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지만.
언제부턴가 막연히 '미국'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대학원 시절부터였던 것 같다. A급 학회나 저널에 출판된 논문을 읽으며, 이런 좋은 논문은 어떤 연구 환경에서 나올까 늘 궁금했다. 그 뒤로 학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유수의 연구실에서 제대로 된 연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미국 포닥 자리를 알아본 적이 있다. 평소 관심 있던 몇몇 교수들에게 연락을 취해 가능성을 타진했는데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졸업 요건만 달성한 내 논문 실적은 그분들께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미 삼성에 입사가 확정되어 있었기에, 적극적으로 포닥 준비에 달려들지 못했던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삼성에 입사 후에도 ('미국병'까지는 아니었지만) '미국'에 대한 막연한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그것은 이문화 경험, 해외 체류에 대한 일종의 선망이었다. 여행이나 출장은 다녀봤지만 몇 년씩 해외 생활을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만큼이나 미국 생활에 대한 로망을 갖고 있었던 아내는 "오빠 회사에서는 미국에서 일할 기회 없어?"라고 가끔씩 물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응, 미안, 별로 없네..."라고 아쉽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직무든 상관없으니 1-2년 정도 미국에서 근무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 해외로 파견될 수 있는 길은 지역 전문가, 주재원, 학술 연수 세 가지였다. 지역 전문가는 사원, 대리급을 위한, 주재원은 기획, 전략부서 인력을 위한 자리였다. 연구소에서 책임급 이상의 연구원이 미국으로 파견 근무를 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해외 학술연수' 프로그램뿐이었다.
비지팅 스콜라(Visiting Scholar)라고도 불리는 해외 학술 연수는 쉽게 말해, 박사 학위가 있는 연구원에게 회사에서 해외 포닥을 보내주는 것이다. 선발되면 가족과 함께 부임하게 되고, 주재원에 준하는 체제비가 지원되었다. 회사는 연구원에게 해외 우수 대학에서 최신 연구를 접하게 하여, 향후 회사에 기여시키려는 의도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따라서, 평소 소위 잘 나가는 연구원들에게 주로 기회가 돌아갔다. 실제로 실적이 좋은 프로젝트 리더급(PL)들이 선발되곤 했고, 심지어 연수를 다녀온 이들 중에 이듬해 임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소에서는 PL을 거쳐 리서치 마스터(Reaerch Master)가 되고 학술 연수를 다녀오는 것이 임원으로 가는 엘리트 코스였다.
입사 후 해당 프로그램에 지원해 보고 싶은 생각은 늘 있었으나, 책임급 시절에는 지원에 필요한 스펙이 부족해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표면적인 지원 자격은 입사 N연차 이상 박사학위 소지자, 그리고 과거 2년간 상위고과 기록이었지만, 비지팅 스콜라에 선발되려면 당연하게도 +α의 실적이 필요했다. 이후 진급도 하고 팀을 맡은 뒤 고과 점수가 자격에 부합하게 되자 해당 연수 프로그램에 한번 도전해보게 되었다.
PL이 아니었던 나는 정식 과제를 이끈 이력은 없어 상대적으로 경쟁자에 비해 스펙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입사 후 꾸준히 써낸 논문, 특허 실적만큼은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았다. 특허, 논문, 기술 이전, 수상 실적 등 영혼까지 스펙을 끌어모아 지원서 항목을 채웠고, 연구 계획서 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마지막 남은 관문은 부서장의 추천이었다. 회사는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인력을 파견하는 것이므로, 당연하게 연수 목적이 부서의 로드맵, 회사의 비전과 일치해야 했다. 따라서, 부서장과의 사전 조율, 승인은 필수였다. 그렇게 받은 부서장 임원의 추천서, 며칠을 걸려 작성한 지원서와 연구 계획서를 인사과에 제출하고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고 발표 준비에 돌입했다. 전년도에 연수를 다녀온 옆 부서 연구원에게 발표 면접에 필요한 자문까지 구했다. 15분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본인 소개, 연구 계획, 연수 기관 정보, 복귀 후 활용 방안을 효과적으로 발표해야 했다. 며칠을 고민해 PPT를 작성했고, 무수히 발표 연습을 했다.
발표 당일이 되었다. 시간에 맞춰 회의실 앞에 도착해 인사과 직원의 안내로 발표장으로 입실했다. 면접관으로 부사장급의 연구 소장 두 분, 인사과 임원, 전년도 연수를 다녀온 신임 임원이 앉아있었다. 그들의 책상에는 지원서들로 보이는 서류가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이미 앞 순서에 많은 발표자들이 거쳐간 듯했고, 면접관들은 조금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 인사과 팀장이 발표전에 대뜸 한마디를 했다.
"핵심만 간단히, 10분 이내로 발표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핵심만 간단히', '10분 이내'라는 요구에 내 말은 빨라졌다. 첫 장으로 야심 차게 준비했던 본인 소개 슬라이드엔 가로방향으로 크게 그어진 화살표가 있었고, 곳곳에 연도별로 찍은 내 실적이 포장되어 있었다. 시간을 줄이기 위해 준비한 멘트의 반을 덜어내고 다음장으로 넘겼다.
두 번째, 연구 계획. 핵심 슬라이드였다. 당시 내가 리드하던 팀은 선행 연구를 하고 있었다. 부서에서 연구 개발 중인 과제는 사업부와 연계된 1세대 제품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내 팀은 다음 세대 제품에 들어갈 신규 기능을 연구하던 중이었다. 연수 계획으로 팀에서 진행 중인 연구를 좀 더 확장하는 방향으로 설정했다.
