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효과를 꿈꾸며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면서 '위기' 다음으로 많이 들었던 말은 '혁신'이었다. 그런데 두 단어는 일면 연관이 있었다. 주력 제품들이 시장 지배력을 갖고 독보적인 매출을 올리고 있어도, 현재에 안주하다 보면 글로벌 업체 간 경쟁에서 한순간 뒤쳐질 수 있다는 것을 회사는 잘 알고 있었다. 회사는 '위기 상황'이 아님에도 임직원들에게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고취시켰다. 실제로 '위기'가 왔을 때 대처하려면 이미 늦기 때문이다.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혁신'을 강조했다. 미래의 먹거리를 찾기 위한 끊임없는 주문과 노력이었다.
'혁신' 기술, '혁신' 플랫폼, '혁신'적 조직문화. 그 뒤로 보고서에는 웬만한 용어 앞에 '혁신'이 수식어로 자리 잡았다. 직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혁신'적이라 강조했고, 부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수하면서 경쟁자에 비해 어떤 '혁신'적인 차별점이 있는지를 부각했다. 구호만 따지면 혁신은 넘쳐났다. 회사도 혁신을 이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해외 고급 인력을 비싸게 영입하고, 국내외 대학과의 산학 협력을 수행하며, 실리콘 밸리의 해외 법인에서는 기술 센싱 및 Open Innovation을 주도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회사의 제1 경쟁자, 이른바 '혁신'의 아이콘인 '애플'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시장 지배력을 일궈냈으니까. 애플은 더 이상 따라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회사는 기술력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는 동등한 경쟁자가 되었다. 삼성을 나온 뒤에도 전 회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해마다 2회씩 주최하는 갤럭시 언팩 행사를 챙겨본다. 구글, 페이스북 등 실리콘 밸리의 테크 기업들의 연례행사 못지않은 규모와 기술력을 볼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더 이상 하드웨어 스펙과 기능만을 강조하지 않고, 기술 앞에 인간을 두고 있는 진화된 모습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 화려한 그 행사의 이면에는 많은 엔지니어, 전략, 마케팅 스텝의 수고가 녹아 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혁신'이 상대적으로 용이한 자율 중심의 실리콘 밸리와는 다른, 위계 중심인 조직 문화의 회사에서 이 정도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혁신'을 일궈내기 위한 구조적인 한계는 명확한데, 어떻게든 성과를 이뤄내니 말이다. 조직의 총역량을 집결해내는 과정에서 임직원 개개인이 투입해야 할 수고나 치러야 할 대가는 차치하고, 표면적인 결과만 따져보면 작금의 삼성의 위상은 실리콘 밸리 어느 기업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다.
내가 재직하던 시절엔 '애플'은 타도되어야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참고해야 할 대상이었다. 연구소는 애플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낼 임무가 있음과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애플이 하지 않는 것을 제안하면 공격받았다. 그래서 늘 "그렇게 좋은 기술이면 왜 애플은 아직까지 안 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응 논리를 준비해야 했다. 경영진 설득이 실패할 때면, '차라리 애플이 할 때까지 기다리며 내부 프로젝트로 진행하자'라는 편법을 써야 했다. 애플은 '사용자는 자신이 뭘 원하는지 모른다'라고 간주하고 과거의 자신을 레퍼런스 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의 혁신 DNA가 없었던 회사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경쟁자를 레퍼런스 해야만 했던 것이다.
사실 애플도 통상의 실리콘 밸리의 테크 기업들과 달리, 삼성 못지않은 위계 중심의 조직 문화를 가진 기업이다. 마찬가지로 제조업이기 근간이기 때문이다. 보안이 생명이라 조직 간의 정보교류도 극도로 제한되어, 바로 옆 부서가 심지어 때로는 같은 팀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팀도 철저히 스페셜리스트 위주로 구성되고, 매니저 팀원 모두 특정 분야에 특화되도록 조직된다. 의사 결정은 철저히 위로부터 내려오고, '혁신'을 이끌어 내는 것은 강력한 리더십에서 기인한다. 스티브 잡스의 사후 예전만큼 놀라운 모습은 보여주지 못할지라도, 팀 쿡이 보여주는 새로운 비전은 여전히 애플을 '혁신'의 아이콘으로 유지시키고 있다. 작년 초 그가 선언한 "소프트웨어"와 "서비스" 기업으로의 변신은, 올해 애플을 시가총액 2조 달러가 넘는 회사로 성장케 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아직까지 이러한 '혁신'을 이뤄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티브 잡스와 같은 비전 있는 강력한 리더가 없어서일까? 시장을 읽어내는 전략이 없어서 일까? 내가 아는 한 삼성의 리더들은 상위 1%의 최고로 똑똑한 인재들이다. 다른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임원이면 그 위치까지 올라갈 정도의 능력과 리더십을 견지하고 있음이 당연할 것이다.
나는 결정적 차이가 '빠른 성과에 대한 압박'과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해마다 경영 실적을 평가받는 임원들은 늘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부담을 갖고 산다. 그래서, 파괴적 혁신을 이뤄낼 과감한 시도를 하기보다 과거에 잘하던 것을 고도화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 한 번의 '실패'는 곧 이듬해 재계약 실패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리콘 밸리의 임원들처럼 이직이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보수적인 리더십에 의한 의사결정은 결국 실무진에게까지 전해진다. 이러한 조직문화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혁신'의 길도 찾기 어렵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위시한 실리콘 밸리의 소프트웨어 기업들처럼 직원들에게 자율과 역할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삼성이 서비스나 콘텐츠 사업은 모두 협력으로 전환하고 '제조 혁신'으로 전략을 회귀한 것을 보며,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잘할 수 없는 사업을 무리하게 벌이느니, 잘하는 것에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최고는 아닐지라도 최선의 전략일지도 모른다. 자체 플랫폼의 부재로 서비스, 소프트웨어 생태계를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울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전 세계에 스마트폰 점유율 1위의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 위에서 벌어지는 또 다른 새로운 가치를 포기해야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
내가 삼성에 입사한 지 이듬해 사업부에서 새로운 기술원장이 부임했다. '반도체 성능이 18개월마다 2배씩 향상한다는 인텔의 무어의 법칙'을 대체하는 '반도체 메모리 집적도가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황의 법칙'을 발표하여 전 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던 분이었다. 새로운 원장은 취임사에서 '메디치 효과'를 언급하며 서로 다른 부서 간 주기적인 '지식의 충돌'을 발생시킬 것을 주문했다. 타 부서 연구원들과 자유롭게 토론하며, 이질적인 분야를 접목하여 창조적, 혁신적 아이디어를 창출하자는 원장의 비전에 무척에 고무되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비전은 새로운 원장이 연구소를 일찍 떠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그 '메디치 효과'가 전사적으로 보급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배경과 전공이 다른 재능 있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고, 협업과 통합을 통해 아이디어를 발굴하여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는 환경. 회사는 이러한 환경을 위한 후원자 역할을 해주었다면 '진정한 혁신'을 이끌어내는 기술 르네상스 시대를 열지 않았을까.
- 예나빠
표지 이미지 출처: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