서 나는 삼성에서 구축했던 나만의 스타일대로 발표를 진행했다. 마찬가지로 업계 동향과 경쟁사 정보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문서로 남겼다. 매니저는 반색했다. 그동안 출장자들에게 구두로 물어봐서 들어야 했던 내용들을 알아서 정리해 가져오니 반가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삼성-스타일(?)로 자료를 작성하는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러한 Paper Work에 그때만큼의 열정을 불태울 만큼 내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는 무엇보다 실용적인 면을 강조하는 미국의 문화가 나로 하여금 자료 작성의 부담에서 자유롭게 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콘텐츠 그 자체이지 표현하는 형식은 부차적인 것일 뿐인 것이다. 매니저도 팀원이 가져다주는 자세한 자료에 감사할지라도, 정작 그가 원하는 것은 연구원이 금쪽같은 일주일을 출장 발표 자료에 허비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연구에 더 몰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발표 자료의 폰트와 글자 크기로 트집 잡는 한국의 꼰대같은 상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끔씩 내게 아직도 남아있는 삼성-스타일은 파워포인트를 열 때마다 되살아 나곤 한다. 시각적 일러스트레이션에 집착하며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국에서도 이를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결국 이 스타일이 결국 나를 여기로 이끌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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