"부서에서 진행 중인 과제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현재 진행 중인 실사 그래픽을 구체화시켜..." 그렇게 최선을 다해 연구 계획을 발표하고, 이어 연수 후보군 학교 두 곳과 교수를 간략히 언급했다.
마지막, 활용 방안. 슬라이드에 현 부서의 로드맵을 띄웠다. 늘 로드맵은 2차원 그래프로 표현된다. 세로축으로 아이템, 가로축으로는 연도를 표시하고, 그 아이템들이 기간별로 화살표로 그려진다.
그 로드맵에서 내 팀의 연구는 늘 마지막 연도에 걸쳐지는 화살표로 존재했다. 부서가 미래 준비도 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만 필요한 일종의 PlanB와 같은 팀. 차세대를 목표로 한다고 하지만 계획도, 실체도 없던 제품. 언제나 부서 내에서는 우선순위에서도 밀렸다. 불확실성은 컸고 인적 물적 지원도 약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비지팅 스콜라에 지원한 것은 그 로드맵에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내 팀을 박제하고 싶은 마음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일단 선발해 비용을 들여 파견을 보내면, 이후 회사에선 어떻게든 쓰려고 할 테니. 그래서 기존 부서 로드맵의 미래를 좀 더 구체화하는 것으로 발표를 마무리했다. 짧은 시간 내에 별다른 실수 없이 깔끔하게 발표를 마쳤다고 생각했다.
사업부에서 전략과 상품기획, 연구소의 요직을 두루 거치셨던 연구 소장님이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비지팅 스콜라에 지원한 동기가 뭔가? 왜 가려고 하지?"
내 팀을 살리기 위해서. 아니 솔직히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언제나 후순위로 밀리는 내 연구주제를 해외 대학을 통해서라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부서에서 나를 끌어주는 사람은 없었고, 조직에서 스스로 자력갱생하기 위해서는 이런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현재 부서에서 진행되는 과제가 계획대로 마무리되어 성공적으로 상용화가 되면, 바로 다음 세대 제품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 시점에 경쟁사와 차별화된 기술을 조기에 확보하기 위해서, 선행 연구를 담당하던 제가 내년에 학술 연수를 통해...."
다소 진부했지만, 그때 생각할 수 있는 모범 답안으로 응수했다. 하지만, 소장님이 다음에 던진 한마디가 끝까지 버티고 있던 내 마음을 무너트렸다.
"연구 주제가 너무 협소한 것 같군. 그 정도라면 굳이 학술 연수 없이 국내에서 연구 가능하지 않나? 비지팅 스콜라는 연수를 다녀온 뒤 그 아이템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해. 새롭게 사업화를 이뤄낼 수 있는 아이템 발굴. 회사는 그러라고 학술 연수를 보내는 것이라네"
소장님의 이 말에 나는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연구 방향과 발표 전략의 완벽한 실패였다. 내 불순한 지원 의도, 편협한 생각과 시야를 지적당하는 것 같았다. 언제나 숲을 보지 못하고 한 그루 나무에 집착했던 내 민낯이 드러나던 순간이었다.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선발 결과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나는 떨어졌다는 것을.
"그래도 자네가 꼭 비지팅 스콜라를 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한번 말해보게"
감사했다. 마지막으로나마 내 열정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마음을 비우고 대답했다.
"현재 부서에서 진행되는 과제는 아시는 것처럼 미국 연구소의 주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해당 제품은 국내 어떤 회사에서도 개발한 적이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과제 관리에 애로사항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제품부터는 본사 연구소가 주도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랜 기간 선행 연구를 해오던 제가 짧은 기간 일지 모르지만 연수를 통해 관련 기술을 확보하여, 차세대 제품의 기술 리더십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진심이 전해진 것인지 예의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소장님과 몇몇 임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마음은 가벼웠다. 아쉬웠지만 아쉽지 않았다.
며칠 뒤 면접 결과를 메일로 받았다. 예상대로 불합격이었다. 팀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그들에게 결과를 알려주었다. 팀을 살리기 위해서라는 명분이었다지만, 어쩌면 나는 팀보다 내 커리어를 먼저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금 팀의 연구가 빛을 보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더 노력했어야 했을 것이다.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라고 불평하기에 앞서, 팀원을 더욱 격려하고, 연구 결과를 더 가다듬어 사업부와 부서장을 설득하는 것이 당시 내가 해야 할 일이었으리라. 면접을 보며 내 부족함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고, 그 경험은 삼성에서 퇴사할 때까지 연구원의 본분을 잊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결국 내 연구팀은 없어졌다. '끝내 열리지 않았던 시장'은 연구 팀을 유지할 명분을 더 이상 주지 못했다. 빠듯한 인력으로 대형 과제를 관리해야 했던 부서장에게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상황을 이해했기에 순순히 받아들였다. 팀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해서 팀원들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다른 팀의 일원으로 흡수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그렇게 원했던 미국 땅을 밟게 되었다. 연수와 같은 1년 해외 체류가 아니라, 이직이라는 영구 이주의 방식으로. 비지팅 스콜라로 갈 수 없었던 그 연구주제가 정작 나를 미국 이직으로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 온 뒤 얼마 안 되어 내가 해왔던 연구 주제의 제품 시장이 아주 크게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업계에서는 제품에 넣지 않으면 안 되는 필수 기술이 되었다. 불과 몇 년 사이의 일이었다.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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